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티아테’, 모리츠 폰 슈빈트, 1868년, 종이에 펜, 개인 소장.
그러나 그의 영혼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감수성으로 가득했다. 그 감수성은 스무 살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가곡 ‘실을 잣는 그레첸’과 폭풍우 속에서 병든 아들을 안고 가다 뒤따라온 죽음의 신에게 아들을 빼앗기는 걸작 ‘마왕’을 작곡할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큰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슈베르트는 문학, 그중에서도 괴테, 하이네, 뮐러 등 당대 독일 시인들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이들의 시를 읽을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가락이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결국 슈베르트는 교사를 그만두고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집에서 기식하며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5년이란 짧은 시간에 600곡이 넘는 가곡을 완성했다. 밤과 꿈의 환상, 사랑에 버림받은 젊은 청춘의 탄식이 가득한 낭만적인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 가곡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작품 발표무대를 찾을 길이 없던 슈베르트는 친구 프란츠 폰 슈파운의 집에서 매달 한 번씩 작은 음악회를 연다. 유럽 문화예술의 수도였던 18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아마추어 연주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슈베르트 본인이 피아니스트로 나섰고, 바리톤 미하엘 포글 등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한 새 가곡들을 불렀다.
젊은 예술가가 하나 둘 이 모임에 끼어들었다. 어느새 슈베르트와 친구들의 모임, 즉 ‘슈베르티아테’는 관객 100여 명이 모일 만큼 큰 모임으로 성장했다. 작가 그릴파르처, 화가 슈빈트 등 당시 빈에서 활동하던 여러 장르의 예술가가 슈베르트의 신곡을 듣겠다는 기대로 슈베르티아테를 찾아왔다.
그러나 운명은 슈베르트에게 가혹했다. 막 날개를 펴려던 젊은 음악가는 매독 합병증으로 티푸스에 걸려 서른한 살에 덧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그 후 슈베르티아테 멤버 가운데 한 명이던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1804~1871)는 빈을 떠나 독일 뮌헨으로 이주했다. 바이에른 왕국 국왕 루트비히 1세의 명을 받아 호엔슈방가우 성 벽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한 화가가 된 그는 성공에 따른 명성과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그런 슈빈트가 죽기 3년 전인 1868년 슈베르티아테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슈베르트와 친구들의 모습을 펜화로 그렸다. 두꺼운 안경을 낀 젊은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치고 슈파운, 포글 등 친구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싼 채 음악에 빠져든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벽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은 슈베르트가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카롤린 백작부인이라고 한다. 곁으로 성큼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화가는 젊은 날의 추억을 기록하고픈 충동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슈빈트는 “내 평생 그렸던 그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은 슈베르트에게 그려준 오선지”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살고 간 작곡가는 친구의 애정이 담긴 펜화 속에서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