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3

2001.03.01

푸틴 인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러 국민 76% “직무수행 만족”… 국제외교무대 영향력 회복·경제성장 덕에 첫해 성적 ‘A+’

  • < 김기현/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5-02-14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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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틴 인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요사이 모스크바에서 유행하는 우스갯소리 하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뒤 시내 교통이 부쩍 혼잡해졌다고 한다. 오랜만에 경제가 살아나면서 자동차가 크게 늘어난 것이 원인.

    그러나 시민들은 푸틴 탓(?)으로 돌린다. 러시아에서 대통령 등 고위관료가 탄 차량이 지나갈 때는 교통을 통제 한다. 경호 때문이다. 저격수들도 시속 140km 이상으로 달리는 표적은 제대로 맞추기 힘들다. 그래서 도로를 막고 이 속도 이상으로 달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은 시내의 아파트에 살면서 크렘린궁으로 출퇴근한다. 자연히 이 시간에는 인근 도로가 차단돼 교통 체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당시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병약한 옐친은 늘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근교의 다차(별장)에 머물러, 시내로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틴은 꼬박꼬박 크렘린궁으로 출근한다. 게다가 현장을 챙기는 업무 스타일 때문에 늘 어디론가 바삐 움직인다. 따라서 운전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통스런 교통통제를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스갯소리에서는 푸틴에 대한 불만보다는 젊고 정력적인 지도자에 대한 만족감이 느껴진다.

    푸틴은 지난해 5월 취임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까지 합치면 집권 14개월째에 접어든다. 그러나 폭발적인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여론조사 기관 VCIOM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러시아 국민의 76%가 푸틴의 직무수행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말 68%보다 인기가 더 올라갔다.



    러시아 국민은 변덕스럽다. 전임자인 옐친도 집권 초에는 ‘민주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으나 퇴임 전에는 지지도가 ‘한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로 역사를 바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인색하기 짝이 없다. 푸틴이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몰락한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지 관심거리다.

    일단 푸틴의 집권 첫해 성적표는 화려하다. 특히 그동안 미국 주도의 국제 외교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됐던 러시아가 오랜만에 어깨를 폈다. 옐친이 건강문제나 술에 취해 벌인 해프닝 따위로 겨우 주목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푸틴은 ‘뉴스 메이커’였다. 평양을 전격 방문한 뒤 북한의 미사일개발 포기 의사를 전해 전세계가 그의 입만 바라보게 만들었다. 신유고의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사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최근의 중동사태에도 적극 개입하고 있다. 스키장 맥주집 오페라극장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정력적이고 파격적인 정상외교도 항상 화제에 올랐다.

    지난해 경제가 7% 성장해 소련 붕괴 후 최고의 상승세를 보인 것도 그가 국내에서 권력기반을 완전히 굳히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여전히 험난하다”는 평가도 엇갈린다. 경제만 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극단적 평가도 있다. 최대의 수출품인 석유의 국제가격이 급등하고 98년 외환위기로 루블(貨)화가 폭락해 러시아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진 덕분이라는 것이다. ‘병든 대국’ 러시아를 하루아침에 치유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푸틴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는 지도자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 비결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더구나 푸틴은 옐친에 의해 갑작스레 후계자로 발탁된 과정이나 악명 높은 구소련 비밀경찰 출신이라는 전력 때문에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라는 평을 얻는 등 등장할 때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꼬리표처럼 달고 있어야 했다.

    음산한 첩보원 이미지,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블랙박스’라는 별명, 과묵하고 무표정하다고 해서 얻은 ‘터미네이터’라는 별명, 유도 검은 띠(유단자)로서 격투기에 심취한 ‘무대포’. 그러나 푸틴은 집권 초의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하나 둘씩 벗겨나가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잘 짜인 이미지메이킹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편견 뒤에 감춰져 있던 푸틴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푸틴은 사실 명문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나온 수재에 경제학 박사 출신. 모스크바대 법학부를 나온 고르바초프를 빼고는 역대 러시아 지도자 중 가장 학력이 좋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실력 하나로 크렘린궁의 주인이 된 남다른 의지와 15년 동안 비밀정보기관 KGB에서 근무하며 익힌 치밀한 일솜씨도 범상치 않다. 호탕하고 술 잘 마시는 것을 제일로 치는 러시아 무지크(남자)의 곰 같은 이미지와 달리 보드카도 멀리하고 ‘일 중독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일 욕심도 많다. KGB 요원으로 5년 동안 독일에서 근무해 러시아 지도자답지 않게 국제감각과 외국어 실력도 갖췄다.

    무엇보다도 푸틴의 가장 큰 매력은 젊고 활동적이라는 것이다. 북해함대를 방문해 핵잠수함에서 자고 전투기를 타고 전투가 한창인 체첸을 방문한 것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푸틴만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개인적 인기에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푸틴의 정치력을 시험할 난제가 국내외에 쌓여 있다. 새로 등장한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와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 등을 둘러싸고 벅찬 싸움을 벌여야 한다. 또 국내에서도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릅쓰고 모든 분야에 걸쳐 ‘사활을 건’ 개혁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그런 점에서 올 한해는 ‘푸틴의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비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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