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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디너쇼, 문화가 되다

우아한 밤 즐거운 밤 스타들에 묻힌 밤

‘호텔 디너쇼’ 한국적 송년 문화행사로 자리매김 … 20여년간 티켓 값 그대로, 상류층 전유물서 점차 벗어나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우아한 밤 즐거운 밤 스타들에 묻힌 밤

우아한 밤 즐거운 밤 스타들에 묻힌 밤
첫눈처럼, 올해 12월에도 어김없이 디너쇼들은 찾아온다. 나훈아, 패티김 등 디너쇼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대스타들에서부터 신세대 트로트 가수 장윤정까지, 그리고 재즈에서 마술까지 올해의 메뉴는 더욱 풍성하다.

보통 ‘특급호텔에서 저녁도 먹고, 트로트 가수의 공연도 본다’는 의미를 가진 디너쇼-영미권에서는 실제로 쓰지 않는 단어-는 이제 우리나라의 성탄과 송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문화가 되었다.

20~40대가 디너쇼에 대해 가진 최초의 기억은 어린 시절, 모처럼 성장을 한 어머니의 외출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특급호텔에서 열린 디너쇼는 서민은 물론 중산층에게도 꿈꾸기 어려운 기회였다. 장성한 자식의 첫 월급 선물로 조용필이나 나훈아의 디너쇼 티켓을 받았다거나 돼지꿈이라도 팔아 호텔 디너쇼에 갈 기회가 생겼다면, 어머니는 할머니나 이모에게 밍크코트를 빌려오는 수고쯤은 당연하게 여겼다.

“10년 전에도 디너쇼 티켓 가격은 15만원 안팎이었어요. 물가상승률이나 사회 분위기 등을 생각해볼 때 당시 15만원은 지금 50만원 이상이었으니, 디너쇼에 간 사람들은 특권의식을 가질 만했어요. 소비자의 상위 5~10%를 노린, 최초의 VIP 마케팅이 아니었을까요?”

90년대에 한 특급호텔 홍보실에 근무했던 안재만 애플트리 대표의 말이다.



디너쇼의 역사가 20년을 헤아리고 있지만 이상할 만큼 디너쇼에 대한 체계적 문서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디너쇼가 콘서트처럼 매니지먼트사의 연예 활동으로 기획되기보다, 호텔 연말행사의 하나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 자체가 최근까지도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디너쇼 기원 불분명 … 패티김이냐, 조용필이냐

그래서 디너쇼의 시작이 어디였는지가 불분명하다. 호텔 연회 담당자나 가수들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형식의 디너쇼는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부유층들의 결혼식이 특급호텔 연회장에서 열리던 70년대에도 겨울철 등 예식 비수기에 호텔 판촉팀은 식사와 쇼를 겸한 이벤트를 열곤 했지만, 이를 디너쇼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패티김의 공연기획사인 아이예스컴의 윤창중 대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60년대를 풍미한 패티김 씨가 가장 먼저 디너쇼 형식의 공연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우아한 밤 즐거운 밤 스타들에 묻힌 밤

디너쇼의 ‘원조’ 조용필 씨는 2000년부터 디너쇼를 중단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그의 송년 콘서트는 디너쇼 가격을 넘어선다.

그러나 조용필 씨의 기획사 YPC 조재성 씨는 이와 다른 주장을 편다.

“1984년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조용필 하얏트 디너쇼’가 최초의 ‘디너쇼’일 것이다. 당시 조용필 씨가 미국 카네기홀 등에서 공연을 하면서 미국의 예를 보았고, ‘디너쇼’란 말과 아이디어를 갖고 하얏트호텔과 함께 기획하여 성사를 시켰다.”

당시 최고의 공연장은 물론 세종문화회관이었지만, 대중가수들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따라서 80년대엔 특급호텔이 대중가수에게 허락된 최고의 공연장이었다.

톱스타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 디너쇼를 열고 싶어했다. 그 때문에 수백장의 티켓 판매를 떠안고 디너쇼를 열기도 했다. 디너쇼가 주로 열리는 5월과 12월이 되면 ‘누구 표가 몇 장 팔렸다’로 진짜 인기 순위가 가늠되었고,‘밍크코트가 몇 벌 보관되었는가’로 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급’ 가수인지 결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가수 조영남 씨는 “호텔에서 하든 전문 공연장에서 하든, 가수가 받는 개런티는 똑같다. 하지만 디너쇼 공연이 고급스런 공간에서 노래한다는 자긍심을 주는 건 사실이다. 가수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팬들만 모인다는 점에서 디너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다. 조명과 음향도 세심하게 체크하기 때문에 전문 공연장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

90년대 중반엔 기업 접대·효도 선물로 티켓 거래

그는 디너쇼를 찾는 지인들과 ‘뒤풀이’ 자리를 마련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인사를 대신하므로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디너쇼는 전성시대를 맞는다. 호텔이 늘자 코미디언이나 탤런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 디너쇼를 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 이주일 씨였다. 퇴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00여장씩 디너쇼 티켓을 구입하여 5공 인사들과 함께 그의 공연을 보러 오곤 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접대나 효도 선물로 디너쇼 티켓을 주고받는 일이 흔해졌다. 기업들이 술 접대 일색에서 디너쇼 접대로 그 폭을 넓힌 것. 96년엔 신라호텔과 경주 현대호텔에서 조용필 씨가, 힐튼호텔에서 고 이주일 씨가, 워커힐 등에선 패티김·하춘화 씨의 디너쇼가 열리는 등 당대의 스타들이 모두 디너쇼를 열었다. 이때 이미 재즈 디너쇼도 시도됐지만 실패해 ‘디너쇼는 트로트 가수만이 성공한다’는 통설이 형성됐다.

한 호텔 관계자에 따르면 그즈음에 법인카드로 디너쇼 티켓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초보적인 형태의 ‘문화 마케팅’이 시작된 셈이다.

같은 시기에 호텔들은 ‘디너’만 팔던 소극적 자세를 바꿔 ‘쇼’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기획사가 가져가던 몫을 호텔 연회팀이 직접 챙기기 시작한 것. 지금은 힐튼호텔처럼 호텔에서 직접 디너쇼 기획을 하는 곳과 그랜드하야트호텔처럼 여전히 대관 기획만 하는 곳으로 나뉘는데, 비율은 대략 반반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디너쇼 티켓 가격이 80년대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15만원 안팎에 머물러 있는 것은 뜻밖이다. 다른 공연물이 늘어 경쟁이 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디너쇼는 기획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공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호텔 연회 기획자는 “호텔 입장에서 디너쇼는 기획, 연출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는 매력이 있다. 디너쇼를 좀 다양화하려고 젊은 가수를 초청해보았는데, 연출료가 너무 비싸 전혀 이익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디너쇼는 전문 연출자나 복잡한 무대 및 음향 효과 없이 전적으로 가수 1인에 의해 기획되고 진행된다. 그리고 공연장과 공연 일수는 그 가수가 동원할 수 있는 고정 팬이 몇 명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1만원 안팎의 음반 판매량이나 몇백 원짜리 음원 다운 횟수와는 전혀 관계없다. 1회 공연에 15만원을 내기 위해 1년을 기다린 팬들이 몇 명인가가 특급호텔 연회 담당자들만이 가진 비장의 ‘데이터’다. 2000만~8000만원 사이의 가수 개런티도 업계에서는 극비로 여겨진다.

호텔업계에선 디너쇼의 프린스로 나훈아 씨 손꼽아

따라서 디너쇼를 할 수 있는 엔터테이너는 극히 한정된다. 나훈아, 조영남, 패티김, 주현미, ‘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와 김세환, 이미자, 인순이, 심수봉 등과 올해 처음 디너쇼를 갖는 장윤정 정도가 꼽힌다. 가수는 무대를 어떻게 꾸미고, 무엇을 입고, 어떤 주제로 관객들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느 대목에서 관객들을 눈물짓게 하고 박수를 유도할 것인가까지 혼자 계산해야 한다. 또한 관객들에게 어떤 음식이 제공되는지도 챙겨야 한다. 예를 들면 패티김 씨는 최상급의 고기가 제공되는지 꼼꼼하게 알아보고, 나훈아 씨는 중년층의 입맛에 맞는 고추장 소스 등을 직접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너쇼 무대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가수는 누구일까. 호텔업계에서는 ‘디너쇼의 프린스’가 나훈아 씨라는 데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데이터’로 보면 나훈아 씨는 그랜드힐튼 호텔의 1020석을 4일 연속 매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수다. 호텔 음식도, 트로트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다는 송민영(48) 씨는 “우연히 친구에게 끌려가다시피 디너쇼에 갔다가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나훈아 씨의 정성이 느껴졌어요. TV나 콘서트보다 디너쇼에서 가수의 재능과 열정이 더 잘 보이더군요. 나훈아 씨가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아리랑 가수’로 불러달라고 할 때는 코끝이 시큰했어요. 그 때문에 연말엔 꼭 그의 공연을 보러 가는 팬이 됐지요.”

팬클럽인 ‘나사모’(‘나훈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기획사의 ‘관리’ 없이 그의 디너쇼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나훈아 씨 팬들로, 지금 나훈아 씨와 호텔 측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다.

나훈아 씨의 송년 디너쇼를 7년째 유치해온 그랜드힐튼호텔의 오시환 연회판촉팀장은 “나훈아 씨는 50~60명으로 이뤄진 조명, 음악, 합창, 무용 팀과 수없이 많은 공연을 해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래도 공연 전이면 하루 반나절 정도를 꼬박 리허설에 매달린다. 나훈아씨가 무궁무진하게 아이디어를 내는데, 호텔 직원들이 촛불을 들고 공연에 참여하도록 연출하기도 했다. 네 차례 공연을 모두 보는 관객들도 있고, 아예 호텔에 투숙해 공연을 보는 일본 관광객들도 있다”고 말한다.

우아한 밤 즐거운 밤 스타들에 묻힌 밤

신세대 가수 장윤정은 올해 처음 송년 디너쇼를 연다. 그녀는 콘서트 대신 디너쇼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나훈아 씨의 공연 매니저는 “매회 공연이 다음 공연을 위한 연습이어서 매회 공연이 조금씩 고쳐지고 달라진다”고 말한다. 나훈아 씨처럼 수십 년 동안 ‘직관적’으로 관객을 만나온 가수들에게는 TV쇼의 짜여진 구성이 오히려 답답한 틀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디너쇼의 ‘원조’인 조용필 씨가 99년 12월31일 제주 신라호텔의 밀레니엄 디너쇼를 마지막으로 연말 공연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옮겨간 것도 호텔이 그의 공연 형식을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호텔 공연장은 조용필 씨가 원하는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고 나면 불과 100석 정도의 좌석이 나올 뿐이다. 그런 데다 안전상의 이유 때문에 적절한 특수효과를 낼 수도 없다는 것이 기획사와 호텔 측의 이야기다.

올해 조용필 씨의 예술의전당 콘서트(2200석)는 2주 동안 열린다. 주말 VIP석이 14만원-물론 식사도 맥주도 없다-이므로 ‘디너’란 가수를 보러 온 팬들에겐 별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20년 동안 가수도, 형식도, 심지어 티켓 값도 거의 변화하지 않았던 디너쇼들이 최근 달라지고 있는 것은 이런 시대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트로트 가수가 대부분 … 재즈·발라드 쪽으로 영역 확산 중

줄곧 대중가수의 디너쇼를 유치해왔던 신라호텔은 이부진 상무(이건희 회장의 장녀)가 ‘컨템포러리한 세계적 수준의 비즈니스 호텔’을 지향하면서 지난해부터 재즈가수 윤희정 씨의 재즈갈라디너를 열고 있다. 일반 관객은 배제하고 크리스마스를 신라호텔에서 보내는 투숙객들만이 관람할 수 있게 해, 재즈를 좋아하는 ‘젊은 상류층의 사교 파티’ 성격을 갖게 했다. 2인 40만원이므로 숙박비와 디너쇼 티켓 값을 더하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는 게 호텔 측의 설명.

워커힐은 비스타홀에서 윤희정 디너쇼와 주현미 디너쇼를 이어서 연다. 워커힐 예능팀 권성우 지배인은 “디너쇼가 트로트 가수 쇼의 이미지로 굳어져가는 데 대해 반발이 있지만, 아직은 조심스러운 입장”이라는 말로 고민을 밝혔다.

지난여름 SG 워너비의 디너쇼를 기획해 대성공을 거둔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옛 아미가)은 트로트 가수의 송년 디너쇼를 기획하지 않기로 하고, 올해는 정성모 씨의 매직 디너쇼를 진행한다. 타깃층은 30, 40대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 단위. 기획자인 권오익 차장은 “외국 가수 유치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고, 1월에는 젊은 발라드 가수의 디너쇼를 열 예정이다. 이는 가요계에서도 놀랄 만한 소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SG 워너비 디너쇼의 성공은 99년 ‘트윈폴리오’의 20년 만의 재결합 공연을 성사시킨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디너쇼를 연상시킨다. 처음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던 공연은 가요사적 의미를 부여받은 뒤 완전 매진됐다.

그렇다면 호텔이 대안적 공연 공간이 될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부정적이다.

디너쇼의 목표는 호텔과 가수에게 극대화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기획의 유일한 목적은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음악평론가 이영미 씨는 “콘서트와도 다르고, 우리 식 잔치와도 다른 서양적 분위기, 특급호텔이 가진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욕망 때문에 디너쇼는 매력적이다. 디너쇼란 음악보다 호텔이란 장소로 표시되는 문화”라고 말한다.

은밀한 쾌락과 최고의 서비스를 보장하는 특급호텔에서 디너쇼는 식사에 따라 나오는 일상적인 메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디너쇼는 서양을 향해 갑자기 문을 연 80년대의 독특한 문화로 태어났다. 그것은 ‘현대성’으로 위장하고 80년대가 만든 또 하나의 기형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장년층 공연 문화의 원형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나훈아와 패티김의 계보를 잇는 디너쇼의 황제가 SG 워너비가 될지, 장윤정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디너쇼는 계속될 것이고, 디너쇼 덕분에 송년을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Show must go on!



주간동아 2005.12.13 514호 (p28~31)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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