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9

2003.08.28

안에서 치받고, 밖에서 조이고

지도부 허락 없이 잇단 과격시위 ‘내부갈등 고조’ … 언론 비난 쏟아지고 합법화 논의에도 악영향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3-08-21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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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에서 치받고, 밖에서 조이고

    8월15일 서울 종각역 사거리에서 열린 ‘8·15 민족대회 청년학생 대행진’에 참가한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11기 의장 정재욱(23·연세대 4년). 그는 ‘스타’다. 한총련 11년 역사에서 그만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인물은 없다. 8월15일 오후 정의장은 한총련 학생들과 함께 ‘8·15 민족대회 청년학생 대행진’에 참여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행사였건만 행진에 나선 정의장의 표정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요즘 고민이 많은 듯하다. 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한총련에게 ‘합법화’라는 선물을 ‘곧’ 줄 것 같았던 정부는 ‘도로’ 강경해졌고, 내부의 반대세력으로부터도 ‘우경화됐다’ ‘유약하다’는 비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한총련 의장에 당선된 것은 의외였다. 그가 등장 하기 전까지 한총련의 헤게모니는 그가 속해 있는 ‘혁신계열’이 아니라, 보다 강경한 반(反)외세 자주통일 투쟁 중심의 ‘자주계열’이 장악하고 있었다. 올해 한총련은 의장을 뽑는 행사인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심한 몸살을 앓았다. 정의장의 노선에 반대하는 자주계열이 대의원대회를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벌어진 일이다. 안방인 전남대로 대회 장소를 옮겨 그의 당선을 막겠다는 게 자주계열의 속내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상대후보보다 ‘겨우’ 14표를 더 얻었다. 간신히 의장에 당선됐지만 그에 대한 노골적인 비토는 그치지 않았다. 11기 한총련 출범식에선 ‘집단항명’ 사태까지 벌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뒷문으로 입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던 광주 5·18 기념식장 시위와 관련해 의장이 지나치게 유화적으로 사후 대처에 나섰다는 게 집단항명의 이유였다. 수령론에 따라 “의장님 오십니다”란 한마디에 나이 많은 대의원도 벌떡 일어나 ‘경의’를 표하던 한총련에서 집단항명 사태가 일어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출범식에선 ‘집단항명’ 사태까지 벌어져

    안에서 치받고, 밖에서 조이고

    8월15일 집회에서 한총련 소속 학생들은 ‘우리 민족끼리 6·15 공동선언 이행’ ‘주한미군 철수’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총련은 전국 180여개 대학의 총학생회 단과대학생회 동아리연합회 대표로 구성된 일종의 연합체다. 학생운동은 크게 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계열과 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계열로 나뉜다. 현재 학생운동의 주류는 한총련을 이끌고 있는 NL계열이다. 정의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학생운동에 반감을 가진 일반 학생들과 정치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민중민주(PD)계열 학생운동 조직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300만 한국 대학생의 연합을 만들려 한다”고 밝혔다.



    당선 초기 그는 언론의 인터뷰 공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한총련의 입장이 그때만큼 언론매체에 자주 소개된 적은 없다. 정부의 유화 제스처와 그의 당선으로 한총련이 변화할 것이란 기대가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총련 합법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노대통령이 합법화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다. 노대통령에 이어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합법화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한총련을 옭아왔던 이적단체라는 굴레가 곧 벗겨질 듯했다.

    그러나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정의장의 대중화 노선은 현재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우선 한총련은 5·18 광주 시위와 스트라이커 부대 관련 시위로 인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여론의 공격을 받고 있다. 정부의 공식입장도 연거푸 벌어진 과격시위 이후 강온파에 대한 선별 처리로 선회했다. 한총련 합법화에 가장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던 문수석마저도 한발 물러서, “그간 정부가 수배해제 등 성의를 다하며 변화를 유도해왔으나 한총련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자기혁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보수언론의 비판도 거세졌다. ‘조선일보’는 8월13일자 사설에서 “‘합법화’ 운운하기보다는 한총련의 과격시위를 배후 조정해온 세력들을 발본색원하는 게 옳은 일”이라며 한총련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총련에 우호적이던 매체들도 과격시위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적 견해를 나타냈다. ‘한겨레신문’은 “시위 방법이 무모하고 과격하면 시위 자체의 정당성뿐 아니라 주장의 정당성까지도 함께 잃고 만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정의장으로서는 연이어 터져나온 한총련의 과격시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억울할 법도 하다. 8월7일 15명의 한총련 학생들이 경기 포천군 미군기지 사격연습장을 기습점거한 사건은 ‘한총련 조직 내부의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일이다. 한총련 지도부가 기습시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참가 학생들이 사격장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한총련의 한 관계자는 “한총련 지도부가 ‘기습시위’에 대한 공식성명을 발표하는 데 사흘의 시간이 걸렸고, 11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았던 부분도 조직 내부의 갈등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털어놨다.

    대학생 설문조사에서 “한총련 의장 이름 모른다” 89%

    5·18 기념행사 관련 시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후문으로 입장하게 만든 해프닝은 정의장의 뜻과는 무관했다. 당시 시위는 남총련이 주도했는데, 한총련 중앙에서 시위 관련 보고를 요청했지만 묵살됐다고 한다. 광주·전남 지역 13개 총학생회로 구성된 남총련은 ‘자주계열’이다. 자주계열인 남총련과 대경총련(대구·경북) 경기동부총련 등은 혁신계열이 주장하는 국가보안법 철폐 없는 한총련 합법화는 무의미하다며 지도부가 추진하는 합법화 방안에 반대하고 있다.

    안에서 치받고, 밖에서 조이고
    합법화는 한총련이 일반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한총련의 뿌리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라는 전대협 진군가 가사처럼 사정당국의 탄압을 받으며 더 단단해졌다. 하지만 한총련은 달랐다. 1996년 연세대 점거 농성을 기점으로 한총련의 과격 노선은 학생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왔다. 지지를 못 받았다기보다는 철저히 외면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다. 총학생회장 선거는 과반수 투표 기준을 넘기기 위해 마감 시한이 연장되기 일쑤였고, 학생회가 없는 단과대가 속출하는 등 학생운동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주간동아’는 ‘한총련에 대한 대학생들의 인식도’를 알아보기 위해 8월14, 15일 양일간 전국의 대학생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표 참조) ‘한총련 조직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64%의 학생들이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갖는 일부 대학생들의 조직’이라고 답했고, ‘한총련이 대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라는 의견은 11%에 그쳤다. 또 ‘현재 한총련 의장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란 질문엔 89%가 ‘모른다’고 답했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정의장조차도 학생들에겐 ‘너무나도 먼’ 인물인 셈이다.

    정의장이 대중화에 방점을 찍은 것은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한총련의 이런 우울한 자화상과 무관치 않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된 것은 5기 한총련(의장 강위원)부터다. 대법원은 강위원씨에 대해 유죄를 확정하면서 한총련이 대남 적화통일 노선과 궤를 같이한다며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최근 대법관 인선과 관련해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한 최종영 대법원장이 당시 재판장이었다.

    정의장 이전에도 한총련은 이적단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 노력했다. 5기 한총련이 이적단체라는 규정되는 빌미가 됐던 ‘연방제 강령’은 2001년 삭제됐고, 강령의 ‘미국을 반대하고’란 문구도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부당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에 대한 지배와 간섭을 막아내고’로 바뀌었다. 쟁점은 ‘한총련이 실제로 변했느냐’와 ‘한총련 배후에 북한이 있느냐’에 모아진다.

    안에서 치받고, 밖에서 조이고

    ‘반전평화’를 외치는 한총련 촛불시위대의 물결이 8월15일 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다.

    일각에선 한총련의 연성화 움직임을 북한의 지령에 따라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한다. 한총련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의 5개 남측 본부 중 하나다. 따라서 범민련의 지시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받는다는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상당수가 주체사상을 공부한다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과거와 달리 학생들은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되물을 정도로 개방적이다. 다만 그들이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수령론이 나오게 된 배경까지 이해하는 쪽, 거부하는 쪽, 주체사상 전체를 거부하는 쪽으로 나뉜다고 한다.

    한총련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논거는 11기 한총련을 실제로 움직이는 세력은 배후의 ‘직업운동가’들이라는 것이다. 사정당국은 이들 강경파 배후세력이 한총련의 강경시위를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정의장의 성향이 유화적인 건 사실이지만 한총련은 여태까지 막후의 선배들이 움직여왔다”고 말했다.

    현 집행부보다 6~10세 정도 나이가 많은 1990년대 초반 학번들이 경찰이 지목한 배후세력이다. 한총련 내부에서 이들은 ‘비선’ 혹은 ‘주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들이 한총련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주장은 조금 과장돼 있다.

    한총련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대의원대회다. 1년에 한 번밖에 열리지 않는 대의원대회를 보완하기 위해 실무기구인 집행위원회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위원회 조직위원회 상임집행위원회 등을 두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한총련의 활동방향을 결정하는 상임집행위원회(이하 상집) 등 중앙 집행국 간부는 전년도 집행부에 의해 미리 임명된다. 이들이 바로 경찰이 지목한 ‘배후’다.

    ‘상집’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두고 한총련 내부에서도 ‘철밥통’ 운운하는 비판이 나온다. 이들의 실명을 아는 사람들은 한총련 대의원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다. 가명으로 활동하는 것은 사정당국에 수배돼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공개된 대의원들 역시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이 베일에 숨은 이유에 대해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한총련 내부에서 상집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직접적으로 나온 적도 있다.

    정의장이 혁신계열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상집’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는 11기가 출범하고 나서 ‘상집’을 새로 임명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 같은 주장이 대의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혁신계열의 리더로 옹립되고, 더 나아가 한총련의 ‘장(長)’이 될 수 있었다. 한총련의 서울조직인 서총련은 현재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인 박재익씨가 서총련 의장으로 당선되면 서총련 ‘상집’들이 모두 잘린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이 소문은 박씨가 의장이 된 뒤 사실로 드러났다. 박의장이 서총련 ‘상집’들을 ‘찍어내는’ 과정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총련의 사례에서 미뤄볼 수 있듯 배후로 지목된 ‘상집’이 운동방향에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의 정책을 결정하는 투표권은 대의원에게 있고 신임 의장이 ‘상집’을 몰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11기 한총련을 배후세력이 조종하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정의장이 배후세력에 의해 움직이는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것과 11기 한총련 출범 이후 한총련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부 강온파의 갈등과 언론과 여론의 공격, 학생들의 무관심, ‘상집’으로 상징되는 ‘배후’에 휘둘리고 있는 정의장이 이적단체의 굴레를 벗고, 떠나간 학생들을 다시 한총련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진짜’ 스타가 될 수 있을까. 그를 휘감은 먹구름은 현재로선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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