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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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세게, 더 정교하게 한국 여자골프, 적수가 없다

골프대디의 헌신, 두터운 선수층, 엄청난 연습량, 뛰어난 집중력…4박자 갖춰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kisports@naver.com

    입력2015-03-30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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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세게, 더 정교하게 한국 여자골프, 적수가 없다

    3월 23일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와일드파이어 골프클럽에서 막을 내린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JTBC 파운더스컵 시상식에서 김효주가 우승 트로피 앞에 서 있다.

    현재 성적으로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한국 여자골프 대표선수를 선발하면 US오픈 등 메이저대회를 포함해

    8승을 올린 최나연 선수는 탈락한다. 그러나 최나연 선수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 선수였다면 무조건 출전 자격이 주어진다. 국제골프연맹(IGF)은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골프 종목에 남녀 각각 60명씩 출전시키기로 했다. 2016년 7월 11일 당시 세계랭킹 15위 이내 선수는 모두 올림픽 자동출전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4명을 넘길 수 없다.

    3월 30일 현재 여자 프로골프 세계랭킹을 보면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고려대)가 1위, 박인비 2위, 지난주 JTBC 파운더스컵에서 시즌 첫 우승을 올린 김효주가

    4위, 유소연 6위, 양희영 10위 등 한국계 뉴질랜드 선수인 리디아 고를 제외하고도 한국 선수가 4명이나 톱 10에 들어 있다. 따라서 2월 1일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서 2년 2개월 만에 우승한 최나연 선수는 세계랭킹 13위에 올라 있음에도 현재 순위로는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3개 대회 연속 한국에 밀린 루이스



    1년에 30여 차례 치르는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대회에는 매 대회마다 120명이 출전한다. 그 가운데 30명 안팎이 한국 선수이고 리디아 고, 미셀 위 등 한국계 선수까지 포함하면 40명 가까이 된다. 한국 선수나 한국계 선수의 수가 LPGA에서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지만 우승 가능성은 5할에 육박한다. 지난해 박인비(3승), 이미림(2승), 김효주(1승)가 6승을 더해 총 10승을 기록했고 리디아 고(3승), 미셀 위(2승), 크리스티나 김(1승)의 우승까지 더하면 16승에 달한다. 33개 대회에서 16승을 올려 한국계 선수의 우승 확률이 48%에 이른다.

    올해 들어 한국(계) 선수들은 파죽지세를 이어가고 있다.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서 최나연, 퓨어실크 바하마 클래식에서 김세영, ISPS 한다 호주 여자오픈에서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 혼다 LPGA 타일랜드에서 양희영, 3월 초 벌어진 HSBC 위민스 챔피언스에서 박인비, 그리고 지난주 김효주가 6번째 정상에 올랐다. HSBC 위민스 챔피언스 등 5개 대회는 한국 선수가 우승뿐 아니라 준우승까지 모두 휩쓸었다.

    한국 선수들이 우승을 독식하자 어릴 때 척추측만증을 극복해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미국 스테이시 루이스(세계랭킹 3위)가 JTBC 파운더스컵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3월 23일 벌어진 4라운드 17번 홀이 끝난 뒤 루이스는 김효주보다

    1타 뒤져 18번 홀에서 반드시 버디를 잡아야 하는 상황. 김효주는 18번 홀에서 2번째 샷을 홀 옆 3m에 떨어뜨려 버디 기회를 만들었고, 루이스의 2번째 샷은 홀 뒤 6m까지 굴러갔다. 루이스의 버디 퍼트가 홀을 지나쳤고 김효주의 우승이 거의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동반 플레이어는 먼저 홀 아웃을 한 뒤 우승이 확정된 선수에게 마지막 퍼트를 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관례다. 마지막 퍼트로 우승을 확인하고 갤러리의 환호를 마음껏 받게 하려는 배려에서다.

    하지만 루이스는 김효주에게 먼저 퍼트하라고 손짓을 했다. 김효주는 버디 퍼트를 성공해 우승을 확정지었고, 루이스는 김효주의 경기가 끝난 뒤 두 차례나 더 퍼트를 해 보기를 기록, 3타 차로 벌어졌다.

    골프는 많은 스포츠 가운데 자신의 스코어를 자신의 책임하에서 관리하고 기록하는 유일한 스포츠라 ‘신사(숙녀)의 스포츠’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루이스의 이 같은 행동은 비록 3개 대회 연속 한국 선수 때문에 우승컵을 놓쳤다 해도 세계랭킹 1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던 선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한국 여자 골퍼들은 왜 골프를 잘 치는 것일까. 크게 4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골프대디’라 부르는 아버지들의 적극적인 뒷바라지와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나오는 두터운 선수층, 그리고 엄청난 훈련량과 뛰어난 집중력이다.

    길어진 코스에도 한국 선수들 완벽 적응

    더 세게, 더 정교하게 한국 여자골프, 적수가 없다

    1998년 당시 캐디로 나선 박준철 씨가 딸 세리와 함께 퍼팅 선을 신중하게 읽고 있다.

    골프대디의 원조는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 씨다. 그가 박세리의 코치, 매니저, 운전사는 물론 캐디까지 겸하면서 올인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골프계에선 고전(古典)이 됐다. 이후 ‘박세리 키드’라 할 수 있는 지은희(아버지 지영기), 박인비(아버지 박건규) 등 선수 대부분이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에 힘입어 LPGA 무대 정상에 올랐다.

    LPGA의 다른 나라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의 엄청난 훈련량을 보고 이해하지 못했다. “저 정도로 훈련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몸을 너무 혹사하는 것”이라며 비웃었고, 심지어 ‘아동(여성)학대’로 몰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나라 선수들도 한국 선수들에 버금갈 만큼 훈련량을 늘린 상태다.

    한국 선수들의 정신력은 ‘헝그리 정신’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직장(또는 사업)까지 포기하고 자식 뒷바라지에 나선 골프대디 때문에 ‘소녀 가장’의 심정으로 한 타 한 타 절박하게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88년 당시로는 꿈의 무대였던 LPGA에서 한국 선수로 처음 우승을 차지했던 고(故) 구옥희를 시작으로 고우순,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안시현, 장정, 신지애, 지은희, 최나연, 박인비, 김효주 등 세계 정상급 선수가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일이 잘 풀리려면 ‘큰 말이 나가면 작은 말이 큰 말 노릇을 한다’는데, 한국 여자골프는 큰 말이 잘 나가지도 않거니와 작은 말들이 큰 말 이상의 몫까지 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 선수들이 LPGA 무대를 평정하다시피 하자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는 외국 선수가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투어 자격을 박탈하는 정책을 들고 나와 파문을 일으켰다. 이때 주요 타깃이 바로 한국 선수들이었다.

    ‘영어 파문’이 실패로 끝나자 완벽한 스윙과 퍼팅 감각은 갖고 있지만 신체적으로 장타자가 드문 한국 선수들은 견제하고자 코스 길이를 조금씩 늘려왔다. 파4 홀에서 드라이버샷을 날린 뒤 7~8번 아이언으로 그린을 공략했던 한국 선수들이 4~5번 아이언을 잡게 된 것. 당연히 공을 그린에 올려놓는다 해도 예전처럼 쉽게 버디를 잡아낼 수 있도록 홀에 가까이 붙이기가 어려워졌다. 2007년 한국 선수들이 4승밖에 올리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선수들도 근력을 키워 롱 코스에 적응했다. 장하나와 김세영의 장타력은 오히려 서양 선수를 능가한다. LPGA는 한국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또 어떤 꼼수를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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