주간동아 1066

2016.12.07

한창호의 시네+아트

리얼리즘과 리얼리티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6-12-06 11: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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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리얼리즘의 거장 켄 로치의 전형적인 ‘노동자 영화’다.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감독답게 켄 로치는 1960년대 영화계에 진출한 뒤 일관되게 노동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발표했다. 그의 변화된 정치의식은 노동자 주인공의 변화된 캐릭터로 짐작할 수 있다. 초창기 켄 로치 영화의 주인공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은 ‘영웅적인 노동자’였다.

    그런데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부 이후 노동자 주인공은 점점 열악한 작업환경에 놓이며 ‘소외’됐다. 일하는 사람이기보다 잠시 연장을 쥐고 있는 로봇 같았다. 최근에는 어찌됐든 일을 하던 과거가 행복해 보일 정도로 아무런 직업조차 갖지 못한 ‘실업자 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이 바로 그 실업자 노동자, 그것도 노인 노동자다.

    40년 이상 목수로 일한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는 최근 심장에 문제가 생겨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관련 수당을 받으려고 복지부 산하 기관에 문의했지만 해당자가 아니라는 답을 듣는다. 블레이크의 심장 전문의는 ‘노동 불가’를 통보했는데 관련 기관 상담원은 전화로 “모자를 쓸 수 있을 만큼 손을 들 수 있나요?” 같은 심심한 질문(test)을 한 뒤 노동이 가능하다고 통보한다. 여기서 켄 로치의 약간 ‘선동적인’ 교차편집 방식이 등장하는데, 한쪽엔 첨단 의료기구로 검사하는 전문의가 보이고, 곧이어 의사 전달도 겨우 해내는 상담원의 어리석은 질문이 이어지는 식이다. 그만큼 상담원의 질문이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뜻일 테다.

    화가 난 블레이크는 상담원에게 “당신들 회사는 미국 회사라던데?”라며 의심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켄 로치가 줄기차게 비판해온 신자유주의 폐해가 짧은 전화통화 속에 압축적으로 들어 있다. 복지 같은 사회의 기본적인 부분도 효율에 따라 일부 분사되고, 민영화되며, 외주화가 이뤄져 사실상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따르면 이제 복지는 행복과 별로 관계없는, 수익을 따지는 기업 같은 제도로 변했다. 평생 노동했고, 이제 몸에 병이 생겨 일하지 못하는 노인 노동자가 ‘효율’ 앞에 냉정하게 던져져 있을 때 어떤 일이 전개될까. 마치 개처럼(켄 로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 모욕당하는 블레이크의 울화와 분노는 켄 로치 특유의 다큐멘터리 같은 표현법에 의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이것이 켄 로치 리얼리즘의 힘일 텐데, 그의 표현법이 유난히 돋보이는 이유는 리얼리즘의 막을 뚫고 들어오는 ‘리얼리티’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실제로 등장하고, 이런 비전문 배우와 배우가 공존하며, 세트가 아니라 실제 공간에서 촬영이 이뤄지는 등 리얼리즘의 인공적인 문법을 침입하는 ‘현실(reality)’의 등장이 사실성을 더욱 증폭한다. 허구를 찢고 들어온 현실의 존재 덕에 우리는 노인 실업자 블레이크의 분노를 사실처럼, 또는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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