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2

2016.01.20

인터뷰

“속물사회와 ‘헬조선’에 갇힌 청춘, 탐구·말하기·후원으로 돌파해야”

‘학교를 넘어서’ 이후 18년, 변호사 이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6-01-18 10:53:4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속물이 되거나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것밖에 없어 보여요.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좋다’고 주장하죠. 이 안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위계를 차지하려고 애쓰고요. 후자 사이에서는 ‘헬조선’이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같은 말이 유행합니다. 사회에 문제가 많으니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한 ‘지식과 노동 법률사무소’ 변호사(사진)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정신적 증후’라고 지적했다. 부조리한 사회문제를 직시하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또 다른 길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최근 펴낸 책 ‘삶은 왜 의미 있는가’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칸트, 롤스, 드워킨 등 여러 철학자의 논의를 바탕 삼아 평범한 사람이 ‘자존감 충만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자유인을 위한 사고의 나침반

    이 변호사의 저서에 관심이 간 건 그가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번졌던 ‘탈(脫)학교 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98년 이 변호사가 펴낸 책 ‘학교를 넘어서’는 대학의 교육독점 해체, 학력폐지법 제정 등의 급진적인 주장으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이 무렵부터 명문대 진학을 청소년이 추구할 최고의 목표쯤으로 여기던 사회 분위기에 변화가 생겼고, 많은 이가 제도적 틀을 벗어난 새로운 교육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대안교육운동을 주도한 잡지 ‘민들레’는 2008년 이 변호사를 ‘탈학교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한 방향을 바라볼 때 ‘새로운 상상’을 했던 그가 최근 한국 청년들에게 드리워진 절망과 무기력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서울 마포구에 있는 이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은 건 이 점이 궁금해서였다.
    그는 철학자 칸트가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 첫머리에서 계몽이란 ‘자신의 이해력(오성)을 스스로 사용할 용기를 갖는 것’이라고 밝힌 것을 언급하며, “그런데 많은 사람이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지배적 논리를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한다. 입헌민주주의 사회 시민으로서 자신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그 지위를 왜소화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 비판할 능력을 갖추는 것도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자존감을 잃고 속물화되거나 절망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변호사에 따르면 속물이란 ‘사람은 여러 종류의 위계 속에 등급별로 놓인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속물들’은 ‘위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그 사람의 본질적 가치를 결정한다’고도 믿는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1등 요리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식이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믿음을 조장하고 강화한다는 게 이 변호사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10만 명이 참가해 가위바위보 대회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는 상위 순위에 들 테고, 1등을 차지하는 사람도 나오겠죠. 그러면 출판사는 그들을 인터뷰해 가위바위보 비결을 알아낸 뒤 책으로 출간합니다. 저는 그걸 사기라고 생각해요. 모든 토너먼트에서 1등 지위는 본질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같은 방법을 따라 해도 1등 수는 늘어나지 않잖습니까.”
    이 변호사는 현재 시중에 나온 상당수 자기계발서가 이처럼 ‘지위재’ 획득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런 시각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으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첫째, 삶의 내용적 가치와 배경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탐구’다. 이 변호사에 따르면 삶의 내용적 가치란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일, 탁월하고 좋은 것(예술과 학문 등)을 음미하고 그것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다. 배경적 가치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러한 내용적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탐구, 발화, 후원

    이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중2병’이라는 말은 이런 진지한 탐구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웃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그러나 통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병’이라고 한다면, 실은 탐구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 병에 걸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춘기가 지난 뒤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탐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주위 사람과 함께 나누는 ‘말하기’(발화), 그리고 다른 사회 구성원을 위한 ‘후원’도 이 변호사가 말하는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추가 요소다. 그는 “사회 구성원은 동료 시민이 자신 또는 타인의 권리 침해에 저항하다 입은 불이익을 보전해줄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불이익을 무릅쓰고 저항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내켜 하지 않는 일,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어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 희생의식을 갖지 않고 품위 있게 살아가며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방법은 여러 사람이 조금씩 돈을 내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후원’을 강조하는 이유다.
    이 변호사는 민주사회의 시민은 누구나 이처럼 탐구, 발화, 후원이라는 세 가지 활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높은 위계에 오르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누구에게도 ‘억울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는 게 이 변호사의 생각이다.
    그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는 점에서 ‘학교 밖 세상’을 꿈꾸며 일찌감치 ‘제도권 밖’ 삶에 뛰어든 다른 ‘탈학교 학생’들과 비교돼왔다. ‘본인은 기득권을 누리면서 남에게는 다른 삶을 요구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당시 내가 주장한 건 다 같이 학교를 떠나자는 게 아니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노동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지표로 사용되는 현실, 대학이 교육자원을 독점하는 체제는 잘못 됐다는 것”이라며 “이에 공감하는 이들이 자신의 기질, 능력, 여건에 맞게 사회 변화에 참여함으로써 현실을 개선해나가자는 게 나의 주장”이라고 밝혔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 부조리 앞에서 좌절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할 때 인간은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호사의 말이다. 현재 노동전문 변호사로 일하는 그는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사회적 부조리로 보고, 4월 중 이에 대한 해법을 모색한 책 ‘착취냐 협력이냐’(가제)를 펴낼 계획이다. 본격적인 사회적 ‘발화’의 시작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