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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백인 대신 소수자가 중심에 서다

2016년 아카데미의 네가필름 같았던 올해 아카데미

백인 대신 소수자가 중심에 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녀주·조연상을 수상한 라미 말렉, 올리비아 콜먼, 리자이나 킹, 마허샬라 알리(왼쪽부터). [AP=뉴시스]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녀주·조연상을 수상한 라미 말렉, 올리비아 콜먼, 리자이나 킹, 마허샬라 알리(왼쪽부터). [AP=뉴시스]

제9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3년 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흑백반전 네가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줬다. 2016년 시상식에선 남녀주연 및 조연배우 수상자는 물론, 후보에도 흑인배우가 한 명도 없었다. 감독상 후보도 물론이다. 그래서 ‘백인만의 잔치’라는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2월 24일(이하 현지시각)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시상식에선 여우주연상만 백인에게 돌아갔다. 영화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에서 앤 여왕을 연기한 영국 출신 여배우 올리비아 콜먼(45)이다. 남녀조연상 수상자는 모두 흑인이었다. 영화 ‘그린 북’에서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역을 맡은 마허샬라 알리(45)와 영화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의 여주인공 티시의 어머니 샤론 역을 맡은 리자이나 킹(48)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라미 말렉(38)은 이집트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콥트교(이집트 자생 기독교)계 아랍인이다. 


알폰소 쿠아론 [AP=뉴시스]

알폰소 쿠아론 [AP=뉴시스]

1970년대 멕시코를 배경으로 원주민 출신 하녀의 삶을 담은 흑백영화 ‘로마’로 감독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58)은 멕시코 출신 감독이다. 2016년 시상식에서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감독상을 받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56)도 멕시코 출신이다. 하지만 2016년 주요 수상자 가운데 이냐리투가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2019년 흑인 수상자 중에는 ‘최초’도 여럿이다. 영화 ‘블랙 팬서’로 의상상을 수상한 루스 E. 카터(59)는 아카데미 시상식 의상상 최초 흑인 수상자가 됐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감독 스파이크 리(62)는 흑인형사가 백인우월주의단체 KKK에 잠입수사한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 ‘블랙클랜스맨’으로 각색상을 공동수상하며 첫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89년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로 각본상 후보에 오른 이후 여러 차례 후보에만 올랐던 리는 2015년 공로상을 받기는 했지만 본상 수상은 처음이다.


생애 첫 수상에 트럼프 저격한 스파이크 리

스파이크 리 [AP=뉴시스]

스파이크 리 [AP=뉴시스]

열렬한 흑인운동가인 리는 몹시 흥분했다. 그는 미리 적어온 노란 메모지를 꺼내 들고 “400년 전인 1619년 2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가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을 상기하며 일장연설을 했다. 비록 이름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2020년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때다. 사랑과 미움 중에서 도덕적 선택을 해야 한다. 똑바로 살자”는 말로 백인우월주의적 언행을 보여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렸다. 이후 초대석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출 때마다 양손에 끼고 나온 ‘HATE’와 ‘LOVE’ 반지를 번갈아 보여주며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인 25일 ‘스파이크 리가 (수상소감을 적은) 노트를 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어떤 대통령보다 흑인들을 위해 힘쓴 당신의 대통령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욕할 거였다면’이라는 트위터 메시지를 날렸다. 그 근거는 ‘역사상 최저 실업수치와 가장 낮은 세금을 가져다 준 대통령’이었다. 최저 실업률과 최저 세율은 팩트도 아니지만 이를 흑인을 위해 가장 힘쓴 대통령과 연결시킨 것도 무리수였다. 

이날 시상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한 것은 리만이 아니었다. 사회자 없이 진행된 이날 시상식에서 첫 시상자로 나선 배우 티나 페이, 마야 루돌프, 에이미 폴러는 “사실관계부터 명확히 해두겠다. 올해 시상식엔 진행자가 없고, 인기 영화상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멕시코 장벽을 위한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려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한 것이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말렉은 “나도 이집트에서 이민 온 가정의 아들”이라고 말해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일격을 가했다. 감독상을 받은 쿠아론은 “내 영화는 세계적으로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7000만 명의 여성노동자 가운데 한 명에게 초점을 맞췄다”며 “예술가로서 우리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며, 이런 책임은 이런 문제에 대해 눈길을 돌리라고 얘기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역시 트럼프 정책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었다. 

사실 이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주요 수상작은 하나같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비판하고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3관왕에 오른 영화 ‘그린 북’의 출연자들. 왼쪽부터 비고 모텐슨, 린다 카델리니, 디미터 마리노프, 그리고 남우조연상을 받은 마허샬라 알리. [AP=뉴시스]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3관왕에 오른 영화 ‘그린 북’의 출연자들. 왼쪽부터 비고 모텐슨, 린다 카델리니, 디미터 마리노프, 그리고 남우조연상을 받은 마허샬라 알리. [AP=뉴시스]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3관왕에 오른 영화 ‘그린 북’은 흑인 피아니스트와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기사가 흑백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를 여행하면서 우정을 쌓게 된 실화를 토대로 했다. 부잣집 백인 마나님과 흑인 남자 기사의 우정을 그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 속 흑인과 백인의 위치를 바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프로농구팀 뉴욕 닉스의 열혈 팬인 리는 이 작품이 작품상을 받게 되자 “(농구경기에서) 심판의 오심 판정을 받은 기분”이었다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자신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가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도 못 올랐던 1989년 작품상 수상작이 바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였기 때문에 생긴 징크스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올해 아카데미상 전체로 시선을 확대해보면 ‘소극(笑劇)’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음악상, 의상상, 미술상을 수상해 3관왕에 오른 ‘블랙 팬서’는 흑인 슈퍼히어로를 내세워 슈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최초로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남우주연상, 음향효과상, 음향편집상, 편집상을 수상해 최다 관왕에 오른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민자이자 성소수자였던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그렸다.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촬영상을 수상한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 중산층 가정을 묵묵히 돌보는 원주민 출신 하녀의 삶을 포착했다.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인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는 다중우주론을 도입해 10대 백인 소년 피터 파커의 영웅담을 흑인과 히스패닉 혼혈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의 이야기로 환치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역시 남성 중심의 역사서사에서 존재감을 상실한 앤 여왕과 주변 여성들의 활약을 다룬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라는 점에서 동일선상의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카데미상의 중심은 이제 사회적 소수자

글렌 클로그, 크리스천 베일, 비고 모텐슨 [AP=뉴시스]

글렌 클로그, 크리스천 베일, 비고 모텐슨 [AP=뉴시스]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투(Me Too)’ 여파로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더 컸다면, 2019년 아카데미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백인 영화인들이 ‘역차별’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오스카상 후보 7수(修)에 만족해야 했던 글렌 클로스(72)와 나란히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고배를 마신 크리스천 베일(45), 비고 모텐슨(61)이 대표적이다.

클로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에 3번, 여우주연상 후보에 4번 올라 도합 7번째 연기상 도전으로 주목받았다.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아내를 연기한 ‘더 와이프’는 골든 글로브와 미국영화배우조합상 등 12개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기에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지만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 베일은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의 삶을 영화화한 ‘바이스’에서 몸무게를 20kg이나 늘리며 완벽하게 변신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멋쟁이 검객 아라곤 역을 맡았던 덴마크계 미국 배우 모텐슨 역시 ‘그린 북’에서 20kg 이상 체중을 늘리고 이탈리아계 이민자 영어발음까지 선보였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주간동아 2019.03.01 1178호 (p70~72)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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