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8

2009.03.24

High Heels, High Power

  • 김민경 holden@donga.com

    입력2009-03-20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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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gh Heels, High Power
    모든 쇼퍼홀릭은 슈어홀릭입니다. 그리고 모든 슈어홀릭은 킬힐(Kill-Heel)에 중독돼 있지요. 킬힐이 아니라면, 구두에서 극적인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아, 킬힐이란 말 그대로 살인적인 높이의 힐을 의미해요. 구두에서 영혼이 들어 있는 곳은 바로 힐이랍니다. 그러니까 높으면 높을수록 영혼도 더 진지하고 무거워진단 얘기죠. 납작한 구두라니, 발바닥에 꿰어 먼지가 묻지 않도록 하는 기능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한때 청담동의 트렌드세터들이 딱 달라붙는 스키니 진에 납작한 플랫슈즈를 신고 다니던 때가 있었죠. 솔직히 말할게요. 아무리 날씬한 몸매에 명품 슈즈와 진을 입었다 해도 전혀 아름답지 않았어요. 아무도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거죠. 허겁지겁 최소한 10cm가 넘는 하이힐로 바꿔 신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니까요. 높이에 한번 중독된 힐은 경쟁적으로 높아집니다. 패션쇼에 나온 모델이 아니라 평범한 직장 여성들이 12~14cm의 킬힐을 신고, 점심시간에 울퉁불퉁한 보도와 횡단보도 위를 날 듯 뛰어서 된장찌개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지요.

    2009년 봄과 여름을 겨냥해 나온 킬힐은 저 같은 하이힐 숭배자가 봐도 충격적입니다. 올 봄과 여름의 신상을 미리 보여주는 지난 밀라노와 파리의 컬렉션에서 런웨이를 걷다 엎어진 모델들을 실어나르는 앰뷸런스로 도시 전체가 소란했단 얘기가 과장이 아님을 직접 확인했으니까요. 섹시한 스틸레토 힐로 유명했던 구찌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높은 구두를 선보였고, 보수적인 페라가모조차 공사장 ‘아시바’ 같은 형태의 킬힐을 내놓았어요. 또 언제나 실험적이고 앞서가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 프라다 구두의 힐은 마치 그림을 그려 넣은 벽화 같기도 하고 길쭉한 몸통의 동물 같기도 해요. 쇼에서 17cm의 매혹적인 킬힐을 선보인 프라다는 매장에 12~14cm에 이르는 킬힐을 선보였는데, 반응은 폭발적이라고 합니다.

    하이힐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많습니다. 사드 후작이 에로티시즘의 등가체로 봤고, 고전적인 페티시즘이며 팜므파탈의 상징이라고 하잖아요.

    High Heels, High Power

    원시성을 주제로 한 프라다의 2009 봄여름 컬렉션입니다. 다양한 뱀피를 화려한 컬러로 매치했죠. 여기에 귀여운 덧신을 겹쳐 신게 한 것이 특징입니다(왼쪽). 여성스런 면을 잘 살린 거죠. 과장된 ‘킬힐’에 내추럴한 옷을 매치하는 것이 이번 시즌 포인트입니다. 킬힐에 거부감을 가진 남성들은 결코 현대 여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겁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 하이힐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 욕망을 자극’하고, 가느다란 스틸레토 힐은 ‘부러질 듯 가녀린 매력을 발휘해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합니다. 한마디로 ‘하이힐은 섹시미를 발산하는 도구요 무기’라는 거죠(‘유혹의 역사’, 잉겔로레 에버펠트). 누가 아니라나요? 하지만 최근 2~3년 사이 하이힐 ‘진화’의 방향은 이와 좀 다르게 가고 있어요. 힐을 가늘게 해서 ‘가녀림’과 ‘보호본능’을 강화한 게 아니라 걸을 때 불편함을 줄이도록 힐은 두꺼워지고, 앞굽도 높아졌거든요.



    이런 ‘육중한’ 구두는 남성들에게 여성적으로 어필하기는커녕 종종 거부감을 줍니다(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보시라). 지금 여성들이 하이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물론 미학적이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높은 굽으로 누구보다 홀로 잘 걸을 수 있어야 한단 거죠.

    킬힐을 신는 많은 여성들은 말합니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한번 내려다본 이상 다시는 힐에서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요. 반(反)페미니즘 오브제로 해석되는 하이힐의 의미는 이렇게 전복될 수도 있답니다. 한 젊은 여성은 제게 이런 얘기를 해주더군요.

    “킬힐, 정말 죽여주죠. 단지 생물학적 남자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남자 동료와 상사의 속알머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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