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경의 on the stage

밸런타인 신부처럼 처절한 ‘발렌타인 데이’

연극 |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

  • 입력2018-01-23 14: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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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예술의전당]

    [사진 제공·예술의전당]

    러시아 작가 이반 비리파예프(44)의 희곡 ‘발렌타인 데이’가 한국 무대에 올랐다. ‘21세기 러시아 연극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그의 공연에 거는 기대는 크다. 그러나 초콜릿처럼 달콤한 러시아적 낭만을 기대하며 이 연극을 관람한다면 공연 내내 불편할 수 있다. 

    비리파예프의 ‘발렌타인 데이’는 미하일 로신(1933~2010)의 희곡 ‘발렌틴과 발렌티나’에서 영감을 받았다. 1985년 영화로도 제작된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사랑을 쟁취하는 두 젊은이의 해피엔딩 러브스토리다. 하지만 비리파예프는 처연하게 비틀어버린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고대 로마시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밸런타인 신부를 기리는 날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당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는 원정을 떠나는 병사의 결혼을 금지했지만, 사랑에 빠진 병사들을 가엽게 여긴 밸런타인 신부는 몰래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고 주례를 섰다. 그래서일까.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잣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색다른 인간의 사랑을 그린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만난 발렌틴(이명행 분)과 발렌티나(정재은 분)는 이내 불타는 사랑에 빠지지만 가족의 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리고 스무 살 발렌틴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까쨔(이봉련 분)의 농간으로 발렌티나를 포기하고 까쨔와 결혼한다. 서른다섯 살의 어느 날, 건조한 삶을 꾸려가던 발렌틴과 그를 잊지 못한 노처녀 발렌티나는 우연히 재회하고 이내 위험한 사랑을 이어간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세 사람 모두에게 고통스러울 뿐이다. 발렌티나의 마흔 번째 생일, 발렌티나에게 충실하지도 가정을 버리지도 못해 고민하던 발렌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충격으로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한 까쨔는 집과 가재도구를 하나씩 발렌티나에게 팔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인은 동거를 시작했고 오늘은 발렌티나의 60번째 생일이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발렌티나가 기억하는 발렌틴과 추억대로 시공간을 넘나든다. 


    [사진 제공·예술의전당]

    [사진 제공·예술의전당]

    발음하기 어려운 주인공들 이름에서도 감이 오지만, 연극에는 얇은 팬케이크를 겹겹이 쌓아 올린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 러시아식 공동주택, 시베리아 횡단열차, 살얼음이 어는 겨울에도 개장한 모스크바 야외 수영장 등의 오브제가 등장해 비극적 러브스토리에 이국적 색채와 분위기를 불어넣으며 열기를 더한다. 또한 무대 중앙 바닥이 열리며 모든 장치가 서서히 빠지는 무대 구성과 천장에서 내려오는 그네의 몽환적 연출은 이색적이다. 

    환갑이 된 오늘까지 발렌틴의 허상을 쫓으며 사랑의 멍에와 굴레에 갇혀 죽어가는 발렌티나는 이상하게도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관객에게 독백을 선물한다. 



    “갑자기 아름답고 멋진 어느 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원했던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오늘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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