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3

2001.03.01

일처리 빈틈없는 ‘글로벌 경영인’

영·미·일 거치며 국제적 경영 감각 키워…신격호 회장 후계자설 모락모락

  •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5-02-14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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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처리 빈틈없는 ‘글로벌 경영인’
    롯데그룹의 사실상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45)은 무척 쑥스러움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롯데호텔 38층의 회원 전용 레스토랑인 메트로폴리탄 클럽은 신부회장에게는 ‘안방’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지난 17일, 인터뷰를 위해 여기서 처음 마주친 신부회장은 마치 다른 사람이 주최한 파티에 초청받아 온 사람처럼 보였다. 웨이터에게 음식을 주문하거나 임원들에게 업무 관련 사항을 질문할 때도 그는 꼬박꼬박 존대말을 썼고 명함을 내밀 때도 반드시 두 손을 사용했다. 기자의 질문에도 대부분 단답형 답변으로 일관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한국말이 다소 서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마디 대화가 오고간 뒤였다. 그러나 신동빈 부회장의 이력서를 살펴보면 오히려 지금 그의 한국어 수준은 대단히 유창하며 남다른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신부회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났고 아오야마(靑山)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을 마친 뒤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MBA 과정을 마쳤고 곧바로 노무라증권에 입사해 런던지점에서 6년을 근무했다.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국내에서 경영수업을 쌓기 시작한 것이 35세 무렵이니까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거주 경험은 전무했던 셈이다.

    섣부른 업종 진출 없이 레저·유통에 집중

    일처리 빈틈없는 ‘글로벌 경영인’
    말하자면 신동빈 부회장이야말로 4개국을 두루 거친 ‘글로벌 경영인’의 전형인 셈인데 이러한 그의 다양한 경험을 서투른 한국어로 전해듣는 것은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언뜻 일본어나 영어로 인터뷰가 이뤄졌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보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국적이 한국인 만큼 한국의 기업환경과 한국의 소비자들에 대해 한국어로 설명하는 것을 즐겨하는 것 같았다.

    신동빈 부회장의 가족관계에서도 그의 이러한 욕심은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지만 런던 근무 시절 낳은 첫 아들은 아직 한국과 일본, 그리고 영국의 3개 국적을 소지하고 있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들이 성인이 될 때는 국적을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데 그는 “아내를 설득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신동빈 부회장이 신격호 회장의 뒤를 이을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세간의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롯데호텔 농성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성희롱 사건 이후인 지난해 10월, 그룹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전사적인 윤리경영을 선포하면서부터다. 이 당시 신부회장은 그룹 내의 윤리경영을 총괄하는 윤리위원장을 맡으면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재계에서는 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의 회장 승계가 임박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인터뷰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질문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무척 간단했다. “10년 전 아버님께서 ‘앞으로 20년은 더 하겠다’고 하신 적이 있으니 앞으로도 10년이나 남았네요”하고는 웃어넘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후계자설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는 신부회장도 이야기가 롯데의 비전이나 향후 사업구도에 대한 대목에 이르면 거침없는 태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1, 2등을 할 수 있는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뛰어들겠지만 그렇지 않은 업종에는 섣불리 진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생소한 분야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게 되면 결국 사회적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현대나 대우를 보세요. 공격적으로 여러 가지 분야에 진출했지만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대우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3년간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돌다리 경영 철학’ 덕분에 재계에서는 늘 ‘롯데=보수적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기도 한다. 그러나 신부회장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굳이 부인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레저나 유통 등 롯데가 강점을 가진 부분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특히 편의점을 이용한 전자상거래 분야는 신부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롯데그룹의 미래 주력사업이다. 그는 현재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코리아세븐과 쇼핑몰 운영업체인 ㈜롯데닷컴의 대표이사를 함께 맡고 있다.

    신부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현재 700개 수준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10년 안에 1만개까지 늘리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 대목에서 그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며 편의점 사업의 전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2만개쯤까지 늘어날 편의점의 50%를 세븐일레븐이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현재 점포당 매출이 한 달에 4억5000만원 수준이지만 앞으로는 10억원 수준까지도 올릴 수 있습니다. 편의점이 단순히 유통소매점이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의 역할까지 떠맡게 되는 것이지요.”

    일처리 빈틈없는 ‘글로벌 경영인’
    롯데 관계자는 “일본에서는 편의점이 정부의 대국민 서비스나 안내 창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했다. 전자상거래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것이 물류 배송 시스템인 만큼 동네 구석구석마다 세븐일레븐 편의점망을 구축해 물류 기지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현재 전국의 세븐일레븐 점포에는 모두 200대의 현금입출금기(ATM)가 설치돼 있어 소매금융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전자상거래와 편의점을 연동시키는 모델 역시 일본의 사례를 도입한 것이다. 당연히 신부회장의 국내 유통산업 장악 전략에도 일본형 모델이 중요한 참고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부회장이 비즈니스의 기회를 가졌던 것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경영학을 전공했던 컬럼비아대학의 경험까지 합치면 그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일본을 두루 돌아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비즈니스에 종사했던 미국, 영국과 일본의 기업환경을 한국과 비교해 달라는 주문에는 “4개국 중 한국의 규제 정도가 가장 심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해하지 못할 규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부회장은 지금도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한국과 일본에 한 달씩 체류하면서 업무를 챙겨왔던 부친 신격호 회장과 달리 신동빈 부회장은 업무가 있을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열흘 남짓한 기간 한국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머무는 동안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일 수밖에 없다. 덕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사무실을 벗어나 인근 백화점이나 호텔을 ‘산책’하는 것이 신부회장의 취미 아닌 취미가 돼버렸다. 정작 본인은 ‘산책’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경쟁사에서 운영하는 백화점이나 호텔을 혼자 돌아보면서 진열상태나 접객 요령 등 꼼꼼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살펴보기 일쑤. 최고경영자로서의 자투리 시간 활용법치고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셈이다. 그를 오래 지켜보아 온 한 롯데 관계자는 “신부회장이야말로 일이 곧 취미”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신부회장이 일에만 파묻혀 여가를 등한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폭탄주 문화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운동에 관한 한 만능 스포츠맨 수준임을 자랑한다. 골프는 물론 스키와 테니스 등도 두루 좋아한다. 특히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야구. 신부회장은 현재 일본 내 프로야구 구단인 롯데 마린즈의 실질적 구단주다. 대부분 기업 원로들이 구단주를 맡고 있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신부회장은 최연소 구단주로 꼽힌다.

    “스포츠뉴스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다 보니 아마 날 잘 모르는 일본인 중에는 야구선수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헌칠한 키에다 떡 벌어진 어깨는 운동선수의 체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발레를 배우고 있는 막내딸 이야기를 꺼낼 때는 얼굴에 진한 홍조를 띤다. NHK 신년 콘서트의 하나로 열렸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서 딸이 주인공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는 영락없이 딸자랑에 여념이 없는 ‘보통 아버지’의 모습이다.

    신부회장 자신도 국제금융업무에 오래 종사해 온 기업인답지 않게 문학적 감수성도 갖고 있는 편이다. 한때 괴테의 시에 심취해 일부러 독일어를 배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부분 역시 아버지인 신격호 회장을 빼닮았다. 신회장 역시 청년시절 문학도를 꿈꾸었고 그룹 이름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에서 따올 정도로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신동빈 부회장은 “지금도 괴테의 시를 영어로는 외울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거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하기보다는 소비자들의 섬세한 요구를 설명하려 들었다. 식품 관련 자회사인 롯데후레쉬델리카가 만들어 편의점에 공급하는 ‘롯데김밥’이 작년에는 하루 5, 6개밖에 안 팔렸는데 올해부터는 25개가 팔려나간다며 좋아하기도 했고, 북한에 과자공장을 지어 어린이들에게 공급하고 싶다는 희망도 내비쳤다.

    이 역시 롯데그룹이 갖고 있는 실용주의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부친인 신격호 회장은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말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겉으로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보다는 내적인 충실함이 중요하다는 말. 호텔, 레저, 유통 분야에서 일반 소비자들과의 접촉을 중요시해 온 그룹의 분위기가 그대로 나오는 말이었다. 신격호 회장은 이 말을 집무실에도 걸어놓았다고 한다. 신동빈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주하면서 롯데그룹의 키잡이 노릇을 하게 되면 그의 집무실에도 똑같은 말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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