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8

2016.10.12

북한

1차 핵실험 후 10년 노동당 창건 기념일의 추억

71주년 행사, 화려한 열병식 대신 핵·미사일 도발 가능성만 남아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입력2016-10-07 18:25:3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꼭 10년 전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건 61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1차 핵실험을 했을 때 혼란스럽던 당시 상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통일부에 출입하던 후배는 가까스로 태평양 같은 지면을 막아낸 뒤 전화를 걸어 “앞으로 얼마나,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절규했다. ‘거사’를 앞두고 북한은 핵실험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제로 핵실험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북한이 그럴 능력이 있겠느냐’고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보다 1년여 전인 2005년 9월 북한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당사국들과 9·19공동성명에 서명했던 북한은 마카오 소재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보관해둔 자금을 미국 재무부가 동결한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국제사회는 북한 달래기에 나섰고, 그 결과 다시 재개된 6자회담은 2007년 2·13합의와 10·3합의라는 9·19공동성명 실행 방안에 합의했다. 미국 재무부도 BDA에 대한 제재를 풀었다. 그러자 북핵 문제가 해결됐다는 오판과 헛된 기대가 다시 팽배했다. 북한이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단행할 때까지 말이다.

    최근 여권 등 보수진영에서는 북한 핵 보유를 저지할 ‘골든타임’은 2006년 1차 핵실험으로 사실상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 여권 인사는 “역대 핵보유국의 사례를 보라. 언제 첫 번째 핵실험을 했느냐가 중요하고 또 이를 기억하는 것이지, 다음에 몇 차례 더 실험을 했느냐는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의 1차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 회피용 논리이기도 하지만,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첫 핵실험을 하고도 핵무기 개발에 실패한 국가는 없다.



    1차 핵실험 성공 10주년

    노동당 창건 71주년을 기념하는 10월 10일을 전후로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관측은 국내 정치적으로 중요한 날에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진전해온 북한의 습성에서 나온 경험적 추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기념일인 9월 9일 오전 9시를 기해 5차 핵실험을 단행했던 북한은 여러 차례 추가 핵실험 가능성을 언급했다. 북한이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 가운데 한 번도 핵실험을 하지 않은 3번 갱도에 대형 위장막을 설치한 사실도 한미 군당국의 정찰 위성에 포착됐다. 군당국도 김정은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언제든 추가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북한이 ‘신형 대출력 발동기(엔진)’를 이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에 나서거나 핵탄두 여러 개를 동시에 폭발시키는 ‘몰아붙이기 식 위협’을 가할 개연성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10월 4일 ‘조선(북)의 위성이 광활한 우주에 또다시 진입할 역사의 순간을 그려보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조만간 추가 위성(ICBM)을 발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일각에서는 “5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수위를 본 뒤 핵실험이나 ICBM 발사 카드를 꺼낼 것”이라는 신중론도 나온다.

    6년 전인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에는 사망 1년여 전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처음으로 아들 김정은을 열병식 주석단에 데리고 나와 무용수 고영희와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후계자가 됐음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했다. 주석단에서 박수를 치며 옆에 선 아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말년의 김정일 모습이 세계 언론의 1면 톱을 장식했다. 김정은의 앳된 모습은 국제사회 전문가들 사이에서 ‘희망적인 사고’를 낳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유학한 젊은 지도자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지극히 서구적인 가정이었다.

    통일부 기자실에서 조선중앙TV로 전해지는 김정은의 대관식을 본 것은 공교롭게도, 이날 오전 자택 욕조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특집 오비추어리를 쓸 때였다. 고(故) 김일성 주석의 사람인 황 전 비서는 사망 9일 전인 10월 1일 기자와 생전 마지막 단독 인터뷰에서 “벌써부터 그(김정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이르다. 이제 막 얼굴을 드러냈으니 시간을 가지고 좀 지켜보자”며 평가를 유보했다.



    김정은과 함께 열병식에 등장한 미사일부대

    그가 평소 김정일을 ‘망나니’라고 폄훼하던 것과는 달랐다. 김정은은 뭔가 다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잘해서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이끌면 칭찬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면서도 “북한의 본질적인 문제(수령 절대주의 독재체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든, 또 다른 누가 후계자가 되든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열병식에는 이영호 군 총참모장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이을설 인민군 원수, 이용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주상성 인민보안부장,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말년 김정일의 최측근이 대거 출동해 새 후계자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동원된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열병식에는 병력 1만여 명과 미사일, 전차, 방사포 등 각종 무기 200여 가지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정부당국자는 “그동안 인민군 창건 기념식에 미사일과 탱크가 등장했지만 노동당 창건 기념일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열병식에 초청된 외신기자 80여 명이 특히 주목한 것은 조선중앙통신이 ‘주체식 미사일 및 요격미사일 종합체’라고 명명한 미사일부대였다. 이날 등장한 공격용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300〜500km인 스커드B, C 미사일과 사거리 1300km인 노동미사일, 당시로서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무수단’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등이었다. 북한은 지난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에도 대대적인 열병식을 통해 ‘KN-08’ 미사일 탄두 모양을 개량한 신형 모델과 300mm 방사포(다연장로켓의 북한식 표현)의 실물을 공개했다.

    김정은이 등장한 두 차례 노동당 창건 기념일 열병식장에는 중국과 북한의 전통적인 당 대 당 관계를 상징하듯 중국 고위 외교 사절이 참석했다. 2010년 10월 10일에는 중국 사절단장인 저우융캉(周永康)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영림 내각 총리, 김철만 당 중앙위원(군 최고 원로),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이 함께 자리했다. 지난해 10월 10일에는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이 평양으로 날아가 김정은 옆 주석단을 채웠다. 당시는 북·중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김정은의 베이징 첫 방문설이 나오던 상황이었다.

    이번 10월 10일에는 당시 같은 거대한 열병식이나 중국 고위 사절단의 방북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북한은 각종 기념일의 정주년(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을 따지는데, 올해는 71주년인 만큼 대규모 열병식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아직까지 평양에서 대규모 훈련 동향이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사절단에게 보여줄 열병식도 없을뿐더러, 6차 핵실험 등 추가 도발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중국도 고위 인사를 평양에 보내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1주년 기념일의 관전 포인트는 국제사회의 통제에서 벗어난 북한의 도발 가능성만 남은 셈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