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만 되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A급 전범의 위패가 있는 수도 도쿄 중심가 지요다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된다. 특히 올해 패전 70주년을 맞아 정부 각료들과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여야 의원 100여 명을 비롯해 평년보다 더 많은 일본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중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숨진 군인과 민간인 등 총 246만여 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1978년 10월 비밀리에 합사한 이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특히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총리들이 재임 당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일, 중·일 간 갈등이 증폭되기도 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이들을 ‘쇼와(昭和)시대 순난자(殉難者)’라고 부른다. 쇼와는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가 재위 기간(1926~1989)에 사용하던 연호다. 순난자란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의로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뜻. 다시 말해 쇼와시대 순난자란 히로히토를 위해 순국한 충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아베 총리는 A급 전범에 대해 “이들은 당시 지도자였기 때문에 편의상 A급이라고 부를 뿐 죄의 경중과는 관계가 없으며, 국내법상으로 이들은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아베 총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극우세력은 지금까지 전범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1952년 ‘전범을 단죄하고 전후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승전국인 연합국들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그럼에도 일본 극우세력이 전범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전범들을 단죄한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다.
바다에 뿌렸다지만 빼돌려진 유골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1948년 11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던 도조 전 총리 등 25명을 A급 전범으로 규정하고 이 가운데 7명에게 사형, 16명에게 종신형, 1명에게 금고 20년, 또 다른 1명에게 금고 7년을 각각 선고했다. 극형이 언도된 전범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총책임자인 도조 전 총리를 비롯해 중국 난징대학살의 주범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육군대장), 모략의 대가로 불린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육군대장), 필리핀에서 포로 학대로 악명 높았던 무토 아키라(武藤章·육군중장),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육군대장), 문민 출신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히로타 고키(廣田弘毅·전 총리), 미얀마 전선에서 잔혹 행위를 일삼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육군대장) 등이 있다.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한 것처럼, 당시 일본을 점령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연합국 사령부는 ‘1948년 12월 23일 이들 7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고 시신을 화장해 유골을 도쿄만 앞바다에 뿌렸다’고 밝혔다. 전범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추모 행위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일본 극우세력은 이들 7명의 묘를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등 ‘숭모(崇慕)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전범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행위인 셈이다. 일본 극우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국이 원유 공급을 차단한 데 따른 자위권 차원에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본다.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 전쟁이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 전범 7명의 유골은 아이치(愛知)현 하즈(幡豆)정 산가네(三ケ根)산 정상에 조성된 ‘순국칠사묘(殉國七士墓)’에 매장돼 있다. 유골이 이곳에 묻힐 수 있었던 건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전 총리의 변호사인 산몬지 쇼헤이(三文字正平)가 화장장 직원을 매수해 몰래 이들의 유골을 빼돌렸기 때문이다. 산몬지는 이들의 유골을 12년간 사찰에 보관해오다 1960년 8월 16일 유족들과 극우성향 재벌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조성한 산가네산 묘소로 이장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의 묘 앞에 세워진 ‘순국칠사묘’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다. 높이 5m 대형 비석의 글씨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직접 쓴 것이다. 기시 전 총리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로, 도조 전 총리 밑에서 군수차관과 상공장관을 지냈다. A급 전범으로 복역하다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된 바 있는 기시 전 총리는 1955년 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거쳐 57년부터 60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는 등 전후 일본 정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극우 정치인으로 꼽힌다. A급 전범 7명의 묘가 조성된다는 말을 듣고 현직 총리 신분으로 이들을 이른바 ‘순국열사’로 칭송하는 휘호를 보낸 것이다.
기시 전 총리는 형무소에 복역할 당시 A급 전범 7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일기에 ‘이 재판은 사실을 왜곡한 일방적 편견에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는 분노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가 옥중 심경을 기술한 ‘단상록’에도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일본의 침략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극우단체 ‘일본회의 간담회’에 참여한 아베
A급 전범의 묘지는 미카와(三河)만이 내려다보이는 산가네산의 명당에 자리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산가네산은 일본 본토라 할 수 있는 혼슈(本州)의 한가운데 있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세력은 “7명의 영웅이 일본 정중앙에 자리 잡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동안 은밀하게 이 묘소를 참배하거나 제사를 지내온 이들은 묘역을 영구화하고자 2010년 ‘순국칠사 봉찬회(奉贊會)’라는 사단법인까지 만들었다. 그 과정에는 극우단체 ‘일본회의(日本會義)’의 강력한 후원이 있었다.
일본회의는 개헌과 핵무장을 주장하는 극우인사들이 결집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신도(神道)계 종교단체들의 모임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1997년 5월 결성한 단체다. 정재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 인사가 참여하는 이 단체는 일본의 ‘극우 대본영(大本營)’이라고도 부른다. 이 단체와 뜻을 같이하는 여야 의원들이 국회 안에 만든 조직이 바로 ‘일본회의 간담회’로, 이 모임에는 아베 정부의 전체 각료 19명 가운데 15명이 참여하고 있다. 아베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리는 일본회의 간담회 특별 최고고문을 맡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과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부회장이다. 나치 전범들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고 반성하는 독일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전범 7명의 묘역 주변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장병들의 위령비 100여 개도 세워져 있다. 심지어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오시마 히로시(大島浩·1886~1975) 전 독일주재 대사는 ‘언제쯤 이들 충의의 영혼을 편안히 해줄 수 있을까’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을 이 묘역에 세웠다. ‘순국칠사묘’가 일본 극우세력의 성지가 된 셈이다. 앞으로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면 A급 전범들의 위패만 있는 야스쿠니 신사보다 유골이 묻혀 있는 ‘순국칠사묘’가 진짜 성지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를 일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중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숨진 군인과 민간인 등 총 246만여 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1978년 10월 비밀리에 합사한 이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특히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총리들이 재임 당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일, 중·일 간 갈등이 증폭되기도 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이들을 ‘쇼와(昭和)시대 순난자(殉難者)’라고 부른다. 쇼와는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가 재위 기간(1926~1989)에 사용하던 연호다. 순난자란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의로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뜻. 다시 말해 쇼와시대 순난자란 히로히토를 위해 순국한 충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아베 총리는 A급 전범에 대해 “이들은 당시 지도자였기 때문에 편의상 A급이라고 부를 뿐 죄의 경중과는 관계가 없으며, 국내법상으로 이들은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아베 총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극우세력은 지금까지 전범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1952년 ‘전범을 단죄하고 전후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승전국인 연합국들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그럼에도 일본 극우세력이 전범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전범들을 단죄한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다.
바다에 뿌렸다지만 빼돌려진 유골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1948년 11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던 도조 전 총리 등 25명을 A급 전범으로 규정하고 이 가운데 7명에게 사형, 16명에게 종신형, 1명에게 금고 20년, 또 다른 1명에게 금고 7년을 각각 선고했다. 극형이 언도된 전범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총책임자인 도조 전 총리를 비롯해 중국 난징대학살의 주범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육군대장), 모략의 대가로 불린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육군대장), 필리핀에서 포로 학대로 악명 높았던 무토 아키라(武藤章·육군중장),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육군대장), 문민 출신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히로타 고키(廣田弘毅·전 총리), 미얀마 전선에서 잔혹 행위를 일삼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육군대장) 등이 있다.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한 것처럼, 당시 일본을 점령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연합국 사령부는 ‘1948년 12월 23일 이들 7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고 시신을 화장해 유골을 도쿄만 앞바다에 뿌렸다’고 밝혔다. 전범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추모 행위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일본 극우세력은 이들 7명의 묘를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등 ‘숭모(崇慕)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전범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행위인 셈이다. 일본 극우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국이 원유 공급을 차단한 데 따른 자위권 차원에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본다.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 전쟁이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 전범 7명의 유골은 아이치(愛知)현 하즈(幡豆)정 산가네(三ケ根)산 정상에 조성된 ‘순국칠사묘(殉國七士墓)’에 매장돼 있다. 유골이 이곳에 묻힐 수 있었던 건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전 총리의 변호사인 산몬지 쇼헤이(三文字正平)가 화장장 직원을 매수해 몰래 이들의 유골을 빼돌렸기 때문이다. 산몬지는 이들의 유골을 12년간 사찰에 보관해오다 1960년 8월 16일 유족들과 극우성향 재벌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조성한 산가네산 묘소로 이장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의 묘 앞에 세워진 ‘순국칠사묘’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다. 높이 5m 대형 비석의 글씨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직접 쓴 것이다. 기시 전 총리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로, 도조 전 총리 밑에서 군수차관과 상공장관을 지냈다. A급 전범으로 복역하다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된 바 있는 기시 전 총리는 1955년 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거쳐 57년부터 60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는 등 전후 일본 정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극우 정치인으로 꼽힌다. A급 전범 7명의 묘가 조성된다는 말을 듣고 현직 총리 신분으로 이들을 이른바 ‘순국열사’로 칭송하는 휘호를 보낸 것이다.
기시 전 총리는 형무소에 복역할 당시 A급 전범 7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일기에 ‘이 재판은 사실을 왜곡한 일방적 편견에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는 분노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가 옥중 심경을 기술한 ‘단상록’에도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일본의 침략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극우단체 ‘일본회의 간담회’에 참여한 아베
A급 전범의 묘지는 미카와(三河)만이 내려다보이는 산가네산의 명당에 자리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산가네산은 일본 본토라 할 수 있는 혼슈(本州)의 한가운데 있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세력은 “7명의 영웅이 일본 정중앙에 자리 잡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동안 은밀하게 이 묘소를 참배하거나 제사를 지내온 이들은 묘역을 영구화하고자 2010년 ‘순국칠사 봉찬회(奉贊會)’라는 사단법인까지 만들었다. 그 과정에는 극우단체 ‘일본회의(日本會義)’의 강력한 후원이 있었다.
일본회의는 개헌과 핵무장을 주장하는 극우인사들이 결집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신도(神道)계 종교단체들의 모임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1997년 5월 결성한 단체다. 정재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 인사가 참여하는 이 단체는 일본의 ‘극우 대본영(大本營)’이라고도 부른다. 이 단체와 뜻을 같이하는 여야 의원들이 국회 안에 만든 조직이 바로 ‘일본회의 간담회’로, 이 모임에는 아베 정부의 전체 각료 19명 가운데 15명이 참여하고 있다. 아베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리는 일본회의 간담회 특별 최고고문을 맡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과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부회장이다. 나치 전범들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고 반성하는 독일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전범 7명의 묘역 주변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장병들의 위령비 100여 개도 세워져 있다. 심지어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오시마 히로시(大島浩·1886~1975) 전 독일주재 대사는 ‘언제쯤 이들 충의의 영혼을 편안히 해줄 수 있을까’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을 이 묘역에 세웠다. ‘순국칠사묘’가 일본 극우세력의 성지가 된 셈이다. 앞으로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면 A급 전범들의 위패만 있는 야스쿠니 신사보다 유골이 묻혀 있는 ‘순국칠사묘’가 진짜 성지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