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 야간대를 다니던 청년은 1982년 입법·행정고시를 동시에 합격한 후 30여 년 만인 2013년 3월 장관급 직위에 오른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차관, 국무조정실장(장관급) 등 경제 관료가 할 수 있는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관직의 정점을 눈앞에 둔 지난해 7월, 돌연 공무원 생활을 접고 홀연히 공직 무대에서 사라졌다.
‘고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김동연(58·사진) 전 국무조정실장의 이야기다. 그러던 그가 칩거 6개월 만인 2월 공직이 아닌 상아탑의 수장이 돼 돌아왔다. 아주대 15대 총장이 된 것. 4월 6일 봄의 향취가 물씬 묻어나는 경기 수원시 아주대 교정에서 김 총장을 만났다.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는 모습에서 글로벌한 아주대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생이 되는 게 꿈이었던 가난한 젊은이가 대학 수장이 됐으니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 지난해 7월 국무조정실장을 그만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차례 표한 사의가 어렵게 (그때) 수용된 것입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지방에 내려가 외부 활동을 일절 끊고 조용히 지낸 것도 그 때문이죠. 그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년 가까이 경기 양평에서 칩거하다시피 지냈습니다.”
아주대 최초 추천 총장
김 총장은 공직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신과 집사람의 건강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국무조정실장 시절이던 2013년 10월 7일, 지병으로 큰아들을 잃었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발인 날(10월 10일)에도 출근해 그다음 날 발표할 원자력발전소(원전) 비리 종합대책의 문안을 직접 고쳤다. 이후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겪고 그는 극심한 심신의 피로를 느꼈다.
▼ 세월호 참사가 남 일 같지 않았겠습니다.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어른이라 미안했고 공직자라 죄스러웠습니다. 2년여 투병생활 끝에 떠난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죠.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했는지, 그분들 처지에서 더 필요한 것을 헤아려봤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 야인이 된 뒤 정부 정책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좋은 정책’과 ‘성공한 정책’의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정책이라고 다 의도한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죠. 단지 성공한 정책을 만드는 필요조건의 하나일 뿐입니다. 성공할 정책을 만드는 데 훨씬 더 신경 써야 합니다.”
김 총장은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정책학 석·박사를 받고 일찌감치 학계에서도 주목해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이전엔) 학교로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 대학으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즘 청년들이 많이 힘들지 않습니까. 문득 그들의 고민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현장에서 함께 부딪쳐보고 해결책을 찾고 싶었습니다.”
▼ 혹 이전에 아주대와 인연이 있었습니까.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학교법인이나 이사회, 심지어 제대로 아는 교수도 한 분 없었어요. 총장추천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후보로 추천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주대 동문회 모임에 갔더니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왔다는 말씀도 하더군요.”
김 총장은 아주대 사상 처음으로 학교법인 이사와 교수 대표, 동문 대표로 꾸려진 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으로 뽑힌 총장이다. 총장으로 선임된 후 동문회와 교수회의 지지가 잇따랐다고 한다.
소통하는 총장의 ‘유쾌한 반란’
▼ 총장 취임식 때 ‘유쾌한 반란’을 일으키자고 했다는데 무슨 뜻입니까.
“아주대는 짧은 역사 속에서 명문 사학으로 발돋움한 학교입니다. 잠재력과 도약에 대한 열망이 아주 크죠. 제 임무는 모든 구성원이 투지를 불사르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겁니다. ‘유쾌한 반란’이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반란, 자기 자신의 틀을 깨는 반란, 사회에 대한 건전한 반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김 총장은 2015학년도 입학식을 마친 후 신입생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총장으로선 전례 없는 일. 특히 총학생회의 부탁으로 이뤄진 일이라 의미가 크다. 특강 제목은 ‘아주 새내기들의 유쾌한 반란’. 김 총장의 강연 이후 학생들은 총장을 인생 선배이자 허물없는 스승으로 반기는 분위기다. 학부모들도 대환영이다.
▼ ‘브라운백 미팅’이라는 걸 매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학생들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로 2주에 한 번씩 하기로 했는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 매주 하다시피 합니다. 학교 운영에서부터 진로, 취미,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하니 무척들 좋아합니다.”
▼ ‘제2 창학’이란 기치 아래 아주 특별한 학교 발전 계획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백화점식 마스터플랜이 아니라 아주대의 승부구를 찾으려 합니다. 누구나 융·복합 교육, 국제화, 산학협력을 이야기하죠. 제 관심은 다른 학교와 차별화되는 아주대만의 위닝 샷(winning shot)입니다. 학생주도형 융·복합 교육이나 소외계층 학생을 위한 국제화 프로그램 등이 예가 될 수 있겠죠.”
▼ 학생주도형 융·복합 교육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학교나 교수가 제시하는 공급자 위주의 융·복합 교육 틀을 깨는 것입니다.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과목을 결합하는 ‘강의 페어링’을 통해 자신만의 융·복합 전공을 만드는 거죠. 예를 들면 웹툰디렉터가 꿈인 국문학 전공 학생이 국문학 과목과 비주얼 디자인, 스토리텔링 과목에서 배운 특정 내용들을 결합해 자기만의 새로운 연구 주제를 탐구하는 식이죠. 이런 트랙들이 모여 학교 내에 ‘융·복합 생태계’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금년부터 시작하는 2기 ACE(학부교육 선도대학·Advanced of College Education) 육성사업에 이런 내용을 포함할 예정입니다.”
▼ 사회 취약계층 학생을 위한 국제화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사회적 이동과 국제화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죠. 국제 경험을 하기 어려운 취약계층 학생들을 방학 중 해외(미국과 중국) 명문대에 보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동이란 취지에 동감하는 분들로부터 장학금을 모아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려 합니다.”
찢어지는 가난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온 김 총장은 지금 아주대에서 후학들과 함께 ‘유쾌한 반란’을 꿈꾼다. 인터뷰가 있기 이틀 전인 4월 4일에도 대학생 3000명을 대상으로 ‘꿈과 열정, 그리고 자기다움’에 대해 강의했다. 이제 가난하지만 항상 꿈꾸고픈 이 시대 청년들은 아주대의 하늘을 바라봐야 할 듯하다.
‘고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김동연(58·사진) 전 국무조정실장의 이야기다. 그러던 그가 칩거 6개월 만인 2월 공직이 아닌 상아탑의 수장이 돼 돌아왔다. 아주대 15대 총장이 된 것. 4월 6일 봄의 향취가 물씬 묻어나는 경기 수원시 아주대 교정에서 김 총장을 만났다.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는 모습에서 글로벌한 아주대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생이 되는 게 꿈이었던 가난한 젊은이가 대학 수장이 됐으니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 지난해 7월 국무조정실장을 그만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차례 표한 사의가 어렵게 (그때) 수용된 것입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지방에 내려가 외부 활동을 일절 끊고 조용히 지낸 것도 그 때문이죠. 그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년 가까이 경기 양평에서 칩거하다시피 지냈습니다.”
아주대 최초 추천 총장
김 총장은 공직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신과 집사람의 건강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국무조정실장 시절이던 2013년 10월 7일, 지병으로 큰아들을 잃었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발인 날(10월 10일)에도 출근해 그다음 날 발표할 원자력발전소(원전) 비리 종합대책의 문안을 직접 고쳤다. 이후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겪고 그는 극심한 심신의 피로를 느꼈다.
▼ 세월호 참사가 남 일 같지 않았겠습니다.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어른이라 미안했고 공직자라 죄스러웠습니다. 2년여 투병생활 끝에 떠난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죠.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했는지, 그분들 처지에서 더 필요한 것을 헤아려봤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 야인이 된 뒤 정부 정책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좋은 정책’과 ‘성공한 정책’의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정책이라고 다 의도한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죠. 단지 성공한 정책을 만드는 필요조건의 하나일 뿐입니다. 성공할 정책을 만드는 데 훨씬 더 신경 써야 합니다.”
김 총장은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정책학 석·박사를 받고 일찌감치 학계에서도 주목해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이전엔) 학교로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 대학으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즘 청년들이 많이 힘들지 않습니까. 문득 그들의 고민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현장에서 함께 부딪쳐보고 해결책을 찾고 싶었습니다.”
▼ 혹 이전에 아주대와 인연이 있었습니까.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학교법인이나 이사회, 심지어 제대로 아는 교수도 한 분 없었어요. 총장추천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후보로 추천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주대 동문회 모임에 갔더니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왔다는 말씀도 하더군요.”
김 총장은 아주대 사상 처음으로 학교법인 이사와 교수 대표, 동문 대표로 꾸려진 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으로 뽑힌 총장이다. 총장으로 선임된 후 동문회와 교수회의 지지가 잇따랐다고 한다.
경기 양평에 머무를 당시 김동연 아주대총장 부부.
▼ 총장 취임식 때 ‘유쾌한 반란’을 일으키자고 했다는데 무슨 뜻입니까.
“아주대는 짧은 역사 속에서 명문 사학으로 발돋움한 학교입니다. 잠재력과 도약에 대한 열망이 아주 크죠. 제 임무는 모든 구성원이 투지를 불사르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겁니다. ‘유쾌한 반란’이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반란, 자기 자신의 틀을 깨는 반란, 사회에 대한 건전한 반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김 총장은 2015학년도 입학식을 마친 후 신입생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총장으로선 전례 없는 일. 특히 총학생회의 부탁으로 이뤄진 일이라 의미가 크다. 특강 제목은 ‘아주 새내기들의 유쾌한 반란’. 김 총장의 강연 이후 학생들은 총장을 인생 선배이자 허물없는 스승으로 반기는 분위기다. 학부모들도 대환영이다.
▼ ‘브라운백 미팅’이라는 걸 매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학생들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로 2주에 한 번씩 하기로 했는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 매주 하다시피 합니다. 학교 운영에서부터 진로, 취미,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하니 무척들 좋아합니다.”
▼ ‘제2 창학’이란 기치 아래 아주 특별한 학교 발전 계획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백화점식 마스터플랜이 아니라 아주대의 승부구를 찾으려 합니다. 누구나 융·복합 교육, 국제화, 산학협력을 이야기하죠. 제 관심은 다른 학교와 차별화되는 아주대만의 위닝 샷(winning shot)입니다. 학생주도형 융·복합 교육이나 소외계층 학생을 위한 국제화 프로그램 등이 예가 될 수 있겠죠.”
▼ 학생주도형 융·복합 교육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학교나 교수가 제시하는 공급자 위주의 융·복합 교육 틀을 깨는 것입니다.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과목을 결합하는 ‘강의 페어링’을 통해 자신만의 융·복합 전공을 만드는 거죠. 예를 들면 웹툰디렉터가 꿈인 국문학 전공 학생이 국문학 과목과 비주얼 디자인, 스토리텔링 과목에서 배운 특정 내용들을 결합해 자기만의 새로운 연구 주제를 탐구하는 식이죠. 이런 트랙들이 모여 학교 내에 ‘융·복합 생태계’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금년부터 시작하는 2기 ACE(학부교육 선도대학·Advanced of College Education) 육성사업에 이런 내용을 포함할 예정입니다.”
▼ 사회 취약계층 학생을 위한 국제화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사회적 이동과 국제화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죠. 국제 경험을 하기 어려운 취약계층 학생들을 방학 중 해외(미국과 중국) 명문대에 보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동이란 취지에 동감하는 분들로부터 장학금을 모아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려 합니다.”
찢어지는 가난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온 김 총장은 지금 아주대에서 후학들과 함께 ‘유쾌한 반란’을 꿈꾼다. 인터뷰가 있기 이틀 전인 4월 4일에도 대학생 3000명을 대상으로 ‘꿈과 열정, 그리고 자기다움’에 대해 강의했다. 이제 가난하지만 항상 꿈꾸고픈 이 시대 청년들은 아주대의 하늘을 바라봐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