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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간 의성 김씨만 살아온 ‘안동 둔번마을’

고려 말부터 獨姓 전통 유지… 他姓 들어와도 잠시뿐, 주민들은 “地氣 탓”

700년간 의성 김씨만 살아온 ‘안동 둔번마을’

700년간 의성 김씨만 살아온 ‘안동 둔번마을’
경북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둔번마을. 입춘을 지난 따사로운 햇볕이 의성 김씨 천년 종택(宗宅)의 금사오죽(金絲烏竹)을 희롱하며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구르는 돌 한 조각에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겨울 한촌의 적막함은 700년 세파에도 깨어지지 않은 견고한 ‘비밀’을 간직한 마을을 휩싸고 돈다.

고려 말 세상을 등지고 이곳으로 은둔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의성 김씨 평장사공(平章事公) 김춘(椿)의 증손 김을방(乙邦)과 그의 식솔들이 바로 그들. 김을방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 벼슬이 교찬에 이른 학자였지만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어지러운 정국을 견디지 못하고 이곳에 내려와 마을 이름과 자신의 아호조차 ‘둔번’(遁煩)이라 칭했다.

‘번거로움을 피해 운둔한다’는 마을 이름 때문일까. 두 왕조를 섬길 수 없어 개성에서 경북 안동의 두메산골로 찾아든 고려 말기의 학자 집안은 그 후 500년 조선왕조와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단 한 번도 타성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둔번마을은 700여년을 이어온 이 시대 마지막 독성(獨姓)부락으로 사라지는 씨족문화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다.

불과 20여년 전인 80년대만 해도 20여호가 넘게 둔번공의 후손이 남아 있던 이 마을은 현재 종손을 포함한 친족 8호만이 남아 있다. 지금도 타성은 단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700년 된 종택 둔번초당(遁煩草堂)과 재실 영사제(永思濟)를 중심으로 의성김씨 둔번공의 후손 30여명만이 올망졸망 살고 있는 것.

“집안 내의 하인들도 솔거 노비로 집 밖으로 내어놓으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들어오거나 도망갔고, 타성들이 들어와도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나가버리니 어쩌겠습니까.” 70여년을 이 마을에 살아온 둔번공 23세손 김창동씨(70)는 둔번마을이 그 오랜 세월 독성마을을 유지해 온 것이 씨족사회의 배타성 때문이란 학계의 지적에 강하게 반발한다.



700년간 의성 김씨만 살아온 ‘안동 둔번마을’
녹전면의 호적계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둔번마을이 700년을 이어오며 독성마을을 유지해 온 이유를 지형적 조건과 양반 종택문화의 보수성에서 찾고 있었다. 즉, 둔번마을은 요성산과 국망봉과 같은 높은 산 아래 감추어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적고, 학문에만 전념한 둔번공 후손의 깐깐함이 타성들에게 마을 문화에 융화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더욱이 산을 포함한 인근 전답이 모두 종가와 김씨 문중의 땅인 관계로 실제로 농사를 지으려면 김씨 문중의 하인이 되거나 소작농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벼슬하는 사람이 없어 녹봉을 받는 이가 없으니 소작농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니껴.” 둔번공 25세 종손 김태협씨(77)는 소작농이 견디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타성이 살지 못한 것은 둔번공 당시에도 그러했다며 선조의 둔번마을 입향에 얽힌 전설 한 토막을 풀어놨다.

“둔번공 할배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평해 황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김씨 종택이 들어서고 난 뒤부터 시름시름 앓아 누워 더 이상 못 배기고 다 나갔다 카지 아이니껴.” 종손 김씨는 그 이후에도 타성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하면 가정에 병마와 우환이 끊이지 않아 마을을 떠나곤 했다며 둔번마을의 지기(地氣)가 타성을 거부한다고 믿고 있다.

안동대학교 사학과 김희곤 교수는 “안동지역은 산이 많은 지형적 영향과 벼슬보다는 학문을 중요시한 풍토 때문에 중소지주가 많았고, 이는 소작농이나 자작농이 생겨날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독성부락 형성 배경을 분석했다.

문중에서도 둔번마을이 이처럼 독성부락을 유지하며 살아온 데는 출향 인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에서 내린 벼슬과 시호(諡號)는 쓰지 말라는 둔번공의 유명(遺命)에 따라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거의 대부분 선조들이 거부(不就)했기 때문.

김을방의 아들 김축(軸)을 비롯, 증손 완(琬), 고손 영균(永鈞), 8세손 약( ), 13세손 만휴(萬烋) 등…. 그 아랫대에 이르기까지 문필이 이미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모두 천거된 벼슬을 뿌리치고 둔번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냈다는 것.

안동향교 전교를 지낸 김춘대씨(80)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룬 안동이지만 이 지방의 유림들 가운데서도 둔번의 문필이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데 이설(異說)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윗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현 종손의 조부인 동식(東植)씨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서예대전에서 특선을 하는 등 ‘조선명필’로 유명했고, 종손의 동생 태균(泰均, 석계)씨는 서예 국전심사위원을 거쳤을 정도다. 심지어 종손의 손자인 재일(渽一)군은 전국서예대전 초등학교부문에서 장원을 할 정도이니 이 집안의 글씨는 타고났다 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

700년간 의성 김씨만 살아온 ‘안동 둔번마을’
이 마을에 사는 종손의 동생 김태진씨(66)는 이 모두를 풍수지리학적인 측면에서 풀이한다. 둔번마을 입향조인 을방공이 이곳에 종택 위치를 잡을 때 이미 외지인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은자(隱者)가 숨어 살 만한 명당을 골랐다는 것.

평장사공파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둔번공이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마을산인 요성산 서쪽 골짜기에 집 지을 터 세 곳이 보이는데 가장 위쪽 상대(上臺)는 벼슬을 할 집터이나 가난하고, 가장 아래 하대(下臺)는 부자가 될 집터이지만 벼슬이 없으며, 중앙의 중대(中臺)는 자손이 번창하고 문필(文筆)이 끊이지 않을 자리였다 한다. 둔번공이 부귀와 벼슬을 버리고 현재의 종택이 위치한 중대를 선택함으로써 타성들의 범접이 없고 문필이 대대손손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어느 명문 집안을 가 보십시오. 25대를 내려오며 종자종손(宗子宗孫)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17문파를 배출한 집안이 몇이나 되는지….” 김씨는 둔번공 이후 친조카 양자 한 번을 제외하곤 종손 가계의 순수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을방공이 자손이 번창할 자리에 종택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둔번공 김을방의 둔번마을 입향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내려온다. 둔번공이 이 마을에 입향하기 이전 인근 마을인 안동시 도산면 온계리(옛 온혜리)에 머물렀는데, 그는 그곳을 보고 ‘혈식군자’(血食君子)가 날 명당임을 일견에 간파했다. 풍수는 기가 막히나 김씨 성의 집터가 아님을 알아차렸지만, 욕심을 버리지 못한 그는 떠나고 돌아가기를 되풀이하다 대낮에 호랑이가 여자 종을 물고 달아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그곳을 떠났다는 것. 둔번공은 온계리를 떠나 서북쪽으로 향하다 국망봉 자락의 한 고개에서 요명산 쪽을 보니 둔번마을이 보였고 바로 거기에 종택 자리를 잡았다 한다. 을방공이 종택 자리를 보았다는 고개는 아직도 지도에 보고개(볼고개)로 남아 있고, 그가 명당임을 알고도 떠나온 집터에는 이후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을 배출한 진성 이씨의 선조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창동씨는 이런 일화를 들려주며 “아직도 진성 이씨 문중에서는 퇴계의 집터를 듬버리(둔번) 집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전했다.

“22세손으로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김창근 의원, 김진기 의원, 김진영 서장….” 종손 김태협씨는 그래도 현재는 둔번공의 후손 중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들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하지만 25대 종자종손을 이어오며 700년 독성부락의 전통을 지켜낸 천년종택은 이제 ‘신화’로만 간직될 위기에 처해 있다. 둔번마을에 남아 있는 후손들은 모두 고령의 노인들뿐, 아랫대 종손을 비롯한 후손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 둔번마을에는 병든 종손의 헛기침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낙엽(落葉)은 귀근(歸根)이라” 나이가 들어 지치고 힘들면 모두가 고향으로 되돌아오리라는 종손의 ‘희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주간동아 2001.03.01 273호 (p52~53)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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