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3

2001.03.01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순수예술 공연은 밑지는 장사 일쑤 … ‘예술이냐 돈이냐’ 갈림길에 선 신세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입력2005-02-14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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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달력을 꽉 채우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피아니스트 피터 야블론스키(3월17일) 예핌 브론프만(6월8일)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3월11일) △첼리스트 장한나(8월)와 요요 마(12월) △소프라노 갈리나 고르차코바(3월3일) 흑인 디바 제시 노먼(4월28일)과 바버라 헨드릭스(5월22일) 도밍고, 파바로티, 카레라스의 ‘테너 빅 3’ 콘서트(6월22일)….

    하지만 이들이 한국 무대에 서기까지 숨은 주역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국립극장, LG아트센터와 같은 주요 공연장의 기획담당자나 방송과 일간지 소속 문화사업팀 외에도 이를 위해 뛰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예술기획 박희정, 미추홀예술진흥회 전경화, 한국무지카 송희영, 크레디아 정재옥, 빈체로 이창주, 파코스 박교식, 폴리미디어 이선철, 애버뉴 박인숙씨처럼 홀로 뛰는 전문기획자들이다.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 박희정 서울예술기획 대표. 공연기획 1세대로 올해 서울예술기획 설립 15주년을 맞아 긴 슬럼프 끝에 재기를 준비중이다.사무실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고비마다 서종환 전국무총리 정무수석비서관의 후원과 격려가 큰 버팀이 됐다고.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 이선철 폴리미디어 대표(왼쪽)와 김서룡 폴리미디어시어터 극장장. 폴리미디어는 공연 기획사로 출발해 음반, 인터넷, 매니지먼트, 오디오 프로덕션 등으로 다각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런던 시티대학 대학원에서 예술행정과 경영을 공부해 해외마케팅 노하우가 풍부한 것이 장점이다.

    이들은 이미 2∼3년 전에 해외 아티스트와 계약을 하고 공연장 대관, 프로그램 선정, 보도자료 작성, 아티스트 국내 영접 및 인터뷰, 공연 후 리셉션까지 도맡아 한다. 타이틀은 공연기획자지만 실제 기획부터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마케팅, 홍보가 모두 이들 손을 거친다. 그래서 흔히 공연기획을 21세기 문화산업의 꽃이라 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달리 클래식 전문 공연기획사들은 ‘헤엄치는 백조’처럼 치열하게 생존을 위한 투쟁중이다.

    “인구 10만명도 안 되는 유럽 소도시에서 웬만한 공연들이 1년 전에 매진되는데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서울에서 1년 내내 공연을 즐기는 사람은 5만명도 안 됩니다. 순수예술공연이 수익을 내기에는 기본적으로 시장이 너무 작아요.”(서울예술기획 박희정)

    “한국에서 공연은 ‘공공재’적 성격이 강해요. 돈 내고 보는 게 아니라 공짜로 ‘구경’한다는 개념이니까요. 그러니 초대권이 남발되고 유료 관객은 적을 수밖에요.”(폴리미디어 이선철)

    부진한 티켓 판매에 IMF 이후 말라붙은 기업 후원금, 여기에다 늘 지적되는 문제지만 외국 연주자의 내한공연 때 부가되는 원천징수세…. 이는 연주료뿐만 아니라 항공료와 체제비에까지 부가된다. 물론 연주자가 내는 것이 원칙이나 국내 관행상 기획사가 대납한다. 게다가 문예진흥기금, 부가가치세, 예매 수수료까지 합치면 매출의 40% 가량이 세금 등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기획자들은 불만이다. 객석이 꽉 찬 공연이라도 연주료와 대관료 내기에 빠듯하다는 것이다.

    최근 해외 유명 아티스트 초청에 가장 적극적인 크레디아의 정재옥 사장(40)은 “기획자들끼리 만나면 입버릇처럼 라면집 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티켓 팔아서는 도저히 사무실 운영이 안 되니까 자꾸 다른 장르를 곁눈질하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크레디아는 21세기 세계 바이올린계를 이끌 주역으로 꼽히는 막심 벤게로프 독주회, 바로크 첼로의 피터 비스펠베이나 플루티스트 에마뉘엘 파후드 독주회 등 클래식 애호가들을 사로잡는 초청공연을 잇따라 기획했지만, 사실 1년 동안 크레디아를 먹여 살린 것은 2회 모두 매진사례를 기록한 척 맨지오니의 재즈 공연이었다. 올해도 크레디아는 유키 구라모토, 앙드레 가뇽, 카시오페아, 척 맨지오니 등 재즈와 뉴에이지 연주를 준비하고 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마련해 놓겠다는 것이다.

    서울예술기획의 박희정 사장(52)은 공연기획 1세대로 자타가 인정하는 공연계 터줏대감.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때부터 8년간 대관 업무를 맡았고, 86년 서울예술기획을 설립하면서 클래식계에도 독립 기획사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서울예술기획은 성대한 자축 파티 대신 대대적인 체제정비에 들어갔다. IMF 이후 공연계에 몰아닥친 한파와 무리한 확장, 몇 차례 공연 실패 등이 겹쳐 불가피하게 15주년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시기가 된 것이다. 특히 2년 전 소프라노 홍혜경 독창회 취소사건은 서울예술기획에는 직격탄이었다. 급성후두염 진단을 받은 홍혜경씨가 공연 하루 전 연주회를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버린 것. 그간 지출된 홍보비 외에도 모처럼 매진된 표의 환불소동과 지방공연 취소에 따른 변상 등으로 서울예술기획은 한순간에 2500만원을 날려버렸다.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정재옥 크레디아 대표. 일간지 문화사업국에서 시작해 94년 독립했다. 최근 ”손꼽히는 공연은 모두 크레디아에서 한다” 는 말이 나올 만큼 해외유명아티스트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회원관리가 철저해 어려운 여건에도 ‘클럽 발코니‘ 라는 뉴스레터를 발간하고 있다.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이창주 빈체로 대표.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첼로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원진 게 결국 여기까지 왔다. 돈 바는 게 목적이었다면 독일에서 하던 스포츠 마케팅을 계속했지 절대로 클래식 공연기획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빌스마나 루시에 같은 대가들을 초청하면서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한다.

    이후 박사장은 순수 클래식 음악공연 대신 엔터테인먼트를 가미한 종합예술공연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러시아 아이스발레와 비언어 퍼포먼스 ‘리체데이’ 공연이 대표적인 사례. 박사장은 “앞으로 소수 애호가를 위한 공연보다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획을 하겠다는 전략”이라고 말한다.

    월간 ‘클래식’의 발행인이기도 한 빈체로의 이창주 사장(47)은 요즘 ‘닷컴’ 기업 구상에 분주하다.

    “공연기획을 한 지 6년째지만 공연을 치를 때마다 모래짐을 지고 가는 기분입니다. 차라리 다른 일로 돈을 벌고 순수예술 공연은 서비스하는 셈치자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 클래식 트리 닷컴이에요.”

    이창주 사장은 바로크합주단 리더인 김민씨와 함께 ㈜에듀클래식을 설립하고 음악애호가들의 커뮤니티인 ‘클래식 트리 닷컴’을 준비중이다. 이를 통해 의사 변호사 건축가 등 전문애호가 그룹을 겨냥한 맞춤음악 서비스를 하고, 막 음악에 입문한 유아-어린이들을 위해 실기평가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폴리미디어 이선철 사장(34)은 공연계에서 가장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젊은 일꾼으로 알려졌다. 20대를 김덕수 사물놀이와 함께 보낸 그는, 96년 난장커뮤니케이션즈(지난해 폴리미디어로 바꿈)라는 프로덕션을 차려 국악의 해외 공연을 기획하고 자우림과 국악 앙상블 ‘사계’ 발굴, 이승환 전국순회공연, 호세 카레라스 국내 공연 유치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99년 처음으로 공연기획 분야에 ‘펀딩’ 개념을 도입해 17억8000만원을 유치하기도 했다.

    “10년 넘게 이 바닥에 있으면서 티켓 팔아 이익 내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배웠죠. IT분야만 벤처냐, 우리도 문화벤처니까 펀딩을 해보자고 한 게 예상 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 자금으로 공연장을 인수해 폴리미디어가 갖고 있는 다양한 역량을 실험하는 무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박인숙씨(30)가 대표로 있는 애버뉴는 명품 브랜드 전문 홍보회사다. 그는 95년 문화일보홀 개관 멤버. 그런 그가 엉뚱하게도 명품 홍보회사를 시작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공연 때마다 기업에 구걸하듯 후원금을 얻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봐요. 대신 기업이 마케팅 대상으로 삼는 소비자를 공연장으로 끌어들이고 기업은 콘서트를 통해 간접적인 마케팅을 하는 믹스 앤 매치(Mix and Match) 기법을 활용해 보자는 거죠.”

    첫 결과가 지난해 5월 안트리오의 환경콘서트였다. 안트리오가 낸 앨범이 ‘언플러그드’, 즉 앰프를 쓰지 않는 자연음악이라는 데 착안해 이들을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강조하는 한 화장품 브랜드와 접목시켰다. 기업은 광고료 대신 연주회 비용을 댔고, 초대권은 매장을 통해 고객들에게 배포됐다.

    “지금까지 클래식 공연계에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부족했어요. 외국 연주자가 무리하게 개런티를 요구해도 깎기는커녕 한국 기획자들끼리 경쟁이 붙어 가격을 올려놓기나 하고. 수익이 안 남으니까 티켓 값 올리는 데만 급급했죠. 그러니 관객은 공연을 더욱 외면하게 되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으로 클래식 공연예술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조만간 기획사들 다 문을 닫게 될 겁니다.”(박인숙)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전경화 미추홀예술진흥회 대표. 서울예술기획과 나란히 올해 15주년을 맞이한 공연계의 여걸이다. 그동안 국내 연주자들의 지방순회 공연으로 탄탄하게 기획력을 쌓았으나 올해 초 사무실을 확장하고 보다 활발한 공연기획을 준비중이다.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 “아, 고달퍼라”
    ◀박인숙 애버뉴 대표. 아직 공연기획사라는 말이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문화일보홀 운영 경험과 기업홍보를 통해 얻은 마케팅 노하우를 접목해 새로운 공연기획 노하우를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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