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표 기업인 미쓰비시(三菱) 그룹 산하의 금속·시멘트 생산업체 미쓰비시 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이 7월 24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동원된 중국 노동자들에게 사죄하고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 인민법원 등에 미쓰비시 머티리얼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한 바 있지만,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그동안 중국 피해자들의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해왔다. 중국 피해자들의 변호인단과 협상할 때도 당당하던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쓰비시 머티리얼 측은 사용자로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심심한 사죄의 뜻을 표하며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 3765명에게 1인당 10만 위안(약 1880만 원)씩을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홋카이도와 규슈 등 옛 미쓰비시광업 소속 12개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이 가운데 722명이 사망했다. 일본 대기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함께 피해 보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앞서 7월 20일 강제노역에 동원된 미국 전쟁포로들에게 사과했고 앞으로 영국, 네덜란드, 호주 전쟁포로들에게도 사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과천선’ 뒤 정치적 노림수
미쓰비시 그룹은 현재 미쓰비시 도쿄 UFJ 은행, 미쓰비시 상사, 미쓰비시 중공업을 비롯해 계열사 28개를 거느리고 있는 일본 재계 서열 2위인 거대 기업군이다. 전체 종업원은 24만여 명. 1870년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넘겨받아 사업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미쓰비시 그룹의 모태가 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나가사키 조선소는 1934년 미쓰비시 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군수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미쓰비시 중공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용을 과시한 세계 최대 전함 무사시호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제로센 전투기를 제작하는 등 일본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은 조선과 중국 등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착취해 돈을 벌었다. 나가사키 조선소의 경우 조선인 4700여 명이 군함을 만드는 데 강제동원됐다 원자폭탄 투하로 이 중 1800여 명이 숨졌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하시마 섬의 해저 탄광인 하시마 탄광에서도 바닷물이 스며들고 유독가스가 유출돼 조선인 94명이 사망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패전 이후 1946년 해체됐으나 64년 재통합했다. 지금도 ‘금요클럽(Friday Club)’이라는 이름으로 미쓰비시 그룹의 주요 계열사 사장단이 매월 정기모임을 갖는다.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 후원금을 내는 등 극우성향을 지금까지 보여왔다.
미쓰비시는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 의해 중국 정부는 물론,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견해와 최고재판소(대법원) 판결에 따라 중국 피해자들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이 때문에 미쓰비시의 느닷없는 ‘개과천선’은 상당한 노림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쓰비시의 태도 변화는 ‘전범 기업’ 이미지를 탈색하는 것이 중국 시장 개척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 정부와 아베 신조 총리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8월 15일 패전 70주년을 맞아 아베 총리가 발표할 담화 내용을 놓고 중국 정부와 물밑에서 의견을 조율해왔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7월 16~18일 자신의 외교 책사인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국장을 베이징에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아베 총리는 9월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의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기를 바라고 있다. 도노무라 마사루 일본 도쿄대 교수는 “미쓰비시가 중국인 피해자들과 화해하기로 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는 일단 미쓰비시의 태도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7월 25일자에 ‘미쓰비시의 사과·보상은 창조적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그동안 가장 강력하게 반일감정을 보여왔던 환구시보가 이런 사설을 게재했다는 것은 시 주석과 공산당 지도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쓰비시의 사과를 계기로 정상회담 개최 등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는 의도다.
미쓰비시의 ‘꼼수’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크게 고통당한 한국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는 사과는 물론, 보상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 미쓰비시는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해 “법적 상황이 다르다”면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에 대한 배상 책임은 소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식민지 시기 조선인 강제징용은 국제노동기구(ILO)가 금지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으며, 한국인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종결됐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11건, 20만 명, 2억 엔
하지만 한일 청구권 협정은 어디까지나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게 중론. 우리나라 대법원이 2012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있었다 해도 개인 청구권까지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결정도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지 중·일 정부 간 합의에 따른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은 모두 11건. 일본 기업들이 재판에서 패소한 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할 경우 우리나라 피해자들이 국내 일본 기업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일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됐다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인은 20만 명에 달하고, 금액은 당시 돈으로 2억 엔으로 추정된다.
벤츠, BMW, 폴크스바겐, 포르셰, 지멘스 등 독일 기업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피해 보상 기금 등에 거액을 기부하고 진심 어린 사죄를 함으로써 전범 기업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났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전범 기업들이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미쓰비시 머티리얼 측은 사용자로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심심한 사죄의 뜻을 표하며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 3765명에게 1인당 10만 위안(약 1880만 원)씩을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홋카이도와 규슈 등 옛 미쓰비시광업 소속 12개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이 가운데 722명이 사망했다. 일본 대기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함께 피해 보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앞서 7월 20일 강제노역에 동원된 미국 전쟁포로들에게 사과했고 앞으로 영국, 네덜란드, 호주 전쟁포로들에게도 사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과천선’ 뒤 정치적 노림수
미쓰비시 그룹은 현재 미쓰비시 도쿄 UFJ 은행, 미쓰비시 상사, 미쓰비시 중공업을 비롯해 계열사 28개를 거느리고 있는 일본 재계 서열 2위인 거대 기업군이다. 전체 종업원은 24만여 명. 1870년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넘겨받아 사업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미쓰비시 그룹의 모태가 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나가사키 조선소는 1934년 미쓰비시 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군수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미쓰비시 중공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용을 과시한 세계 최대 전함 무사시호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제로센 전투기를 제작하는 등 일본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은 조선과 중국 등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착취해 돈을 벌었다. 나가사키 조선소의 경우 조선인 4700여 명이 군함을 만드는 데 강제동원됐다 원자폭탄 투하로 이 중 1800여 명이 숨졌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하시마 섬의 해저 탄광인 하시마 탄광에서도 바닷물이 스며들고 유독가스가 유출돼 조선인 94명이 사망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패전 이후 1946년 해체됐으나 64년 재통합했다. 지금도 ‘금요클럽(Friday Club)’이라는 이름으로 미쓰비시 그룹의 주요 계열사 사장단이 매월 정기모임을 갖는다.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 후원금을 내는 등 극우성향을 지금까지 보여왔다.
미쓰비시는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 의해 중국 정부는 물론,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견해와 최고재판소(대법원) 판결에 따라 중국 피해자들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이 때문에 미쓰비시의 느닷없는 ‘개과천선’은 상당한 노림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쓰비시의 태도 변화는 ‘전범 기업’ 이미지를 탈색하는 것이 중국 시장 개척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 정부와 아베 신조 총리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8월 15일 패전 70주년을 맞아 아베 총리가 발표할 담화 내용을 놓고 중국 정부와 물밑에서 의견을 조율해왔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7월 16~18일 자신의 외교 책사인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국장을 베이징에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아베 총리는 9월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의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기를 바라고 있다. 도노무라 마사루 일본 도쿄대 교수는 “미쓰비시가 중국인 피해자들과 화해하기로 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는 일단 미쓰비시의 태도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7월 25일자에 ‘미쓰비시의 사과·보상은 창조적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그동안 가장 강력하게 반일감정을 보여왔던 환구시보가 이런 사설을 게재했다는 것은 시 주석과 공산당 지도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쓰비시의 사과를 계기로 정상회담 개최 등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는 의도다.
미쓰비시의 ‘꼼수’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크게 고통당한 한국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는 사과는 물론, 보상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 미쓰비시는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해 “법적 상황이 다르다”면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에 대한 배상 책임은 소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식민지 시기 조선인 강제징용은 국제노동기구(ILO)가 금지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으며, 한국인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종결됐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11건, 20만 명, 2억 엔
하지만 한일 청구권 협정은 어디까지나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게 중론. 우리나라 대법원이 2012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있었다 해도 개인 청구권까지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결정도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지 중·일 정부 간 합의에 따른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은 모두 11건. 일본 기업들이 재판에서 패소한 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할 경우 우리나라 피해자들이 국내 일본 기업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일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됐다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인은 20만 명에 달하고, 금액은 당시 돈으로 2억 엔으로 추정된다.
벤츠, BMW, 폴크스바겐, 포르셰, 지멘스 등 독일 기업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피해 보상 기금 등에 거액을 기부하고 진심 어린 사죄를 함으로써 전범 기업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났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전범 기업들이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