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7

2001.01.11

”생때같은 내 아들의 죽음을 밝혀라”

훈련병 사인 놓고 유가족·군 공방 … ‘전군협’ 진상조사에 유가족 배제해 또 다른 마찰

  • 입력2005-03-07 16: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00년 10월27일 강원도 홍천군 국군철정병원 정신과 병동 격리실에서 한 젊은이가 숨졌다. 그는 같은 해 9월 제12보병사단(육군 을지부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훈련병 L씨(20·서울 신월동). 당초 그는 대학 휴학중인 지난 5월 입대했으나 급성간염 판정을 받고 귀향했다 재입영한 터였다.

    L씨는 입대 후 훈련과정에서 잦은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다 ‘꾀병’으로 몰린 끝에 부대측에 의해 정신과적 이상 유무를 가리기 위해 병원에 보내져 검사받던 중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심폐소생술 조치중 숨졌다(군당국 발표).

    의문사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12사단 헌병대 수사를 거쳐 현재 12사단 보통검찰부 및 관할 3군단 헌병대에서 추가수사가 진행중이다. 특히 병원 검사과정에서 한 군의관이 의식을 잃은 L씨의 얼굴에 물을 뿌렸음이 확인됐고, L씨의 사망 사흘 뒤 이 사건의 현장검증에 참여했던 신교대 행정보급관(42)이 부대 내에서 목매 숨진 사체로 발견돼 의혹은 더욱 커진 상태.

    이번 사건은 군 관련 사망사건으로서는 최초로 유족이 해당병원을 사건 직후 8일간 점거하고 L씨의 사체를 드라이아이스로 보존해 이후 수사과정이 유족에게 거의 공개된 케이스. 그러나 유족은 지난해 11월5일 L씨의 부검이 이뤄진 뒤 39일째인 12월14일에야 12사단 헌병대가 발표한 부검 소견 및 관련 수사결과의 일부만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생때같은 내 아들의 죽음을 밝혀라”
    “1m82, 78kg의 건장한 아들이 지방간 진단서를 첨부해 입대한 지 40여일 만에 갑작스레 숨졌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 당사자인 유족들이 문서화된 수사기록을 받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아들의 사인을 확인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L씨의 아버지(51)는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초 L씨 유족은 사건 직후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를 전국군폭력희생자유가족협회(이하 전군협)에 위임했다. 전군협은 지난 98년 군복무중 의문사한 아들(당시 20세)의 사건 전모를 철저한 현장검증으로 밝혀낸 L회장(46·여)이 같은 해 12월 결성한 민간 차원의 군의문사 진상규명 단체.

    원래 L씨의 부검 및 수사결과는 지난해 12월14일 전군협으로 통보됐다. 군당국이 발표한 L씨의 사인은 기도폐색성 질식사, 급성심정지, 청장년급사증후군 등. 부검 소견에 이의를 제기하려 기록 복사를 요청한 유족측은 그러나 “열람만 가능하다”는 전군협의 반대에 부닥쳤다. 사건 관련자 신변안전을 위해 자료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전군협과 군 간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 군 역시 자료를 달라는 유족에게 “위임관계에 있는 전군협에 확인하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당황한 유족은 즉시 위임을 취소하고 개별적인 진상조사를 위해 전군협에 관련 자료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또한 거절당해 마찰이 빚어졌고 유족측과 L회장 간의 공방은 전군협 홈페이지를 달구고 있다. 이 과정에서 L회장은 수사결과의 ‘전문’ 대신 일부만을 발췌해 전군협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인터넷에 게시한 것은 ‘유출’이 아닌가. 자기가 아니면 군의문사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L회장의 처사는 지나친 독단이다. 심지어 전군협은 진상조사기간(10월29일∼11월4일) 중 유족이 군 관계자에게 아무 말도 못하도록 했다.” 유족의 주장이다.

    그러나 전군협의 생각은 다르다. “군의문사의 진상을 해당 유족이 직접 파헤치기란 불가능하다. 전군협엔 축적된 노하우가 있다. 조사과정이나 수사결과에 대해 사사건건 유족이 개입하면 효율적인 진상조사가 이뤄지기 힘들다.”

    L회장의 주장엔 일견 타당한 면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군협의 이런 일처리 방식이 일부 유족들 사이에 ‘소권력화된 독단’으로 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전군협의 공과를 따지는 목소리는 지난해부터 조금씩 불거졌다. 현재 군의문사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는 단체는 전군협과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실천시민연대 등 세 곳 정도. 채널이 적다 보니 군의문사 유가족의 대다수는 전군협에 조사를 일임하고 있다. 사건의 특성상 완벽한 현장보존이 어려운 데다 초동수사마저 미흡한 경우가 많아 현실적으로 유가족의 개별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 특히 전군협의 경우 군의문사 진상규명에 대한 L회장의 의지가 강한 데다 활동도 적극적이어서 단체 발족 이후 120여건의 군의문사 사건이 접수돼 있다.

    전군협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전군협이 유족들로 하여금 전군협에 대한 위임장을 의무적으로 작성하고 공증을 받게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진상조사와 관련한 유가족의 권리 일체를 전군협이 위임받고, 군당국도 위임을 받았다는 이유로 전군협측에 수사자료를 공개하는 진상조사활동의 메커니즘이 비판의 타깃이 되고 있는 것.

    “유족들은 흔히 자신들이 원하는 조사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억지를 부리며 전군협 활동에 협조하지 않을 때가 많다.” L회장은 “유족 중 상당수가 진실규명 자체보다 보상과 순직처리 여부에 더 관심을 둔다”며 “더 중요한 것은 군의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진실을 파헤치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사건 은폐와 조작, 왜곡이 빈번했던 군당국의 의문사 조사 관행상 군당국에 맞서는 ‘전략’과 ‘전술’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유족이 납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군협은 또 조속한 사건해결을 위해 군부대 방문이 잦은 만큼 공동체 활동을 해야 한다며 합숙생활을 요구하고 있어 이 때문에 생업을 전폐한 유가족의 탈퇴가 이어지고 있다.

    99년 4월 전군협에 가입했다 지난해 2월 탈퇴한 한 유가족은 “전군협과 행동을 같이한 만 10개월 동안 무려 6000만원의 경비를 썼다. 생업도 포기했다. 하지만 아직 아들의 죽음에 대해 뚜렷하게 밝혀진 건 없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한 유족도 “가입한 유족은 무조건 전군협 지시에 따라야 한다. 유족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지시를 어기면 ‘성의없다’며 협조해주지 않아 결국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전군협을 탈퇴한 일부 유족은 지난해 10월 결성된 자생단체인 ‘군의문사 진상규명 및 군폭력 근절 대책모임’ 쪽으로 합류하고 있다. 현재 여섯 가족이 가입한 이 단체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함께 진상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해 L회장은 “전군협 규정이 엄격한 건 사실이다. 탈퇴 또한 자유다. 하지만 전군협의 문은 열려 있다. 탈퇴 유족측이 요청한다면 얼마든지 진상조사를 해줄 수 있다”고 밝힌다. 그는 일례로 L씨 사건을 든다. 유족이 위임을 취소했지만 전군협은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이미 모든 조사를 마쳤으며 전군협의 조사는 군 수사결과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군당국의 최종 수사결과를 기다려본 뒤 내용이 ‘미흡’하면 다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L씨 유족은 여전히 인터넷에 게시된 수사결과 이외에 ‘납득할 만한’ 군당국의 해명을 들은 바 없다. 참다못한 유족은 최근 12사단측에 이의를 제기해 “부대를 방문하면 헌병대 수사결과를 열람시켜 주겠다”는 통보만 받았을 뿐이다.

    현재 L씨 사건은 신교대 고참병들에 의한 구타 및 가혹행위가 일부 있었다는 정도만 밝혀졌을 뿐 아직 그 전모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 12사단 관계자는 “금년 1월 말쯤 최종 수사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며 말꼬리를 흐렸다.

    “전군협의 공헌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전군협의 조사 결과는 언제나 옳고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가.” 전군협의 조사방식이 투명하지 않다고 여기는 유가족과 ‘소명의식’으로 똘똘 뭉친 전군협의 ‘방법론적 충돌’은 군의문사의 진상을 밝혀낼 민간 통합기구가 필요한 시점이 됐음을 시사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L씨의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 유골봉환소에 안치된 그대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