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4

2001.05.17

안방극장 점령한 역사소설의 거장 ‘월탄’

‘용의 눈물’ ‘여인천하’ 등 TV 사극으로 부활… 시대상 절묘한 반영, 소시민적 한계는 못 벗어

  • < 박광용/ 가톨릭대 교수·국사학 parkky44@nownuri.net >

    입력2005-01-26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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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극장 점령한 역사소설의 거장 ‘월탄’
    요즘은 TV 사극이 교과서 대신 역사교육을 한다. ‘태조 왕건’ ‘여인천하’ ‘홍국영’에 ‘명성황후’까지 가세하면 우리는 거의 밤마다 사극에 노출된다. 자연히 시청자들은 사극의 내용을 역사적 진실로 착각하곤 한다. 원작을 제공한 소설가의 상상력이 학자들이 애써 쌓아올린 역사적 진실을 대체해 버린 경우다. ‘용의 눈물’이 그랬고, ‘허준’이 그랬으며, ‘여인천하’가 그랬다. 올해는 한국 역사소설의 대가인 월탄 박종화 선생(1901~1981)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서거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월탄은 갔지만 그가 43년 전 쓴 ‘여인천하’가 우리의 안방을 점령한 지금, 역사소설의 거인 월탄이 남긴 유산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소설 평가는 이렇게

    월탄 선생은 1979년 ‘박종화대표작전집’ 서문에서 자신이 역사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나날이 스러져 가는 아름다운 이 조국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자는 슬프고 외롭던 의도” 때문이라 했다. 역사소설 형태를 빌려 이 땅, 이 조국을 아름답게 건축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이란 신변잡사, 음풍농월을 소재로 창작하는 오늘날 우리 문학의 전통과 달리, 과거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사를 소재로 창작하는 문학이며, 사회 참여의 한 방식이라 주장했다. 근대문학의 본질을 생각할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소설이란 문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편의상의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나아가 “역사 자체도 시대에 따라 사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문학도 문학 나름의 관점이 있으며, 이는 작가만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 ‘역사소설의 과제’ 운운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소설의 과제’가 없을 수 없고, 역사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이 없을 수는 없다. 역사학자로서 먼저 다음 4가지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원래 사실이나 사료를 엉뚱하게 착각하거나 고의로 왜곡한 경우가 없어야 한다. 단순 흥미 위주의 서술, 반짝이는 아이디어 자랑, 돈벌이, 선호하는 정치인 스타일 부각 등등의 사적 이유로 역사소설을 썼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역사소설을 야담, 설화, 궁중비화 등 숨겨진 이야깃거리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도 이에 포함된다.



    둘째, 문학적 진실과 실제 역사적 진실이 충돌하여, 진실을 파악하는 데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은 당대인의 가치관, 행동양식, 시대 분위기들이 사실이어야 그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사실을 말해주는 사료뿐만 아니라, 이를 설명하는 다양한 관점까지 수집, 창작해야 문학적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셋째,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진실이라기보다 오늘날 작가만의 진실인 경우는 없어야 한다. 작가의 시대적 한계성 중에서 가장 문제되는 부분은 ‘상식’이라든지 ‘통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오늘날 사회공동체의 상징조작을 역사적 사실에 투영하는 사례다. 이 경우는 자기 반성을 통해 새로운 역사 창조에 이르게 하는 역사소설이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넷째, 다른 민족국가의 역사적 진실을 우리의 진실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우리 역사소설은 한국 사람과 한국 사회공동체를 말해야 한다. 인간이나 공동체보다 운명적 역사의 신을 믿는다고 하여 ‘세계 국가로서의 운명을 지닌 일본’의 이미지를 세운 시바 료타로 같은 통속역사소설가의 사관을 빌려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는 사례 같은 경우는 정말 곤란하다.

    ‘과거 사실에 대한 인식’이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기초다. 잘못된 이미지에 대한 투쟁이 현실에 대한 문학의 투쟁이며, 창조적 노력이라는 것은 문학의 기초다. 역사소설은 역사이면서 동시에 문학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은 두 가지 기초를 모두 제대로 뒷받침하였는가의 여부가 그 품질을 결정한다. 여기서는 이런 기준으로 월탄과 그의 역사소설들을 살펴보았다.

    안방극장 점령한 역사소설의 거장 ‘월탄’
    월탄이 1979년에 쓴 자서전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를 보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을 꺾다 보니 문득 남산이 다가왔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시를 애송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전통적인 사대부의 길, 사대부의 멋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으로 월탄 집안이 바로 명문사족의 맥을 잇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쨌든 월탄은 우리 세시풍속과 의관문물 같은 전통문화의 멋과 풍류를 잘 아는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일제 치하의 저항운동 분위기에서 자라, 최남선이 주축이 된 조선 문화 보존운동의 성과를 제대로 이어받았다. 선생의 소설에서 전통용어 및 대화처리 부분에 감탄하기도 하고 관청, 직위, 신분, 제도에 관한 내용들, 건축, 각종 일상용품, 의-식-주 생활에 관한 내용들, 한방, 탈 것, 무기류 등 내용의 풍부함을 칭찬한 논문도 있다.

    그럼에도 최남선류의 잡화상식 보존 노력은 단아한 한국인의 조선적 멋과 생활을 즐기는 풍류가형 지식인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시대를 변화시키는 지사형 지식인을 만들지는 못했다. 최남선이 결국 친일-변절의 길을 간 것도 그런 탓이다. 최남선에게 많은 것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월탄도 마찬가지였다. 월탄이 젊었을 때를 회고하며 쓴 부분을 읽어보면, 일제 치하에서 이광수의 친일-변절 비판, 민족문학 주창, 민중의 고통을 그대로 묘사한 신경향파 문학 및 카프 문학의 긍정 같은 지사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긍정뿐 직접 행동했다는 설명은 없다. 월탄은 결국 소시민적 지사(志士)에 머물렀던 것이다.

    ‘양녕대군’과 ‘여인천하’

    안방극장 점령한 역사소설의 거장 ‘월탄’
    월탄의 역사소설은 ‘용의 눈물’ ‘여인천하’ ‘연산군’과 같은 TV 사극 또는 영화의 기본 대본으로 이용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앞의 생애 부분과 연결해 그의 작품을 분석하면 적지 않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용의 눈물’의 원작인 ‘양녕대군’과 ‘세종대왕’은 머리말에서 국가 지도자의 인간형을 탐구해 보기 위해서 썼다고 밝혔다. 그 결과 “부정적 인간형과 긍정적 인간형인 두 인간형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로서 부정적 인간형 양녕대군과 긍정적 인간형 세종대왕(충녕대군). 그러나 “부정이건 긍정이건 자기 태도를 뚜렷하게 정립”하고 사는 인간이라고 하였으므로, 국가 지도자 관점보다는 성리학적 인간형 관점에서 말해야 제대로 맞는다. 슬픔이라는 부정적 세계관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간 인간형과, 기쁨이라는 긍정적 세계관 속에서의 인간형, 곧 공자님이 말씀하신 가운데 길인 중용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두 가지 인간의 길, “슬퍼하되 비참해서는 안 되고, 즐거워하되 방탕해서는 안 된다”(哀而不喪 樂而不淫)는 삶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사실 태종은 태조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식 성리학자로 키운 인간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무사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아들인 양녕대군은 오히려 태종 자신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에 내침을 당한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부평 들에서 매사냥하는 식으로 태종 같은 흉내를 낸 것이 미움을 받은 원인 중의 하나였다. 태종에게는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정착시키고 싶은 이상이 있었다. 비록 자신은 큰 성리학자 정몽주와 정도전을 죽이고 스승 이색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을지언정….

    이러한 새로운 성리학적 인간형의 희구라는 역사적 소망을 명확하게 적시하지 않고, 그저 오늘날 인간형과 이어지는 전통적 인간형을 제시한다는 수준의 역사소설과, 이를 이용한 TV 사극의 더 통속적인 재해석이 악순환되었을 뿐이다. 월탄은 ‘장희빈’ 서문에 쓴 대로 “한국의 소설은…소시민의 신변잡사가 아니면 천박한 애련묘사로만 일관되어 온 것”을 넘어서기 위해 역사소설을 썼지만, 현실은 시나리오 작가 등에 의해 오히려 천박하고 소시민적인 방향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를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여인천하’는 ‘세종대왕’ 같은 대하역사소설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비참한 기분을 들게 한다. 특히 조선시대 중요사료를 수집해 놓은 책인 ‘연려실기술’은 윤원형과 난정의 정말로 ‘소인’ 다운 최후를 가장 잘 묘사해 놓았다. 18세기 성리학적 입장의 사실 이해가 오늘날 역사소설에서 그대로 되풀이되는 모습은, 진정한 창조를 바라는 역사가들을 슬프게 한다.

    ‘여인천하’의 시대인 16세기 중반은 불교사상이 국가정치와 전통사회를 움직이는 마지막을 장식하던 때였다.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불교적 인생관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인생관에 저항하며, 마지막 꽃을 피운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사회는 성리학 사회로 급격하게 저울추가 기울었다.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인간상과 그들의 사상에 대한 성찰 없는 역사소설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일제 치하에서 이미 홍명희가 ‘임꺽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대 분위기를 정확하게 따라가면서 쓰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안방극장 점령한 역사소설의 거장 ‘월탄’
    그래도 월탄은 “역사소설은 신변잡기를 벗어나서 사회 참여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라는 말이 부메랑임을 알면서도 강조했다는 점에서 존경스럽다. 월탄의 역사소설들은 원래 사실이나 사료를 지나치게 착각하거나 고의로 왜곡한 경우가 많지 않고, 다른 민족국가의 역사적 진실을 우리 역사적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지는 않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문화를 지키겠다는 시대적 운동을 잘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진실과 실제 역사적 진실이 달라 진실을 파악하는 데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는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 또 국가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소시민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결과, 진정한 역사적 진실보다는 오늘날 작가만의 진실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더욱이 월탄의 역사소설은 TV 사극으로 꾸미는 과정에서 과거 역사 중 ‘권력’ 장악 과정이나 눈요깃거리의 궁중비사, 노변정담들만 강조하였다. 반면 사회적 영향력, 가치 지향, 공동문제 지향, 공존 지향이라는 또 다른 역사의 본 모습은 많이 가려졌다. 이는 취사선택해서 이용한 방송작가 및 프로듀서들의 책임이 크지만, 일부는 지도자 중심의 ‘인간성’ 묘사에 ‘애련’ 묘사를 가미한 형식을 많이 쓴 월탄 선생의 서술방식 탓이기도 하다.

    아직 월탄을 능가할 작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역사소설가의 수준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고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역사를 관통하는 안목, 변화하는 역사의 요체를 파악하는 안목을 갖추고, 소시민적 역사적 진실의 수준을 넘어서는 ‘고전’을 만들어야 한다. ‘일리아드’ ‘햄릿’ ‘쿠오 바디스’ ‘전쟁과 평화’ ‘장미의 이름’ 수준의 우리 역사소설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요구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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