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5

2015.12.02

“변화의 열망으로 전진할 수 있다”

민주화 온기 피어오르는 미얀마 취재기…반세기 우민화정책 걷어낼까

  • 양곤=김정안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jkim@donga.com

    입력2015-12-02 18: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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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의 열망으로 전진할 수 있다”

    11월 12일 오전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 도심에 있는 아웅 산 수치 여사 집 앞은 이른 아침 시간부터 취재진과 시민들로 북적였다. 수치 여사가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미얀마 연예계 인사들을 집으로 초청해 감사 인사를 하는 행사 때문이었다. 이들은 집 앞에 도착해 잠시 취재진에게 사진 촬영 포즈를 취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아일보

    30도를 웃도는 날씨는 한국의 여름처럼 덥고 습했다. 11월 12일 오전 9시 반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 도심에 위치한 술레 파고다 근처 바한 지역. 양곤에서 부촌으로 통하는 이곳에 아웅 산 수치 여사의 자택이 있었다. 철제 대문 옆 양 설주에 걸린, 그가 이끄는 정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문패가 낯설지 않다. 53년 만의 군부독재 청산이라는 새 역사를 쓰고 있는 NLD라는 이름을 외신을 통해 익숙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설주 위에는 국기가 게양돼 있고, 대문 위에는 수치 여사의 아버지이자 미얀마 영웅인 아웅 산 장군 사진과 함께 생전 그가 남긴 명언 ‘국민과 나라만을 보고 냉철한 이성으로 전진하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인데도 집 앞은 취재진과 시민 20여 명으로 붐볐다. 한 40대 남성에게 물어보니 “수치 여사가 그동안 여사 자신과 NLD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연예계 인사 250여 명을 초대해 감사 인사를 하는 행사가 오전 10시부터 예정돼 있다”고 했다. 정문 앞에 승용차가 속속 등장하자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미얀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가수, 영화배우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정문 앞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포즈를 취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사 관계자라는 코잉 툰 씨에게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하니 반갑게 웃으며 먼저 말문을 연다. “미얀마 연예계의 90%가 수치 여사와 NLD를 지지한다고 보면 된다. 연예사업 종사자들은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자기들만 잘 먹고 잘살면서 서민을 도외시하는 군부정권을 미워하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대중의 사랑으로 먹고사는 연예인들은 국민 마음을 대변해야 한다.” 그의 들뜬 목소리에서 이번 선거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고스란히 묻어났다.
    “수치 여사가 현실정치 경험이 부족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라고 묻자 “미얀마 지식인들도 그런 걱정을 한다. 하지만 대안이 없지 않은가. 여사의 외유내강 이미지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정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답했다.
    11월 중순 기자가 찾은 미얀마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권력을 독점해온 군부의 자동할당 의석이 25%나 됨에도 야당인 NLD가 상하원 전체의석의 과반을 확보한 것. 단독 집권은 물론 내년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대통령 배출도 확정됐다. 물론 반세기 동안 군림해온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이 순순히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 나서지 않으리라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새 시대를 열 인재도, 경제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걱정도 적잖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미얀마의 대표적 민주투사 민코나잉 씨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전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패가 만들어낸 빈부격차

    “변화의 열망으로 전진할 수 있다”

    양곤 도심 최대 부촌으로 알려진 골든밸리의 고급 주택가(위)와 어린이들이 폐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셔트곤 지역 빈민가. 동아일보

    변화를 원하는 미얀마 국민의 강한 열망은 반세기 동안 이어진 군부독재와 관련 깊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은 우민화(愚民化)정책에 매달렸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은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결과 반독재투쟁도 동력을 잃었다. 미얀마는 그렇게 독재에 길들여져 갔다. 기자가 현장에서 본 ‘미얀마의 민주화’는 영혼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양곤 도심에서 자동차로 40여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셔트곤 지역. 대표적 빈민가인 이곳은 비정규직 청소부 직원과 가족, 고아들이 모여 사는 집단 판자촌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남루한 차림의 어린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이곳에서 시의원에 당선한 니니 씨는 “대부분 고아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서 폐지 줍기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며 “3.3㎡ 남짓한 방에서 7~8명 가족이 사는 집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한 특급호텔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녹색 화초와 하얀 장미로 뒤덮인 이곳은 동화 속 숲을 옮겨놓은 듯했다. 호텔 관계자는 “상류층 커플의 약혼식이 열리는 날”이라고 말했다. 초대된 하객은 200여 명, 식사비용만 5000달러(약 600만 원)였다. 호텔 관계자는 “결혼식 식사비용은 1만8000달러(약 2100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미얀마의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228달러(약 140만 원)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사치였다. 안재용 양곤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관장은 “양곤 도심 서민촌은 집값이 400달러 안팎(약 50만 원)에 불과하지만 부촌인 골든밸리 지역 집값은 최소 100만 달러(약 12억 원)”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극심한 빈부격차의 원인 역시 독재 과정에서 심화한 부패다. 수익이 큰 각종 사업의 허가권을 군부가 독점해 분배하고 뇌물을 받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경제 동력은 상실되고 서민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꿈을 잃었다. 여성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봉제나 청소 같은 단순노동이 대부분이고, 남성에게는 그마저도 기회가 없었다. 기자가 양곤에 머무는 동안 도심 길거리에는 삼삼오오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젊은 남성이 넘쳐났다. 안재용 관장은 “산업 인프라가 갖춰지고 제조업 등에 투자하는 기업이 들어와야 일자리가 생긴다”며 “고위층과 연줄 없이 사업성만 놓고 투자하는 기업이 줄면서 기회를 잃은 나라가 돼버렸다”고 설명했다.
    “변화의 열망으로 전진할 수 있다”

    1988년 양곤대 재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이끌며 민주화에 투신해온 민코나잉 88그룹 대표(오른쪽). 동아일보


    “인문사회계열 신입생은 뽑지 말라”

    “변화의 열망으로 전진할 수 있다”

    미얀마에서 아웅 산 수치 여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사 옆 기념품 가게에서는 수치 여사의 대형 브로마이드까지 팔고 있었다. 동아일보

    11월 17일 방문한 바한 지역의 양곤대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100위 안에 들던 명문대였지만, 50여 년간 군홧발에 짓밟히며 처절하게 무너져 있었다. 잿빛의 2층 본관 앞 정문은 굳게 닫힌 상태. 외국인인 기자는 물론이고 이 대학을 졸업한 현지 안내원도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금이 간 벽면 곳곳엔 이끼와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기자가 놀라워하자 현지 안내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건물만 낙후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양곤대는 1988년 이후 인문사회계열 학부생을 뽑지 않았다. 민주화항쟁에서 지성을 배제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 탓이었다. 이번 총선에서 NLD 후보로 양곤 시의원에 당선한 니니 씨는 지독했던 탄압을 떠올렸다. 그는 “1988년 8월 8일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항쟁(‘8888항쟁’) 이후 군부정권은 전국의 모든 대학을 2년 동안 강제 폐교했다”며 “1996년 학생운동이 또다시 촉발됐을 때도 3년간 모든 대학을 폐교하고 학사 과정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했다. 결과적으로 대학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특히 각 단과대를 여러 곳으로 분산해 학생들의 교류를 차단했다는 것. 본인이나 가족이 민주화투쟁 경력이 있을 경우 학업 기회 자체를 박탈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NLD에 거는 기대는 그래서 더 크다. 양곤 도심에 위치한 다곤대 2학년생 에이 슈웨 진 툰 씨는 “민주화와 함께 2013년부터 양곤대가 다시 학부생을 뽑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라며 “민주화 열기가 대학을 통해 사회 전체로 확대 재생산된다면 파급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17일 오후 방문한 NLD지부 사무실은 양곤 도심 외각 민가가라 거리에 자리해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티 티 민 여사는 이번 총선에서 NLD 후보로 시의원에 당선했다. 그의 아버지 킨 우소 민은 아웅 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뒤 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추앙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은 그의 가족에게 굴레가 됐다. 외출할 때마다 정보원이 따라붙었고, 비밀회동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민 여사는 “아버지의 경력이 문제가 돼 내 아들이 의대에 입학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탄압이 극심한 만큼 열망도 커졌다. 민 여사는 “아웅 산 장군의 유훈인 ‘국가와 나라를 보고 냉철한 이성으로 전진하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며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날까지 간절했던 열망을 품고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NLD 사무실에서 만난 초 뮤 씨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NLD 로고가 적힌 배지나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만으로 경찰에 연행되곤 했다”며 “정세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신중할 수밖에 없지만, 민주화의 온기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NLD의 총선 승리는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니었다. 절망에 익숙해 있던 미얀마 국민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 하나의 상징이었다. 삶 자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1988년 양곤대 재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이끌며 민주화에 투신해온 민코나잉 88그룹 대표는 “미얀마는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건비도 싸기 때문에 정치만 안정되면 외국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민주화의 결실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날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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