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8

2016.10.12

사회

‘선행’으로 만든 영재, 우후죽순 영재원

특목고 진학 수단으로 전락, 유치원생 때부터 준비…정작 커리큘럼은 주먹구구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입력2016-10-07 17: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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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초중등생 학부모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단연 ‘영재교육원’이다. 9월 중순부터 2017학년도 영재교육 대상자 선발 요강이 발표되자 각자 원하는 영재교육원에 입학 지원서를 접수하느라 분주하다. ‘혹시 내 아이가 영재는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수학, 과학을 잘하면 대학 가기 유리하다’는 불문율까지 더해져 영재교육원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현재 운영 중인 영재교육기관은 크게 3가지 유형이다. 시도별 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과 서울시교육청 소속 직속기관 및 단위학교 영재교육원, 대학부설 영재교육원이 그것이다.

    서울에는 총 11개의 교육지원청이 있는데, 강남서초교육지원청의 경우 초등학교는 대치초(수·과학융합 60명), 서초초(과학 60명), 압구정초(미술 20명), 언북초(수·과학융합 40명), 일원초(융합정보 20명), 학동초(수학 60명)가, 중학교는 개포중(수학 60명), 경원중(과학 60명), 대명중(수학 60명), 대왕중(융합정보 20명), 서운중(미술 20명), 신사중(과학 60명), 원촌중(수학 60명)이 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으로 등록돼 있다. 학교장 재량으로 운영하는 영재학급도 21개 초등학교와 8개 중학교에서 운영 중이다. 서울시교육청 소속 직속기관 및 단위학교 영재교육원은 서울시과학전시관, 서울과학고, 세종과학고, 한성과학고, 아현산업정보학교 등 15개이고, 대학부설 영재교육원은 총 16개로 서울대·연세대·서울교대 과학영재교육원, 고려대·이화여대·덕성여대 영재교육원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과 대학부설 영재교육원은 중복 지원할 수 없으며 해당 기관에 따라 선발 시기와 인원이 다르다. 먼저 서울시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의 올해 모집 정원은 총 5700명으로 9~12월에 선발한다. 직속기관 및 단위학교 영재교육원의 모집 정원은 920명이며 음악·미술 분야 영재는 내년 2~4월에 따로 뽑는다. 대학부설 영재교육원의 모집 정원은 1480명으로 9~12월 선발하며, 일부 기관은 1~5월에 이미 뽑은 상태다. 그 밖에 영재학급에서 관리하는 인원은 총 1만240명(3월 기준)이며 2017학년도 영재는 내년 2~5월 선발한다. 현재 ‘영재’라 부르는 초중등생 수는 서울에만 1만7340명이다. 전국으로 넓히면 초중고 학생 608만8827명의 1.81%에 해당하는 11만130명이 영재교육을 받고 있다.



    “영재는 시험으로 선발할 수 없다”

    영재교육 대상자가 급격히 늘어난 데는 정책의 힘이 크다. 1999년 정부는 재능이 우수한 학생을 조기 발굴해 능력과 소질에 맞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인재를 확보한다는 취지로 ‘영재교육 진흥법’을 제정했다. 당시 서울시교육청은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의 영재 비율이 전체 학생의 5~15%라는 점을 들어 서울시 영재교육 대상자도 향후 2~3%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이 계획은 현실이 돼 조만간 영재 비율이 전체 학생의 2%에 육박할 예정이다. 영재교육기관 또한 과거 400개에서 현재 2500여 개로 늘어난 상태. ‘2015년도 교육기본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영재교육기관은 영재학교·과학고 28개, 교육청 산하 기관 261개, 대학부설 기관 82개, 영재학급 2168개 등 총 2539개에 달한다(표1 참조).



    이쯤 되면 ‘영재가 진짜 영재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영재교육원이 공부 잘하는 아이가 거쳐 가는 일종의 ‘코스’처럼 돼버렸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실제로 영재교육원 입학을 준비하는 아이 중에는 과학고, 영재고 등 특수목적고교(특목고) 진학을 최종 목표로 삼는 경우가 다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가 서울교대 과학영재교육원에 지원했다는 학부모 K씨는 “주변을 보면 영재교육원을 과학고 진학을 위한 스펙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영재교육원에 지원하고 보니 그동안 선행학습을 안 시킨 게 후회됐다. 만약 이번에 떨어지면 지금부터라도 수학·과학 학원에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학원 선행학습이 영재교육원 합격의 열쇠로 인식되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 학원가에는 ‘영재원 대비반’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결국 영재도 학원에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영재 선발 과정만 살펴봐도 영재교육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현재 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은 지필시험으로 영재를 선발한다. 결국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이 문제 풀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수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반복적인 문제 풀이 경험으로 시험 점수를 높일 수 있고, 이런 경험은 사교육의 또 다른 말이 돼버렸다. 교육지원청에서 실시하는 ‘영재교육 대상자 선발 수행관찰 문답지’를 살펴보면 선행학습을 한 학생에게 유리한 문제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나라 영재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 같은 존재가 아닌, 이미 잘 깎이고 다듬어진 보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기소개서는 엄마 몫

    시험 없이 자기소개서와 면접으로 영재를 선발하는 대학부설 영재교육원도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글쓰기 숙련도가 낮은 초등학생에게 영재교육원 입학 서류 작성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학부모가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거나 사교육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자기소개서와 함께 기록하는 독서활동 부분은 초등 독서논술 사교육과도 연결된다. ‘지원 분야와 관련된 책 중 가장 많은 성취감을 얻은 도서’ 1권을 선정하고 이 책을 통해 배운 점과 영향받은 내용을 기술하게 돼 있는데, 상당수 논술학원이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별도로 운영 중이다. 심지어 영재교육원 입시전형 ‘A to Z’에 대비해주겠다며 테스트부터 서류 작성, 창의력 수학, 토론 및 프로젝트 수업, 면접까지 전 과정을 커리큘럼으로 내건 사교육업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수일 대표는 “보통 초등학교 2학년 때 영재교육기관에 지원서를 넣는데, 준비가 철저한 부모는 아이가 유치원생일 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사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한창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를 이런 식으로 책상 앞에 묶어두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는 부모 스스로 고민해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영재교육기관이 선발 기준을 명확히 해 진정한 영재를 뽑을 수 있도록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최 대표는 “대학 입학사정관처럼 영재교육기관에도 영재를 선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영재교육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영재 선발인 만큼 국가가 책임지고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영재교육의 또 다른 문제점은 제대로 된 커리큘럼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가 양적 팽창에만 신경 쓸 뿐 질적 향상은 늘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표준교육과정 업무를 총괄하는 기관은 한국교육개발원 내 영재교육연구센터로, 2011년 영재교육 진흥법에 근거해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 시도교육청이 연계해 영재교육 관련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만들어졌다. 따라서 시도교육청은 해마다 지방재정교부금 가운데 3000만 원(제주는 2000만 원)을 영재교육개발비로 부담하고 있지만 정작 이 돈을 받는 영재교육연구센터는 제대로 된 커리큘럼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재 영재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교재는 수업을 맡은 교사가 직접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완벽하진 않지만 지난 4년 동안 수학, 과학 커리큘럼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현재는 인문·사회 관련 내용을 설계하고 있는데, 가장 큰 애로사항은 예산이다. 교육부에 내려오는 국고는 연 2억9000만 원 정도다. 이 예산으로 사업을 추진하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전문성 부족한 교사들

    영재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의 참여도도 높지 못한 상황이다. 토요일마다 시간을 내 수업을 진행해야 할 뿐 아니라 교습 관련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재교육 담당교원은 일반적으로 해당 교육지원청 소속 교사가 맡는데, 대학원 교육과정을 통해 기초(60시간), 심화(120시간) 연수를 거치면 영재교육 담당교원 자격이 주어진다. 과거 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에 강사로 출강한 적이 있는 모 과학고 교사 출신 A씨는 “영재교육원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아는 건 오로지 교사 자신밖에 없다. 상위 기관에서 정한 커리큘럼이 없다 보니 어느 누구도 교수법이나 교육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보통 교사를 섭외할 때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가르쳐달라’가 아니라 ‘몇 시간만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식이고, 담당교원 선발도 교육감이 임의대로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확한 방향성이 없는 상태에서 해마다 교사가 바뀌다 보니 어렵게 시험에 합격하고도 영재교육원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5년간 해마다 영재교육기관 수학 영재로 발탁된 P양(중2)은 6월 중간고사를 앞두고 교육지원청 소속 영재교육원을 그만뒀다. 이유는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P양의 어머니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재미있게 다녔는데, 지난해 배운 내용을 올해도 또 배우다 보니 새로운 게 없다더라. 더욱이 지난해에는 자유학기제 덕에 학교 공부에 부담이 없었는데 올해부터는 내신도 신경 써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영재교육원을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교육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영재교육원에 보내려는 부모가 있는 반면,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겨 추천하지 않는다는 이도 꽤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모 스스로 아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온갖 사교육을 동원해 영재교육을 받게 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영재로 키우는 건 그와는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재교육이 아이에게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강병훈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는 “영재교육원에 다니면서 오히려 학업에 흥미와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아이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아이들과 경쟁하면서 느낀 심리적 부담과 스트레스가 부작용으로 나타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강 전문의는 “심지어 영재교육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는 영재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교육과정이 자신과 맞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영재교육원에 다닌 경우였다. 부모는 대개 토론식 수업이 창의적이고 아이의 지능개발에 좋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모든 아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성향과 능력에 맞지 않는 경우도 분명 있다. 특히 주의력결핍 등 심리적 문제가 있다면 공부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최근 학부모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는 영재 판별 검사도 그 결과를 전적으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요즘 강남에서는 아이가 30개월만 넘으면 영재교육학원에서 ‘카프만 아동용 개별 지능검사(K-ABC)’와 ‘한국 웩슬러 유아 지능검사(K-WPPSI)’를 받는 게 유행인데, 단 한 번의 검사로 섣불리 아이 미래를 결정지으려 해서는 안 된다. 강 전문의는 “아이의 재능 혹은 영재성을 일찌감치 찾아주려는 부모의 심리를 이용해 지적 능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이에게 지능검사를 유도하는 건 문제다.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게 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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