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6

2016.12.07

인터뷰

‘남자란 무엇인가’ 펴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 “역사는 진보한다, 청년이여 정치하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6-12-06 1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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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발표한 3차 대국민담화에 대한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사진)의 평가다. 안 명예교수는 담화 발표를 보며 ‘치밀한 법률 검토를 거쳤구나’ 하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고 밝혔다. “첫 번째 담화부터 그랬지만, 국민 앞에 진실을 털어놓기보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안 명예교수는 2013년까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헌법학회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가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발표를 보면서 받은 두 번째 인상은 ‘탄핵정국을 흔들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가려 하는구나’였다고 한다. 안 명예교수는 “대통령이 이날 임기 단축을 포함해 자신의 진퇴 결정을 국회에 맡긴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국회에는 그런 결정을 할 법적 권한이 없다. 이미 헌법과 법률에 따른 탄핵절차를 진행 중인 상황에서 대통령이 별도 의견을 밝힌 건 어떻게든 판을 바꿔보겠다는 정치적 승부수”라고 했다.



    권력은 왜 부패하는가

    “로마 법률가 키케로가 ‘법은 정실로 왜곡되고, 권력에 의해 파괴되며, 돈에 의해 부식된다’고 했어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 모습이 이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안 명예교수의 말이다. 그가 최근 펴낸 에세이집 ‘남자란 무엇인가’에도 인용한 구절이다. 안 명예교수는 약 5년 전 출판사에서 이 책의 집필을 요청받았고, 스스로도 한 번쯤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승낙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정국이 올 줄 전혀 모르던 시절 써내려간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이 권력과 부패에 대한 논의에 할애돼 있다. 그리스신화 속 ‘파리스의 심판’부터 ‘돈은 최상의 군인이다. 한 번도 패한 적 없다’는 셰익스피어의 말, 고(故) 김성식 고려대 교수가 ‘돈 따라 권력 따라 노구를 이끌고 다니는 늙은이’에게 쏟아낸 일갈까지, 안 명예교수의 붓끝은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런 대목도 눈에 띈다. ‘남성보다는 여성 정치인이 덜 부패할 것이다. 그것은 남녀의 본성 차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여건 때문일 것이다. 여성 정치인들에게는 부패할 여건이 덜 조성되고 기회도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부패할 여건과 기회를 가졌던 한 여성 정치인을 보고 있다. 그 광경은 충격과 분노를 자아내고, 때로는 자조와 한탄까지 불러일으킨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 상당수는 한 손에 촛불, 다른 한 손에 ‘이게 나라냐’ 같은 글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해 안 명예교수는 “촛불집회 현장에 두 번 나갔다. 아주 어린아이부터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노인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같은 집회에 참가하더라도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이번 사건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를 수 있겠죠. 하지만 모두 크게 놀라고 실망한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제 또래의 보수적인 사람들은 우리 시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까지 무너지는 충격을 느꼈을 거예요.”

    안 명예교수의 말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갖고 있던 시절에도 “저것이 모두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는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그리고 산업화·근대화 과정에 기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박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잖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그런 보수세력의 자긍심을 뿌리째 뒤흔들어놓았다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시대 상황에 따라 때로는 보수주의자로, 때로는 진보주의자로 불리는 안 명예교수 역시 이런 감정의 한 부분을 공유한다.

    “저는 우리나라가 민주화와 산업화의 이인삼각을 통해 비교적 성공한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이후 보인 행적은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그 전에는 그가 시대적으로 맡아서 한 소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박근혜로 인해 박정희란 개인이 상징하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이 다 무너진 데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 속에서 발전해”

    그와 세대가 다르고 정치적 관점이 다른 이들은 이번 정국에서 또 다른 이유로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절망할 때는 아니라는 게 안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러한 아픔을 딛고 일어나 정치적 목소리를 내며 그것으로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집회 현장 풍경만 봐도 우리나라 국민의 높은 수준을 한눈에 알 수 있잖아요. 정치권은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려 하고, 정당정치를 하기는커녕 특정인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느라 그 어떤 생산적인 논의도 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국민은 달라요.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옵니다.”

    이 얘기는 안 명예교수가 청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대학에 몸담았던 그는 세상을 바꾸려면 청년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요즘 우리나라 청년 사이에 널리 퍼진 ‘헬조선’에 대한 자조를 극복하는 길도 ‘청년 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 청년은 노년에 비해 수가 적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에 신경 쓰느라 다른 데 눈 돌릴 힘도 없고요. 그런데 계속 그 상태에 머물면 누구도 청년의 삶을 바꿔주지 않아요. 청년 스스로가 분노하고 그것을 조직화해 정치적 힘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꼭 기성정당에 몸담으라는 게 아닙니다. 정치에 대한 냉소를 버리고 지금 거리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 힘으로 다양한 정치적 행동을 해나가길, 이번 사태가 그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안 명예교수의 조언이다. 그는 지난해 윌리엄 더글러스 전 미국 연방대법관 (1898~80)의 평전을 펴낸 일이 있다. 1939년부터 36년 7개월간 미국 연방대법관을 지내며 평등, 민권, 환경 등에 관한 혁신적 판결을 내린 더글러스는 안 명예교수가 오랫동안 닮으려 한 인물이라고 한다. 특히 그를 사로잡은 건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 되지 않은 것, 과거를 돌아보기보다 미래를 내다보며 살려 한 태도를 평생 유지한 점이라고 했다. 그런 자세가, 그리고 자신이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결국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온다고 안 명예교수는 믿는다.

    “지금 국민이 거리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이 단박에 이뤄지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 속에서 발전합니다. 지금 우리가 발견한 희망으로 미래를 낙관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 세대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았듯, 우리 자식 세대도 우리보다 더 나은 나라에서 살 것입니다.”

    안 명예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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