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44

2020.06.19

[진중권의 직설③] 보수여, TK부터 바꿔라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6-16 11: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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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K가 당의 최대주주 행세하는 한 미래통합당의 개혁은 불가능

    • 지역주의도 이제는 거꾸로 골치 아픈 부채로 전락

    • ‘돈 벌어오는 아버지’였던 보수, 이제는 ‘돈 들어가는 할아버지’ 취급 받아

    • 보수 유튜버, 지지층을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집단 이주시켜

    • 젊은 보수주의자를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 중도층 등 돌리게 만드는 극단 분자들을 주변화해야

    • 신뢰할만한 정보와 의제 제시하고, 이슈 전달할 대안매체 만들어야

    진중권 전 교수는 “지금 보수층은 유튜브 선동방송에 대책없이 내맡겨져 있다”고 진단했다. [유튜브 화면 캡쳐]

    진중권 전 교수는 “지금 보수층은 유튜브 선동방송에 대책없이 내맡겨져 있다”고 진단했다. [유튜브 화면 캡쳐]

    이제까지 대한민국 보수를 지탱해온 2개의 서사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봤다. 보수 진영은 대한민국이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이행한 것의 정치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디지털경제의 주력이 된 세대를 통째로 놓쳐버렸다. ‘산업화’의 추억에만 의존한 결과 보수 지지층의 고령화를 막지 못한 것이다. ‘돈 벌어오는 아버지’였던 보수가 이제는 ‘돈 들어가는 할아버지’ 취급을 받게 됐다. 대안 서사야 이제라도 만들면 되지만, 문제는 이 지지층이다.

    인재풀 문제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를 마친 후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뉴시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를 마친 후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뉴시스]

    과거에는 ‘보수는 부패했으나 유능하고, 진보는 청렴하나 무능하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때 진보는 상대적으로 청렴했다. 권력에서 떨어져 있다 보니 부패하고도 싶어도 부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권력을 잡자 부패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보의 생명은 도덕성에 있다”고 하던 그들이 요즘은 “왜 진보만 도덕적이어야 하냐”고 따지며 통념 자체를 내다버렸다. 청렴하지만 무능하던 진보는 그렇게 ‘부패했으나 유능한’ 세력이 됐다. 주류가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사회 엘리트가 보수 정당으로 몰렸다. 그들을 끌어들이려 따로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돈과 권력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 윤리적 경쟁력을 갖추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리로 몰렸다. 하지만 앞으로 이 프리미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엘리트는 권력을 쥔 더불어민주당(민주당)으로 몰리고 있다. 보수 정당이 그 불리함을 상쇄할 정도의 도덕적 우월성을 가진 것도 아니잖은가. 그러니 사회 엘리트가 돈과 권력이 있는 곳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수 정당의 토대는 이제 지역만 남았다. 이마저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토대는 고도성장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산업화가 경부라인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그 주력이 된 영남 엘리트가 서울 강남에 모여 살았다. 이 영남과 강남의 연합이 보수 정당의 지역적 토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부산·경남(PK)의 절반은 민주당으로 넘어가고, 대구·경북(TK)은 과거 호남처럼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이번 총선에서 일군의 지식인이 대구를 향해 차별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해보라. 

    영남권 분열의 징후는 일찍 나타났다. 2016년 총선 전 친박(친박근혜) 공천으로 인한 새누리당의 분열을 생각해보라. 결국 총선이 새누리당 패배로 끝나자, 보수에서는 친박으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사실 스모킹건은 종합편성채널 JTBC가 찾아냈지만, 국정농단 취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였다. 뒤늦게 취재에 뛰어든 ‘한겨레’의 김의겸 기자는 “이미 조선일보 기자들이 메뚜기 떼가 지나간 것처럼 이삭 몇 개만 흘리고 싹 쓸어갔다”고 술회한 바 있다.



    자산이 부채가 되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이행이 정치지형에 거대한 구조 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산업화시대에는 수출입이 부산항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디지털시대의 수출입은 항공을 통해 이뤄진다. 반도체나 스마트폰을 몇 달 걸려 배로 실어 나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후 서울과 부산항을 잇는 경부라인의 경제적 위상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 결과 보수 정당을 떠받치던 지역적 기반이 무너지고 외곽이 떨어져나가면서 달랑 코어인 TK(더하기 PK의 절반)만 남게 된 것이다. 

    보수가 살려면 당이 바뀌어야 하는데, 영남권 의원들은 고정 지지층이 있어 개혁 필요성을 별로 못 느낀다. 게다가 이 지역 유권자는 전국에서 성향이 가장 보수적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당의 수도권 의원들에게 돌아갔다. 수도권에서 TK로 대표되는 강경보수 이미지는 선거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2020 총선에서 수도권 후보는 강남을 빼고 전멸했다. 개혁 필요성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이들이 몰락했으니, 당내에서 개혁을 주도할 세력도 없어진 셈이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탄핵이라는 파국을 맞았을 때 이미 근본적 개혁에 나섰어야 한다. 하지만 바뀐 것은 당명뿐. 개혁한다고 뛰쳐나간 의원들도 얼마 후 슬그머니 다시 본가로 복귀했다. 개혁의 발목을 잡은 것은 지지층이었다. TK지역이 당 최대주주 행세를 하는 한 당 개혁은 불가능하다. 한때 든든한 자산이던 지역주의가 거꾸로 골치 아픈 부채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결국 보수는 탄핵 총리를 대표로 모심으로써 아예 개혁 포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된다. 

    이는 중도층에게 보수 정당은 구제불능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결과는 2020 총선 참패로 나타났다. 부랴부랴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을 구원투수로 모셔다 개혁을 도모하지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당에 지지기반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개혁하려면 당내 기득권을 건드려야 하는데 이 경우 강력한 반발에 부딪칠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는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다. 허나 그 당의 대다수는 그냥 대외적으로 당이 변신했다는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저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 밖의 보수층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여론 헤게모니는 합리적 보수층에 있지 않다. 거기서 여론을 이끄는 것은 강경보수. 이들을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힘들다. 너무 오랫동안 “나라를 팔아먹어도 1번”이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유가 논리에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경직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혁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유연성도 허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동안 이견을 가진 이는 무조건 ‘빨갱이’로 여기도록 훈련된 터라, 개혁 자체를 정체성의 포기로 여기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도 합리적 사유를 관철하는 데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말이 진보나 보수지, 어차피 인간은 다 보수적이다. 대중은 제 신념을 다시 확인케 해주는 콘텐츠를 좋아하고, 제 신념이 잘못됐다는 얘기는 듣기 싫어한다. 나 자신도 그렇다. 그래서 팟캐스트나 유튜브의 선동방송을 통해 들어야 하는 얘기가 아니라 듣고 싶어 하는 얘기만 들으려 한다. 이것이 장사가 되다 보니, 이들 매체와 경쟁하는 레거시 미디어마저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지난 총선 때 모든 여론조사가 미래통합당의 참패를 예상했음에도 보수 유튜버들은 온통 대승의 낙관적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상황 인식이 완전히 현실로부터 유리돼버린 것이다. 보수 유튜버들은 대중에게 ‘봐야 할 현실’이 아니라 ‘보고 싶은 환상’을 보여주면서 그것으로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 참패했음에도 선동을 멈추지 않는다. ‘분명히 이긴 선거였는데, 결과는 참패였다. 그렇다면 개표가 조작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돈을 벌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다. 

    당이 정치적 리더십을 상실한 사이 보수 유튜버들이 지지층을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집단 이주시켜버렸다. 아마 다음 선거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다 참패하면 다시 대선음모론이 등장할 테다. 패할수록 승리 욕망은 절실해지고, 그럴수록 선동은 잘 먹힌다. 그렇게 주관적 승리와 객관적 참패는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를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방치하면 당이 잡아먹힌다. 당에는 이 광신적 지지층을 자기 정치에 활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지층 리모델링

    2020 총선에서 수도권 후보들은 강남을 빼고 전멸했다. 그림은 21대 총선 서울지역 개표 결과.

    2020 총선에서 수도권 후보들은 강남을 빼고 전멸했다. 그림은 21대 총선 서울지역 개표 결과.

    이제라도 보수는 무너진 지지층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일단 당에 브레인을 만드는 일이다. 기능을 잃은 ‘여의도연구원’을 대체할 보수의 새로운 싱크탱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이미 이뤄진 것으로 안다. 보수 혁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미래에 대한 합리적 예측에 근거해,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바꾸려 하는지 보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보수가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한 지 너무나 오래됐다. 

    아울러 합리적 보수가 당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지금 미래통합당은 스스로 주전장을 떠나 전선을 낙동강에 쳤다. 그러다 이 사회 주류가 된 계층을 통째로 놓쳐버린 것이다. 이제라도 전선을 넓혀 디지털 경제를 담당하는 보수층을 겨냥해야 한다. 이 계층에 소구력을 가지려면 낙동강 이북에 사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보는 강경보수가 당의 지도적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들은 자기 세계에 갇혀 이미 오래전 사회적 소통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보수의 희망은 젊은 층에 있다. 바로 그들이 20년 후에는 이 나라를 주도할 것이다. 보수 정당은 젊은 보수주의자를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물론 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기적 과제다. 하지만 씨를 뿌린다고 바로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과거 보수는 자기는 굶어도 자식은 교육시켰다. 아무리 현재가 궁해도 눈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젊은이들을 ‘키즈’로 만들어 마스코트로 삼을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들을 ‘어른’으로 키워 당에서 어른으로 대접해야 한다. 

    나아가 보수 담론층을 형성해야 한다. 현재 보수는 담론시장에서 완전히 도태됐다. 그동안 보수는 담론 생산을 통한 사회적 설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반공주의와 지역주의만 가지고도 선거에서 쉽게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담론시장에서 보수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이 사회 여론 형성층은 보수에 우호적이지 않다. 사실 보수주의 이념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상대 진영에서도 인정할 만한 실력 있는 보수주의자를 발굴해야 한다.

    보수의 여론

    마지막으로 미디어 전략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 보수의 미디어 콘셉트는 상대를 증오하게 만드는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그것으로는 이길 수 없다. 상대를 나쁜 놈이 아니라 후진 놈으로 만들어야 한다. 보수 어젠다를 생산해 프레임을 선점하고, 상대로 하여금 내 프레임 안에서 놀게 해야 한다. 선수를 빼앗긴 어젠다는 내 것으로 빼앗아 와야 한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 논쟁을 생각해보라. 이때 중요한 점은 정략적 이해를 버리고 공공선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지지층을 위한 미디어 전략도 필요하다. 지금 보수층은 유튜브 선동방송에 대책 없이 내맡겨져 있다. 그들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 바람직한 의제를 제시하고 그날그날의 이슈를 정확히 읽어줄 대안 매체를 만들어야 한다. 지지층이 합리적이지 않은 이상 정당이 합리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지지층의 극단적 분자들을 주변화해야 한다. 그들은 중도층으로 하여금 보수에 등을 돌리게 하는 주범이다. 절대로 그들에게 보수 여론의 헤게모니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잘 모르겠으면 기업으로부터 배워라. 시장은 냉혹해 게으른 기업은 바로바로 처벌하기 때문이다. 현 기업들은 적어도 그 처벌로부터 살아남은 조직이다. 언젠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아내 빼고 다 바꾸라”고 했다. 보수도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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