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6

2016.07.13

강유정의 영화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질문 ‘왜 그랬을까’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6-07-12 1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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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랬을까. 거듭 물어보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다. 그는 이미 내 곁에 없으니까, 아니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어느 날 선로를 따라 걷던 그 남자는 기차가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피하지 않고 내리 걷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신은 몹시 훼손돼 현장에서는 그의 발가락 하나와 직장을 암시하는 종이쪽지 한 장만 발견됐을 뿐이다. 왜 그렇게 무참히 떠났어야 했는지, 그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여느 아침처럼 출근했고, 비가 온다는 말에 우산을 챙겼으며, 그렇게 천천히 그녀 앞에서 멀어져 갔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대답은 그녀 안에서 소용돌이쳐 돌아오고 다시 또 깊어질 뿐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 ‘환상의 빛’은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이 미망인이 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고 있다면, 영화는 그녀의 내면조차 거리를 두고 그저 그녀의 외면만 보여줄 뿐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데, 영화를 보는 관객들 또한 그 질문을 똑같이 그녀에게 하고 싶어진다. “왜”라고 말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제 할 일을 다한 셈이다. 누구든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왜”라고 묻기 쉽지만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 세상을 떠난 그에게 “왜”라고 묻기 힘들듯, 스크린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녀에게 “왜”라고 물을 수도 없다. 만약 그가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면 어땠을까. 인류는 그런 순간을 위한 매우 훌륭한 발명품을 이미 가지고 있다. 바로 신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신에게 질문한다. “왜 그여야만 했나요” 혹은 “왜 나여야만 했나요” “왜 당신은 이처럼 빨리 혹독하고 무자비하게 그를 데려가고, 그리고 나만 남겨놓나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묻는다 한들 신이 답할 수 있을까. 세상엔 답할 수 없는 것이 답을 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만일 남편이 유서를 써놓았다고 할지언정 그 유서가 제대로 된 답이 될 수 있을까.

    ‘환상의 빛’은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는 죽음이 던지는 질문과 삶이 부여하는 아이러니에 천착하며 담담하게 들여다본다는 평가를 받는다. ‘환상의 빛’은 그런 평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수작이다. 원작소설이 가까스로 애쓰며 자신의 삶을 개연성이라 불리는 합리적 생의 근거를 통해 찾으려는 한 미망인의 내면을 따라가는 데 비해, 영화는 그런 그녀를 거대한 삶의 한가운데 놓인 피조물로 그린다. 소소기항의 거친 해풍과 해명은 그녀가 느끼는 개인적인 혼란을 그럴듯한 공감의 지점으로 제공한다. 소설이 우리로 하여금 그녀를 이해하게 한다면 영화는 그녀에게 공감하도록 이끈다.

    남편이 왜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만 했는지 소설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녀가 외마디 비명처럼 “왜 그가 죽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외칠 때, 그녀가 내면의 방에서 한 걸음쯤 걸어나와 세상에 말을 건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스물다섯에 남편을 잃은 그녀가 서른두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그 고민을 입 밖에 내놓는다. 정말 깊은 고통은 그렇게 쉽게 말이 되지 않는다.



    고레다 감독은 쉽게 말이 되지 않는 이 고통을 영상언어로 그리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는 아마도 현란한 시각장치나 음향이 아니라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끈기에서 비롯된 온기일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는, 따뜻한 배려 덕에 영화 속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성장을 하고, 고통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는다. 아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위안이 아닐까. 따뜻한 공감의 언어를 알려주는 영화, ‘환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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