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은 혼자 떠나도, 여럿이 떠나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KTX를 타고 지방에 다녀올 때면 오가는 내내 책을 읽거나 노트북PC로 글을 쓴다. 지금 이 글도 KTX 안에서 쓰고 있다. KTX에서 보내는 시간은 집중이 가장 잘되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릴 시간이 정해져 있어 마치 데드라인을 지키려는 듯 뭘 하든 더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지방에서 업무 의뢰를 받으면 KTX 노선이 있는지 여부가 업무를 수락할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오가는 내내 운전해야 한다면 피곤하기도 하고, 운전하는 동안 아무것도 못하니 시간 낭비이기도 하다. 그래서 KTX 노선이 없는(비행기도 마찬가지) 지역에서의 업무 의뢰는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기차에선 몰입이 참 잘됐다. ‘은하철도 999’를 보고 자란 세대라 그런지 기차에 대한 묘한 판타지도 있었다.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는 설렘 덕에 머리가 단순해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기에도 좋았다. 지금도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을 때는 일부러 노트북PC와 일거리를 싸들고 기차를 탄다. 책상 앞에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안 될 때는 환경을 바꾸는 게 최고다.
일이 잘 안 풀릴 땐 기차를 사무실 삼아
아침에 기차를 타고 서울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는 거다. KTX는 빠르고 안정적이라 뭘 읽거나 쓰더라도 편안하다. 두 시간 반 동안 몰입해 머리를 굴려본다. 부산에 도착하면 곧장 택시를 타고 해운대나 광안리로 간다. 바닷바람부터 쐬어야 ‘지금 내가 부산에 왔구나’ 실감하기 때문이다. 끈끈한 바닷바람과 짠 내를 코끝에 묻히고 모래사장을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당장 일하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면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노트북PC를 펼친다. 놀랍게도 굴러가지 않던 머리가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일을 처리하면 어느덧 배고픔이 몰려오는데, 늦은 점심으로 해운대 한국콘도 근처에 있는 할매복국으로 가 8000원짜리 복지리 한 그릇, 2000원 짜리 콩나물무침 한 접시를 시키면 근사하고 맛있는 한 상이 차려진다. 그리고 유쾌한 포만감을 안고 서울 갈 채비를 한 뒤 부산역으로 향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두 시간 반 동안 또 노트북PC를 펼친다. 기차에서 왕복 5시간, 부산 바닷가 카페에서 3시간, 택시를 타고 이동하거나 밥 먹고 산책하는 데 2시간. 아침 8시에 나서면 저녁 6시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다. 부산에 다녀왔지만 8시간 일한 셈이다.
물론 이 방법은 너무 자주 쓰면 안 된다. 내성이 생겨 환경을 바꾼 데 대한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그리고 반드시 혼자 가야 한다. 나는 트렌드 분석가이기 전에 비즈니스 창의력 연구자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내고,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할 때 일하는 환경이나 공간, 분위기를 바꾸는 건 꽤나 효과적이다. 때론 고독감도 몰입에 효과적이다.
부산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업무의 한 방법으로만 쓰기보다 즐거운 일상의 쉼표로 쓰는 것도 좋다. 책 한 권만 들고 가벼운 몸으로 기차에 몸을 실어 미식투어를 즐겨보자. 돼지국밥과 밀면, 복지리를 필두로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맛보는 각종 회도 좋고, 국제시장 먹자골목에서 비빔당면이나 삶은 감자, 떡볶이를 맛봐도 좋다. 이럴 땐 혼자보다 두세 명이 좋다. 군산이나 안동도 먹거리투어에 좋은 곳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휴식이 단 하루라면,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권하고 싶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편하게 기분을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데 쓰는 돈이라면 꽤나 합리적인 지출이지 않을까.
기차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요즘에는 기차를 타고 전국 주요 재래시장으로 장을 보러 가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빠른 속도 덕에 KTX가 부각돼서 그렇지,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면 작은 역마다 정차해 느리긴 해도 의외의 멋스러움이 있다. 어릴 땐 통일호와 비둘기호도 있었다. 작고 네모반듯한 빳빳한 종이로 된 기차표도 기억나고, 개찰구에서 역무원이 기차표 귀퉁이를 펀치로 뚫어주던 일도 생각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KTX에 몸을 싣고 부산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왼쪽). 국내여행의 고급화를 이끄는 레일크루즈 해랑.
일본 기차여행에서는 ‘에키벤’이라는 기차역 도시락을 빼놓을 수 없다. 기차역마다 특색 있는 도시락 문화를 오랫동안 쌓은 건데, 이런 문화는 조금 부럽다. 국내 기차역에서는 지역 특색을 담은 도시락 메뉴를 찾기 어렵고, 맛에서도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왜 지방자치단체와 코레일(KORAIL)이 손잡고 이런 일을 하지 않는지 늘 아쉽다.
또한 일본에는 수백 만~1000만 원대에 이용할 수 있는 초호화열차 나나츠보시가 있다. 중국에도 수백만 원대의 호화열차가 있으며, 아프리카 11개국을 횡단하는 호화열차 프라이드 아프리카 열차도 있다. 국내에도 사흘간 전국일주 기차여행이 가능한 호화열차 해랑이 운행 중이다. 이런 호화열차는 작은 사치라기보다 큰 사치에 가깝다.
세계 최초의 호화열차는 1883년 운행을 시작한 오리엔트 특급열차다. 유럽대륙 횡단 여행을 위한 열차였고, 부자나 권력자들이 객실을 차지했다. 실제로 전 세계 각종 호화열차에는 황혼 부부가 꽤 많이 탑승한다고 한다. 황혼에 크루즈 여행을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낯선 아프리카에서의 황혼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유럽을 여행할 때도 기차를 빼놓을 수 없다. 고속열차 말고도 나라별 국철을 타는 것도 재미있다. 유레일패스와 야간열차는 추억을 쌓기에 좋다. 과거 아내와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유로스타를 타야 했는데, 너무 여유를 부리며 운전하는 파리의 수다스러운 택시기사 때문에 유로스타 출발 전 가까스로 도착해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내달려 기차에 올라서자마자 바로 출발한 경험이 있다. 간발의 차로 기차를 놓칠 뻔한 것이다.
한 번은 아내와 벨기에 브뤼셀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프랑스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릴에서 기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 내 여행가방을 끌고 내리려는 걸 기막힌 타이밍에 잡은 적도 있다. 느낌이 이상해 가방을 보관한 지점에 갔다 현장을 잡은 것이다. 몇 초만 늦었어도 가방을 도난당할 뻔했다. 물론 지나고 나면 다 이야깃거리고, 추억이다.
누구에게나 기차에 대한 기억이 있다. 기차에 대한 기억이 너무 오래됐다면 가끔씩 기차를 타고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혼자 타도 좋고, 둘이 타도 좋고, 여럿이 타도 좋다. 다 나름의 즐거움을 누릴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쉼표이자 작은 사치로 기차여행, 꽤 괜찮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