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개과천선’이 시청률 8.1%로 6월 26일 막을 내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거대 로펌 소속 변호사 ‘김석주’(김명민분)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내용을 담았다. 김명민을 비롯해 박민영, 김상중, 진이한 등이 출연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드라마 속 사건들이 이미 우리가 현실에서 봐왔던 것들을 아주 비슷하게 재연했다는 점이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해 큰 피해를 입은 어민들의 보상을 방해한 로펌의 작태나, 부실 회사채를 국민에게 떠넘기고 돈을 챙긴 후 법정관리로 넘겨 채무를 청산하는 재벌의 행태(동양그룹 사태), 그리고 대형은행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벌인 위험한 파생상품 영업 문제(키코 사태), 또 대형로펌과 결탁한 외세 투기자본이 현금 보유고가 많은 멀쩡한 회사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진로그룹 사태) 등은 우리가 이미 현실에서 겪었던 실제 사건들이다.
8% 시청률로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실 제아무리 드라마 전문가라 해도 이런 금융 문제를 속속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드라마 작가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난점이다. 실제 사건들에 대한 보고서가 존재하지만 이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로 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사실 이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금융 문제는 바로 그 복잡하다는 이유 때문에 선량한 서민의 주머니를 노리고도 저들만의 ‘법망’을 이용해 빠져나가는 길이 된다. 복잡하지 않은 문제였다면 대중이 이를 여론화했을 것이다. 이러한 여론은 대법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잡해서 알려지지 않은(혹은 알 수 없는) 사건은 그렇게 몇몇 법조 전문가에 의해 대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개과천선’이라는 드라마의 가치는 그래서 8% 남짓 되는 시청률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을 소재로 다루는 만큼 일정 부분 시청률을 포기한다 해도 이 사건들이 어떻게 서민과 연관돼 있는지를 끝까지 보여주고자 한 작가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작가는 이 사건들을 세세히 취재하고 조사했을 테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 차영우펌이라는 로펌과 그곳 에이스인 김석주 변호사(김명민 분)의 기억상실을 통한 ‘개과천선’이라는 재미의 지점이다.
국내 법조계를 거의 장악한 차영우펌은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변호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바라보면 그 사회의 투명도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변호사가 인권을 위해 서 있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차영우펌처럼 오로지 자본을 가진 대기업의 편에만 선다면 그 사회는 부패해 썩은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차영우펌의 에이스 김석주 변호사는 그들 편에 섰다가 서민 편으로 돌아섬으로써 변호사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보여주는 인물이다.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의 문제가 결국 능력이 아닌 선택의 문제에 달렸다는 걸 에둘러 말해준다.
‘개과천선’이 그리는 차영우펌은 충격적일 만큼 초국가적이고 초정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니네 차영우펌은 손이 안 닿는 데가 어디야 대체.” 이렇게 묻는 이선희 검사(김서형 분)에게 김석주는 줄줄이 관련 기관을 늘어놓는다.
“청와대, 내각, 법무부, 법원, 검찰청, 국세청,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심지어 법무부 교정국 출신 고위간부들도 영입해오는 거 알지? 회장님들 옥수발해야 하거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이나 대법원 판사 출신을 영입해 전관예우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거의 모든 공공기관에 손을 뻗치고 있는 것. 이러니 사법 정의가 제대로 이뤄질 까닭이 없다. 차영우펌은 국가나 정부를 초월해 자본의 시녀가 된 법조계의 무서움을 보여주고 있다.
MBC 드라마 ‘개과천선’에서 김석주 변호사(오른쪽)가 증인을 매수해 재벌 2세 성폭행 피의자에게 유리한 허위진술을 끌어내는 장면. ‘개과천선’은 “법조계, 재벌, 정치권의 추악한 일면을 개연성 있게 꼬집었다”는 호평과 “디테일에서 현장 취재 부족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이는 방송사의 의지 문제이기도 하다. 의지만 있다면 스케줄이나 편성 정도는 그리 문제될 것도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직접적인 외압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드라마가 건드린 현실의 민감함에 경영진이 불편함을 느꼈으리라는 건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흥미로운 건 결과적으로 이 드라마가 ‘팩션’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만일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현실의 민감한 부분을 끌어온 것이라면 영화제작사는 대대적으로 팩션 부분을 홍보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에서 현실적 사례를 홍보 포인트로 보여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개과천선’은 이 팩션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나 동양그룹 부도, 그리고 키코 사태나 진로그룹 문제 등을 거의 사실 그대로 다룬다는 점은 홍보 측면에서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는 이 부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진정한 변호사로 ‘개과천선’ 기대
그것은 어쩌면 드라마가 가진 현실적 부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라마는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는 일단 궁금증으로 영화를 봐야 얘기도 할 수 있는 장르다. 즉 논란이 있다 해도 모든 마케팅은 영화를 보는 순간 이미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는 생태적으로 제작 과정부터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대기업과 대형은행, 대형로펌의 커넥션을 거의 직접적으로, 그것도 매우 비판적으로 다루는 ‘개과천선’이 팩트를 강조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드라마는 종영했다. 하지만 현실 속 차영우펌과 자본의 결탁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아마도 여전히 진행형일 것이다. 그래도 이 드라마로 그런 현실들을 달리 보게 됐다면 ‘개과천선’은 실로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래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존재하는 변호사가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자본을 변호하는 아이러니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그들이 진정한 변호사의 모습으로 ‘개과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땅에 무수히 많은 김석주 변호사의 개과천선을 기원한다. 또 그것이 만들어낼 더 투명한 우리 사회의 법 정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