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7

2005.05.31

“우리 집? TV 안 나가도 맛있어”

‘맛집’ 10곳 중 2곳 방송 출연 거부 … 반짝 매출 긴 후유증 때문에 단골로만 승부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5-27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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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TV 안 나가도 맛있어”
    서울 중구의 한 ‘먹자’골목. 닭칼국수, 설렁탕, 매운탕, 회, 불닭 등 온갖 음식점들이 모여 있고, KBS MBC SBS 등 방송사 로고와 방송인들의 얼굴이 인쇄된 현수막이 먼저 손님을 맞는다. 이른바 ‘TV 출연 맛집’임을 알리는 홍보간판들이다. 이곳뿐 아니다. 불닭 골목, 곱창 골목, 순대 골목, 파전 골목 등 어디든 특정한 음식점들이 몰려 있는 지역에 가면 ‘TV 출연 맛집’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는 것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곳에서 경쟁은 음식 맛이 아니라 현수막에 쓰인 방송과 신문 출연 횟수로 결정된다.

    대표적인 음식 프로그램인 SBS ‘맛대맛’과 MBC ‘찾아라 맛있는 TV’에 한 주에 40~60개 맛집이 출연하고, 그외 아침 저녁 교양 정보 프로그램들과 ‘VJ 특공대’ 등에서 쏟아내는 맛집 프로그램들까지 포함하면 일주일 동안 맛집으로 지정받는 음식점들이 100개 안팎에 이른다. 또 ‘불닭’류의 닭요릿집이 맛집 출연을 계기로 ‘대박이 터져’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되기도 하고, 프랜차이즈 중 한 집이 출연하면 전 지점에 ‘TV 출연’ 현수막이 걸린다. 그러니 ‘맛집’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TV 맛집 프로그램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프랜차이즈 식당은 제외한다’는 것이지만, “맛집이 외식‘산업’이 되는 것이 대세라 원칙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제작진들의 고백이다. 요즘은 ‘똑같은 맛이라 TV 출연 맛집 현수막을 붙였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가짜 맛집 주인들도 많다.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관철동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맛집’들이 생기고 사라진다. 이곳에서 21년 동안 영업해온 한 공인중개사는 “일본식 우동, 와인 삼겹살, 찜닭, 불닭 등으로 맛집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데 점점 그 기간이 짧아진다. 특히 이곳은 안테나숍이 많아 TV 맛집 프로그램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맛집이 워낙 많아서 생겨난 일들이다.

    그러다 보니 ‘맛집’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음식점들도 늘어나고, 아예 출연을 거부하는 맛집들도 적지 않다. MBC ‘찾아라 맛있는 TV’에서 5년 동안 집필해온 김영주 작가는 “섭외가 점점 어려워진다. 요즘은 10곳 중 2곳은 출연을 거부할 정도”라고 말한다.

    “수십 년 동안 장사해서 이미 언론을 많이 탄 곳, 확실한 단골들이 있는 곳은 출연을 꺼린다. 속초 가자미회 국숫집을 섭외했는데 주인 부부가 ‘단골로 충분하다. 얼마나 돈을 벌겠다고 서울 방송국까지 가냐’고 사양했다.”(홍수연, SBS ‘맛대맛’ 대표작가)



    외식산업 유행 6개월이 평균

    언론 노출을 위해 막대한 홍보비를 쓰는 음식점들이 있는가 하면, 냉정하게 출연 제의를 거절하는 맛집들이 생겨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으로 ‘방송 출연의 효과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TV 맛집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막강해서 출연 직후에는 손님 수가 최소 2배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아무리 맛이 있어도 ‘넉넉한 인심’과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하긴 어렵다. 맛집 프로 인터넷 게시판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불평도 이런 지적이다.

    방송이 나간 당일 출연한 집에 가면 줄을 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음식을 파는 다른 음식점들에까지도 손님들이 몰린다. 이처럼 손님들이 몰리면 음식 맛이 떨어지고, 서비스가 부실해져 진짜 단골들이 떨어져나간다는 것이 맛집 주인들의 철학이다. 한 복요리 전문점 주인은 “바로 옆, 다른 복 매운탕집이 TV에 자주 출연한다. 우리 집을 ‘TV 출연 업소’로 착각하고 오는 손님들이 있을 정도다. 매출에 도움 되는 건 눈으로 봐도, 한번 오고 말 손님들 때문에 단골손님들이 떠나는 건 못 보겠다”고 말한다.

    음식뿐 아니라 TV 출연을 일체 거부하는 깐깐함으로도 음식평론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집이 60년 전통의 설렁탕집 ‘하동관’이다.

    “TV 촬영은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번잡하게 찍어대 싫어요. 그래도 간혹 평론가나 기자들이 찾아와 음식 맛, 인생 얘기 하다가 슬슬 통한다 싶으면 가게를 보여주죠. 그래도 음식값은 꼭 받는 게 내 원칙이오.”(장석철 ‘하동관’ 대표)

    “우리 집? TV 안 나가도 맛있어”

    외식산업과 식재료업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SBS ‘맛대맛’. 제작진은 맛집 프로그램이 아니라 음식 프로그램임을 강조한다.



    맛 프로그램 엄청난 영향력


    하동관 외에 우래옥, 을지면옥, 비노로소, 조선옥, 양미옥 등이 언론 노출을 달가워하지 않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 수십 년 이상 같은 자리를 지켜온 집들인데, 이런 맛집들 중에서도 갑자기 TV 등 매체 출연이 많아지면 2세로 경영권이 넘어가거나 프랜차이즈화를 앞둔 경우가 많다.

    맛집들이 TV 출연을 사양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출연으로 얻는 매출 증가는 잠깐인 데 비해, 후유증이 길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막회’ 집 대표는 “출연 후 ‘한동안’ 손님이 두 배로 늘긴 했다. 그러나 유사한 언론과 각종 인터넷 맛집 사이트에서 연락을 해와 출연과 광고 권유를 하는 바람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곳뿐 아니라 TV 출연 맛집에 가면 밖에는 똑같은 모양의 현수막이 걸려 있고,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TV 출연 장면 액자들이 붙어 있다. 이런 똑같은 액자들이 개성 있는 맛집들을 ‘TV 출연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바꿔버리는 셈이다.

    “방송 출연 후 방송사에서 액자를 하라고 권하더군요. 어차피 방송 사진도 그쪽에서 갖고 있으니, 그냥 달라고 하기도 미안해서 샀어요.”(TV 맛집 프로그램 출연 업소 주인)

    실제로 한 방송사 자회사는 자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업소들을 대상으로 ‘출연 홍보액자신청’을 받아 팔고 있는데, 가격은 5만5000원에서 77만원에 이른다. 벽면 가득 액자를 단 종로구의 또 다른 맛집 주인도 “액자랑 현수막은 방송국에서 다 해갖고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TV 맛집 프로그램 관계자는 “방송사에서 직접 액자를 판매하는 것을 최근에 알고 당황스러웠지만, 강제도 아니고 수익 사업을 하는 데 반대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우리 집? TV 안 나가도 맛있어”

    외식산업과 식재료업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SBS '맛대맛'. 제작진은 맛집 프로그램이 아니라 음식 프로그램임을 강조한다.

    음식점 주인들이 부작용을 두려워할 만큼 TV 맛집 프로그램들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한 TV 맛집 프로 제작진은 10집 중 한 집은 촬영날 ‘알바’ 손님을 동원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프로그램 제작진은 “감자탕 소개가 나가면 정육점 돼지뼈 판매량이 20% 늘고, 냉면이 나가면 냉면집들 면이 동난다. 토마토와 딸기가 나간 뒤 농협과 협력체제가 갖춰질 정도다. 뿌듯하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무겁다”고 말한다.

    음식평론가 고형욱 씨는 “‘맛집’ 프로그램이 획일화된 맛집을 만들어내고, 먹는 것의 즐거움을 연예인들의 ‘허풍’으로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1년 이상 장기 기획이 이뤄진다면 부작용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른바 ‘먹자골목’에서 30년간 밥집을 운영하며 맛집 출연을 거부한 한 음식점 주인은 “TV 출연 한 번도 못한 집’이라고 현수막을 붙일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홍수 난 ‘맛집’들에 대한 진짜 ‘맛집’의 반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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