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2

2019.01.11

풋볼 인사이트

첫 끗발 나빠도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아시안컵, 감독 역량과 선수들 제 실력 보려면 시간 걸릴 수도

  • 홍의택 축구칼럼니스트

    releasehong@naver.com

    입력2019-01-14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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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1차전 대한민국과 필리핀 경기에서 황의조가 득점하는 모습. [뉴스1]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1차전 대한민국과 필리핀 경기에서 황의조가 득점하는 모습. [뉴스1]

    실망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59년 묵은 우승의 한을 풀 수 있을까 싶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필리핀을 1-0으로 간신히 잡았다. 승점 3점을 따냈다고는 해도, 여러모로 답답한 경기였다. 선수 개개인이나 팀 전체에 대한 평가도 박할 수밖에. 

    단, 크게 신경 쓸 건 아니라는 얘기도 보태고 싶다. 과거 한 예능프로그램이 떠오른다. 메이저리거였던 어느 선수에게 연예인이 던지는 공을 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당연히 쉬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평소 본인이 상대한 공과는 구질 자체가 달라 리듬을 잃은 탓이었다. 

    수비 일변도로 나선 필리핀도 그랬다. 전력이 떨어지는 팀이라면 응당 쉽게 요리해야 할 것 같지만 익숙한 템포나 피지컬이 아니다 보니 페이스에 말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조별리그 1차전 필리핀, 2차전 키르기스스탄으로는 우승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들을 박살내도 우승 확률이 올라가는 게 아니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에게 패한 뒤 우승까지 차지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조별리그를 쉽게 통과하고 토너먼트에서 허무하게 떨어지는 사례도 숱하다.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더 멀리 내다봐야 한다는 얘기다.

    ‘진짜 벤투 축구’를 확인하고 평가할 무대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동아DB]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동아DB]

    벤투 감독이 지난해 8월 한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 한 말이 있다. “목표는 2019 아시안컵 우승이다.” 

    아시안컵이 유럽에서는 딱히 인정받지 못하는 축구 변방의 축제일지라도, 대륙별 대회인 만큼 비중은 상당하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차출 의무 조항을 삽입해 각 소속팀 선수의 원활한 소집에 공 들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조국 포르투갈을 이끌고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를 경험한 벤투 감독 역시 이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뒤 맞는 첫 메이저대회인 만큼 기회인 동시에 위기다. 부임하고 반년 만에 치르는 대회에서 성적을 내야 계속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A매치 4연속 매진이라는 긍정적 흐름에서 잃을 게 한둘이 아니다. 

    실제 선수단 운영도 그렇게 했다. 벤투 감독은 부임 직후 우루과이, 칠레 등 양질의 스파링 상대와 연달아 격돌했다. 부임 초반 여러 선수를 기용하며 테스트하는 여느 지도자와 달리, 재빨리 일정한 틀을 갖춰 꾸준히 밀었다. 베스트 라인업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게 그 증거. 이 선수 저 선수 넣어 어수선한 상황을 연출하기보다 정해둔 색깔로 균일한 경기력을 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도를 따르려는 벤투 감독의 스타일과 맞물려 담금질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6개월간 주야장천 밀었던 벤투표 ‘지배하는 축구’를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 이를 바탕으로 한 조직이 몇몇 고비를 넘어 마지막까지 나아갈 수 있느냐가 관전 포인트다. 벤투호 1장을 일단락 짓고 평가할 중대 일정임은 분명하다. 

    아시안컵은 당대 최고 유럽리그에 족적을 남긴 차범근과 박지성도 끝내 이루지 못한 숙원이다. 한국의 마지막 아시안컵 우승은 1960년에 멈춰 있다. 이 대회에 얼마나 큰 비중을 뒀느냐 등 시대적 분위기 변화는 감안해야겠지만, 차범근과 박지성 모두 “한이었다”고 털어놓을 만큼 아쉬움이 큰 대회였다. 

    ‘절호의 기회’란 표현이 식상해 보여도 현 대표팀에게는 딱 맞는다. 이탈한 핵심 세력 없이 사실상 완전체를 꾸렸다. 그간 한국 축구를 대표했고 앞으로도 대표할 멤버들이 총출동한 것에 대해 ‘이보다 좋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따른다.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로 대변되는 앞선 세대는 경험이 충만하고, 2018 아시아경기 금메달로 성과를 낸 다음 세대는 패기가 넘친다. 신구 조화에 세대교체 가능성도 담긴 셈이다. 여기에 손흥민이라는 특급 무기까지 존재한다. 단체 스포츠인 축구도 슈퍼스타 한 명에 의해 운명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평가전이나 필리핀과 조별리그 첫 경기는 아쉬웠을지라도, 선수단 전체의 몸 상태가 정상 궤도에 오른다면 분명 더 보여줄 것이 있다.

    59년의 한을 풀어줄, 어쩌면 역대 최강 멤버

    필리핀전 승리 후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는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뉴스1]

    필리핀전 승리 후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는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뉴스1]

    ‘마지막’일 수 있다는 점도 우승 욕구를 끌어올린다. 박지성이 30대 초·중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가장 큰 이유는 무릎에 이상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20대 초·중반부터 유럽에서 생활한 그였다. A매치 데이면 아시아지역 예선 등을 위해 장거리 비행을 감수했고, 결국 그런 무리한 일정이 선수로서 생명을 갉아먹었다. 기성용, 구자철 등도 다르지 않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들은 당초 러시아월드컵을 끝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하려 했다. 벤투 감독과 면담한 뒤 자격을 연장하기로 했지만, 이번 아시안컵이 마지막 메이저대회일 공산이 농후하다. 그만큼 모든 것을 걸고 싸울 터다. 

    2011 카타르 아시안컵은 적잖은 유럽파를 배출했다. 대표적 사례가 구자철.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면서도 득점왕에 올랐던 구자철은 대회 직후 독일 분데스리가 VfL 볼프스부르크와 손잡았다. 계약서에 삽입된 분데스리가 로고를 보고 그렇게 설렜다고. 구자철은 “아시안컵이 내 꿈을 이뤄줬다”고 회상했다. 비슷한 시기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 선덜랜드 AFC로 날아간 지동원 역시 지금까지 유럽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이렇듯 아시안컵은 기회다. 팀 차원에서 우승을 논하는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축구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확실한 교두보다. 

    이제는 다음 세대를 떠올려볼 만하다. 벤투 감독은 그간 아시아경기 등을 관찰하면서 어린 선수를 꽤 많이 불러들였다. 대표팀 첫 발탁은 물론, A매치 데뷔전 기회까지 줬다. 장기적으로는 2022 카타르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축으로 올라설 진주를 캐내야 했다. 본인 입맛에 맞게 조련해 요긴하게 쓰려면 일찌감치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눈여겨볼 이는 아시아경기 우승 멤버 황인범. 독일을 포함해 유럽 유수 클럽들이 달라붙었다는 설이 돌고 있다. 이번 아시안컵만 잘 마무리 짓는다면 더 많은 선택지로 장밋빛 미래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 ‘원샷-원킬’로 각광받던 황의조, 중국 이적설이 났던 김민재 등도 마찬가지다. 경쟁력 있는 무대에서 뛰는 선수가 늘어날수록 한국 축구도 더 강해질 수 있다. 

    1월 7일 시작한 UAE 아시안컵은 다음 달 1일 결승전으로 막을 내린다. 이제 막 조별리그를 시작했거늘, 기성용의 경미한 부상 소식 등으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나상호가 부상으로 낙마했기에 더더욱 신경 쓰였다. 앞으로 겪을 부침도 적잖을 터. 그럼에도 의연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며 열매를 맺는 데 몰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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