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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추운 겨울, 2016

제발 응답하지 마라, 1998

치욕의 선물 ‘구제금융’, 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아픈 상처 떠올리는 위기의 징후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제발 응답하지 마라, 1998

제발 응답하지 마라, 1998

동아DB

“무섭게 몰아치는 IMF 한파 영향일까. 요즘 들어 찬바람이 더욱 가슴 깊이 파고든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대한민국을 눈물짓게 한 이른바 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시 제일은행 홍보실에서 제작한 이 영상물은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를 떠나게 된 행원들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담아내 청와대도 구매할 만큼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2015년 겨울, 다시 제일은행(현 한국SC은행)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전 직원의 45%에 해당하는 2500여 명을 대상으로 퇴직 신청을 받은 것이다. 12월 15일 현재 961명이 회사를 떠난 상태다. 1979년 제일은행에 입사해 사명이 SC제일은행→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한국SC은행으로 바뀌는 걸 지켜봐온 박종복 한국SC은행장은 본사 직원들에게 구조조정 사실을 알리며 “외환위기 때보다 더 참담한 심정”이라고 했다.
2016년, 다시 예사롭지 않은 추위가 한국을 덮치고 있다. 기온보다 더 싸늘한 건 ‘가슴 깊이 파고드는’ 고용 불안의 그림자다. 한국SC은행 외에도 KB국민은행,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KEB하나은행 등이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은행권에서 2015년 한 해 동안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직원은 3600명에 이른다. 증권업계와 보험업계에는 찬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다. 우리나라 보험 ‘빅3’로 불리는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은 이미 인력의 10% 안팎을 솎아낸 상태.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증권업계에서도 최근 2년간 6241명이 사원증을 반납했다.  

설득과 모욕에 쫓겨나는 40대

금융권 밖으로 눈을 돌려도 현실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20대 초반 직원을 희망퇴직 대상으로 삼았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두산인프라코어처럼 2015년 한 해에만 여러 차례 희망퇴직을 반복한 회사가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사무관리직 3000명 가운데 약 40% 퇴사를 목표로 2월과 9월,
11월, 그리고 12월까지 네 번에 걸쳐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STX조선해양 역시 사원급을 포함한 모든 직원으로부터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고, 삼성그룹은 전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계열사가 희망퇴직을 했거나 진행 중이다. 삼성엔지니어링은 그룹 사상 최초로 전 직원을 대상으로 1개월 무급 순환 휴직까지 실시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이른바 외환위기 때도 없던 일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인력 감축보다 전 임직원이 고통을 분담하는 게 좋겠다는 사우협의회 제안으로 이뤄진 조치”라며 “그룹 전체에서 2015년에만 희망퇴직 등으로 6000명 이상이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름은 ‘희망퇴직’이지만 상당 부분은 ‘강제퇴직’이다. 최근 두산인프라코어의 ‘20대 퇴직 강요’ 사실을 폭로해 화제가 된 직장인 전용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블라인드’의 운영사 팀블라인드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7%가 희망퇴직 과정에서 회사가 퇴직을 압박한 것을 보거나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 622명에 따르면 해당 회사가 ‘희망’퇴직을 ‘강요’한 방식은 △희망퇴직 거부 시 인사발령, 정리해고 등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압박(157명·32.8%) △희망퇴직 대상자로 정해졌다는 통보(141명·29.4%) △부서별 인원 할당으로 반드시 누군가 나가야 한다는 압박(60명·12.5%) △지속적인 면담, 망신 주기, 폭언 등 심리적 모욕감(39명·8.1%) 순이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관계자에 따르면 2014년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증권사의 경우 접수마감을 하루 앞두고 마케팅조직을 신설해 직원 60여 명을 그쪽으로 보냈다. 사실상 대기발령이었다. 또 다른 회사는 퇴사를 거부한 직원의 개인용컴퓨터(PC)와 전화기를 회수하고,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파견하거나 특별교육 대상으로 분류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한 증권사 직원은 “지점장이 회식할 때 노골적으로 ‘쟤는 빼’라고 한다든지, 은근슬쩍 ‘쟤 때문에 우리 지점이 어렵다’고 말하는 등 대놓고 모욕을 주는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이 68개 지부 조합원 3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성과가 떨어지는 직원에게 상사가 “공개적인 회의자리에서 ‘월급을 축내는 식충이’라고 한다”거나 “회의시간에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느냐’ ‘그렇게 밥값을 못 해서 살겠느냐’ 같은 발언을 한다” 등의 증언이 쏟아졌다.
제발 응답하지 마라, 1998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한 식당에 붙은 폐업 안내문. 상당수 기업이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많은 직장인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자영업 경기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음식점, 숙박업 5년 안에 절반 문 닫아

이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허리’인 40대의 상당수가 회사를 떠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15년 11월 발행한 ‘고용동향브리프’에 따르면 40대 남성 취업자 수는 2014년 9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1년 1개월 연속 감소 추세다. 2015년 1분기 전체 취업자의 48.6%가 30, 40대인 걸 감안하면 이들의 취업률 하락은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윤정혜 고용정보분석센터 책임연구원은 “40대 남성의 고용률은 여전히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은 수준이지만 대부분 가정에서 경제적 가장 노릇을 해 이들의 취업률 감소가 이어지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회사를 떠난 이들이 옮겨갈 곳이 없는 것도 문제다. 2015년 봄 KB국민은행에서 희망퇴직한 A(56)씨는 아직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퇴사할 때 받은 28개월 치 월급을 은행에 예치한 채 ‘내핍’ 생활을 하는 그는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뾰족이 갈 만한 곳이 없다. 가게를 여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워낙 불경기라 엄두가 안 난다”며 한숨을 쉬었다.
중견·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이러한 ‘안전장치’도 없이 회사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권고사직을 한 B(42)씨가 받은 건
3개월 치 월급이 전부다. 이들이 한꺼번에 재취업시장에 몰리면서 헤드헌팅 회사에는 이력서가 쌓이고 있다. 신유정 헤드헌터는 “2015년 가을부터 하루에 몇 통씩 이력서를 받을 정도”라며 “하지만 기업들이 전반적으로 채용을 줄이는 상황인 데다 경력 채용도 줄고 있어 재취업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가 2015년 12월 22일 발간한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근속기간은 5.6년으로 관련 통계를 발표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5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짧았다. OECD 회원국 평균 근속기간(9.5년)에도 크게 못 미쳤다. 반면 우리나라 노동자의 은퇴연령은 2007~2012년 평균 71.1세로 OECD 34개 회원국 중 멕시코(72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상당수 노동자가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고령에 이를 때까지 노동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이다.
준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성공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영업자의 사업기간 현황’에 따르면 국내 음식점과 숙박점 10곳 중 4곳은 3년 내 문을 닫았다.
5년 안에 문을 닫는 비중도 54%로, 농가를 제외한 전 산업을 통틀어 가장 높았다. 음식점은 퇴직자가 가장 쉽게 도전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다.
2015년 중견 의류업체에서 퇴사하고 서울 은평구에 분식집을 개점한 C(34)씨는 “갑자기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얘기를 들어 ‘다음 스텝’에 대한 준비를 전혀 못 했다. 일을 배우며 사업 아이템을 물색하기 위해 일단 분식집을 시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서도 최근 2년 내 자영업을 시작한 응답자의 반수 이상이 창업 준비 기간을 ‘3개월 미만’이라고 답했다. 10명 중 9명(92.4%)의 준비 기간이 1년 미만이었다. 이런 현실은 현재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상당수가 충분한 준비 없이 창업을 했음을 시사한다.  
제발 응답하지 마라, 1998

서울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주변에 형성된 인력시장에 일감을 찾는 건설현장 노동자들이 모여 있다. 지호영 기자

막노동에 내몰린 20대

취업이나 창업이 어려운 이는 ‘막노동’에 나서기도 한다. 영하 추위에 온몸이 움츠러든 2015년 12월 22일 오전 4시 30분, 서울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주변 인력시장을 찾았다. ‘○○인력개발’이라고 적힌 인력소개소 간판들이 불을 밝힌 곳에 일용직 구직자 수백 명이 모여 있고, 도로에는 이들을 전국 각지로 데려갈 승합차가 줄지어 정차해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팔짱을 낀 채 추위를 견뎌내는 이들은 대부분 40~60대 남성으로, 오전 5시가 되자 구로구청 직원이 이들에게 떡과 차를 무료로 제공했다. “매일 오전 5~7시 1500잔이 나간다”고 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은 대부분 10년 이상 경력의 건설현장 근로자다. 15년째 목수 일을 한다는 D(52)씨는 “목수는 일당 14만~15만 원을 버는데 10년째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아 생계가 점점 힘들어진다”며 “예전에는 ‘돈 버는 만큼 최선을 다해 일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수년째 임금이 제자리니 근로자들 표정도 우울하고 예전보다 기력도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 자리에 오는 건 “택시기사, 식당 일 등 여러 가지를 해봤지만 건설 분야 일용직 돈벌이가 그나마 낫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력시장에는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던 전직 사업가도 더러 있었다. 의류공장을 경영했던 E(56)씨는 5년 전까지 연매출 10억 원 이상을 올리는 기업가였다. 그는 “최근 수년 사이 새벽 인력시장에 뛰어든 사람 가운데 나처럼 사업하다 망했거나 대학 졸업한 젊은이가 꽤 있다”며 “중국에서 직원을 1000명 넘게 부리던 전직 경영자도 봤고, 국내에서 직원 120명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다 실패해서 온 사람도 봤다”고 했다.
F(36)씨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인력시장에 나왔다고 했다. 그는 “대학 나온 젊은 사람들은 멀뚱하게 서 있다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동포들에게 인력시장 일마저 빼앗기기 일쑤”라며 “오전 6시 반까지 승합차에 타지 못하면 그날 하루를 허탕 치는 거다. 일용직 구하기도 만만치 않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건설근로자 4명 중 1명가량은 대학 졸업자다. 고용노동부 산하 건설근로자공제회가 2015년 2~7월 건설근로자 377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5 건설근로자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졸 이상 건설근로자의 비중은 23%이다. 주목할 점은 연령이 낮을수록 대졸자 비율이 높아, 20대 대졸자 비중은 30.3%, 30대 대졸자 비중은 39.6%에 달했다. 취업하지 못한 대졸자들이 건설현장을 찾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활 의지를 가진 노숙인도 희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노숙인 쉼터인 서울특별시립 브릿지종합지원센터에 머물고 있는 G(55)씨는 10여 년 전까지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통화 트레이더로 일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일자리를 잃었고, 그동안 쌓은 지식과 경력으로 재취업을 노렸지만 그를 받아주는 직장은 거의 없었다. G씨는 “나처럼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증거”라며 한숨을 쉬었다.  

실직과 사업 실패, 노숙인 전락

노숙인 자활센터인 서울 종로구 ‘수송 보현의 집’에서 자립을 간절히 바라지만 재취업하지 못한 노숙인들의 한탄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중견기업 재무팀에서 일하다
5년 전 입소한 김학규(54) 씨는 석사학위 소지자에 태양광발전설비, 요양보호사, 공인중개사, 커피 바리스타 등 자격증 5개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재취업은 힘들기만 하다. 김씨는 “자격증이 이렇게 많은데 월급 100만 원 내외 일자리도 찾기 힘들다. 노숙자라는 신분을 숨기는데도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못나서 노숙인이 됐다는 반성을 자주 한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취업문이 바늘구멍만큼이나 좁다”고 한탄했다. 또 다른 입소자 H(62)씨는 원래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2층짜리 갈빗집을 운영하다 실패해 노숙인이 됐다. H씨는 “10년 전에 비해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이 늘었고 노숙인 쉼터시설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지만 노숙인의 재기를 위한 정책은 여전히 부족하다”며 “정부가 ‘굶어 죽지만 말라’는 식으로 급식만 늘리지 노숙인의 자립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2014년 ‘거리 노숙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가 노숙인이 된 이유는 실직 및 사업 실패(41.6%)가 가장 많았다. 이어서 가족 해체(24.2%), 질환 및 장애(11.2%) 등이 뒤를 이었다. 노숙인들은 ‘자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안정적인 일자리(46.4%)를 가장 많이 꼽았지만 수입이 없는 경우가 56.7%, 월평균 수입이 10만 원 이하인 경우가 62.5%에 달했다.
1997년 크리스마스 날,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을 결정했다. 외신은 이 결정을 ‘성탄절의 선물’이라고 불렀지만, 이 선물을 받은 이후 한국 경제는 다시는 그전의 날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2016년, 또 한 번 겨울이 들이닥치고 있다.



주간동아 2015.12.30 1019호 (p44~47)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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