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7

2016.10.05

국제

일촉즉발, ‘서남아 화약고’ 카슈미르

분리주의 무장단체 지도자 사망으로 인도-파키스탄 분쟁 재점화…중국 개입으로 갈등 격화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6-09-30 18: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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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아시아의 화약고’인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 해묵은 분쟁의 불길이 다시 치솟고 있다. 7월부터 석 달째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 청년들의 분리주의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80여 명이 사망했다. 또 파키스탄 무장단체 소속 대원 4명이 9월 18일 카슈미르 지역 국경을 넘어 인도군 기지를 습격해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을 난사해 장병 18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공격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무장단체 자이시-에-무함마드(JeM)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 정부가 카슈미르의 분리주의를 부추기고자 자국 무장단체를 배후 조종했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반면 파키스탄 정부는 카슈미르 주민을 강압적으로 통치해온 인도가 문제라면서 무장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반박했다.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카슈미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부분에 있는 남쪽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이는 22만㎢로 한반도와 비슷하다.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북동부, 중국 서북부와 접하고 있다. 땅의 90%는 산악지대로 해발고도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6개나 있다. 한국 산악인이 많이 찾는 K2봉은 카슈미르 북쪽에 위치한다. 인구는 카슈미르 서쪽 지역인 파키스탄령 카슈미르가 380만 명, 인도령 카슈미르가 820만 명이다.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70%)이고 힌두교 신자는 소수다. 히말라야 산맥의 빛나는 만년설 아래 ‘서남아시아의 알프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운 카슈미르에선 피와 눈물이 마를 시간조차 없을 만큼 유혈 사태가 계속 발생해왔다.

    분쟁의 씨앗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인도 대륙이 1947년 종교(힌두교, 이슬람)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면서 뿌려졌다. 당시 카슈미르는 두 나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무슬림 주민은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를 희망했지만 힌두교를 믿는 영주 하리 싱이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해버렸다. 이에 반발한 무슬림 주민들이 같은 해 10월 폭동을 일으켰고, 파키스탄이 지원 병력을 파견하자 하리 싱의 지원 요청으로 인도가 무력 개입하면서 제1차 전쟁이 발발했다.



    양국은 1949년 유엔의 중재로 휴전하고 정전경계선도 획정했다. 카슈미르 북부인 아자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 남부인 잠무 카슈미르는 인도로 각각 편입됐다. 유엔은 카슈미르 편입 문제를 주민투표로 결정지을 것을 권고했으나 카슈미르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 인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지금까지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분쟁지역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인도와 파키스탄 간 영토분쟁에 중국이 끼어들었다. 62년 말 중국은 카슈미르 동쪽을 침공해 악사이친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이에 따라 카슈미르는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갈라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65년(2차)과 71년(3차)에도 전쟁을 벌였다. 특히 3차 전쟁 때는 인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치던 동파키스탄을 지원함으로써 양국은 철천지원수가 됐다. 이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바뀌었다. 카슈미르는 72년 심라협정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 통치로 결론이 났고, 이 협정의 정전경계선이 현 군사통제선이 됐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을 국제문제로 확대해 현상 타파하기를, 인도는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가 현상 유지되기를 각각 바라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은 1989년 이후부터 게릴라전으로 변질됐다. 인도령인 잠무 카슈미르에서는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분리주의 무장단체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이에 맞서 인도 정부는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는 일종의 ‘미니 전쟁’을 벌여왔다. 분리주의 무장단체들과 인도군의 전투로 지금까지 주민 등 7만여 명이 사망했다. 특히 양국은 그동안 카슈미르 분쟁으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대립해왔다. 양국은 98년을 기점으로 모두 핵실험에 성공해 핵보유국이 됨으로써 카슈미르 분쟁이 격화할 경우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카슈미르 분쟁이 한동안 잠잠하다 다시 격화한 이유는 인도 경찰이 7월 8일 분리주의 무장단체 히즈불 무자히딘(Hiz-bul Mujahideen·HM)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22)를 사살했기 때문이다. 와니는 카슈미르 무슬림 청년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와니는 10대 시절인 2010년 형이 집 근처를 순찰하던 인도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 히즈불 무자히딘에 가입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잘 활용하던 와니는 과감하게 마스크를 벗고 자기 얼굴을 공개하는 등 무슬림 청년들에게 자유를 위해 투쟁하자고 선동했다.



    중국·파키스탄 밀월관계

    와니의 장례식에 추모객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후 잠무 카슈미르에선 무슬림 청년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급기야 소요사태로 비화했다. 그러자 인도 경찰은 시위대의 눈을 겨냥해 공기총 산탄 130만 발 이상을 발사해 80여 명이 숨지고 1만여 명이 부상했다. 부상자 가운데 수백 명이 실명했다. 게다가 인도군은 9월 20일 카슈미르 지역 국경을 침투하려던 파키스탄 무장단체 대원 8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카슈미르 분쟁에 대해 강력한 대응 의지를 보이고 있다. 모디 총리는 8월 15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서 테러리즘을 조장한다”면서 “카슈미르는 인도 땅이므로 분리주의 세력의 준동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디 총리가 파키스탄에 대한 강경노선을 천명한 것은 아지트 도발 국가안보보좌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모디 총리의 외교·안보정책을 막후에서 좌지우지하는 도발 보좌관은 인도의 전설적인 스파이였다. ‘인도의 007’로 불리는 도발 보좌관은 정보기관에서 30여 년간 근무하면서 각종 공작활동을 직접 수행해왔다. 특히 파키스탄에서 7년간 스파이로 활동했다. 당시 완벽하게 무슬림 행세를 하고자 힌두교의 상징을 그려 넣은 몸의 흔적을 지우는 수술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카슈미르 분쟁에서 파키스탄에 맞서 ‘공세적 방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모디 총리가 강경 대응 전략을 내세우는 또 다른 이유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밀월관계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중국과 파키스탄은 지난해 ‘전천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중국은 파키스탄에 460억 달러(약 50조4390억 원) 규모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경제 회랑을 구축하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인도양에 접한 파키스탄 과다르항 운영권을 40년간 확보하게 됐다. 중국은 또 파키스탄에 잠수함 8척을 수출하기로 하는 등 군사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인도는 중국이 자국을 견제하고자 파키스탄의 도발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 현재로선 인도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놓고 전면전까지 벌일 개연성은 낮지만 국지전을 벌일 수는 있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라고 과거 인도 대륙을 통치한 무굴제국 제4대 황제 자한기르(1569~1627)가 말했지만, 지금 카슈미르는 자칫 지옥 같은 전쟁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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