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했더니 벽돌이 배달돼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하며 혀를 차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왜 이런 나쁜 사람이 생길까. “거래 당사자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현대 인터넷 기반 사회의 도덕불감증이 문제지” 하면서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요새 젊은 사람은 원래 ‘싸가지’가 없어서 그래”라고 쉽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에게는 이런 문제를 보는 또 다른 눈이 있다.
독자가 중고 휴대전화를 주문하고 인터넷뱅킹으로 필자에게 돈을 송금했다고 하자. 필자는 통장에 들어온 돈만 ‘꿀꺽’하고 휴대전화 대신 벽돌을 보내는 것이 이익이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내 손에 있는데 돈을 벌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가 된다. 돈 벌기가 이처럼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운데 왜 ‘돈 받고 벽돌 보내기’를 하는 사람보다 ‘돈 받고 휴대전화 보내기’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까.
문제를 단순화해 살펴보자. 휴대전화를 사려는 독자가 필자에게 송금하는 바로 그 순간 필자도 독자에게 물건을 부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때 독자는 걱정이 생긴다. “내가 송금했는데 저자가 벽돌을 보내면 어쩌지.” 한편 필자도 마찬가지로 걱정한다. “내가 휴대전화를 발송했는데 주문자가 돈을 안 보내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돈 받고 벽돌 보내는 사람들
이 상황에서 독자와 필자는 각각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독자는 돈을 보내거나 안 보낼 수 있고, 필자는 휴대전화를 부치거나 벽돌을 부칠 수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독자는 필자가 휴대전화를 보내든 벽돌을 보내든 송금을 안 하는 것이 낫고, 필자는 독자가 돈을 주든 말든 벽돌을 부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돈을 안 보내고 필자는 벽돌을 부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문제는 이처럼 거래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상황은 필자나 독자 둘 다 원하던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게, 필자는 돈을 받고 독자는 휴대전화를 받는 행복한 상황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결말은 ‘돈을 안 보내고 휴대전화도 못 받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상황을 게임이론에서는 ‘사회적 딜레마’라고 부른다. 필자가 제시한 ‘휴대전화 거래의 딜레마’는 사실 보통 ‘죄수의 딜레마’라고 부르는 것을 휴대전화 거래에 빗대 얘기한 것이다.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위해 상대방을 믿고 행동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상대방을 배반해 속이려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부르자. 원래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착하다’ ‘나쁘다’처럼 가치 판단이 들어간 표현 대신 각각을 ‘협력자’와 ‘배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착하다’와 ‘나쁘다’로 양자를 구별하기로 한다.
‘휴대전화 거래의 딜레마’에서는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착하게 행동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게임이론의 권위자인 경제학자 최정규 교수의 책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적극 추천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각자에게 이익인데도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왜 착하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또 사람들이 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학자가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같은 사람을 한 번은 ‘등쳐먹을’ 수 있지만 여러 번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독자나 필자가 휴대전화를 사고파는 일을 여러 번 할 것이 확실하다면, 양쪽 다 착하게 행동하는 것(즉 돈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보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만약 나쁘게 행동하면 두 번째부터는 누구도 그와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는 다른 사례도 있다. 여름 휴가철 바닷가에 놀러가면 많은 사람이 바가지요금 때문에 불만을 느낀다. 바닷가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가격은 일반 소매점 가격의 몇 배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스크림에 바가지를 씌워 파는 휴양지 가게 주인이 자기 옆집 사람에게도 바가지를 씌울까. 당연히 아니다. 왜. 장사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람들이 여러 번 거래를 반복하는 상황이나, 지역적으로 가까운 위치라서 다시 만날 개연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유리하다.
요사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온라인 거래 사이트에는 ‘판매자의 신뢰도’에 대한 표시가 있다. 물건을 구매할 때면 누구나 판매자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품을 팔아왔는지, 또 그에게서 물건을 구매한 사람이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덕분에 특정 판매자의 물건을 단 한 번만 구매하는 경우에도, 소비자는 판매자의 ‘평판’을 참고해 안심하고 대금을 보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판매자는 자신의 ‘평판점수’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굳이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착하게 행동한다. 이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평판점수’를 제공하는 건 사람으로 하여금 착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만난 적도 없고,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거래하는 온라인 사이트의 성공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하라고 백날 계몽하는 것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사회뿐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이득이 되는 제도를 고안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까지는 개인 성향이 정해져 있어 착한 사람은 계속 착하게 행동하고, 나쁜 사람은 계속 나쁘게 행동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개인 성향은 고정돼 있지 않고, 주변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한다.
주변에 영향 받는 개인 성향
‘그림1’은 필자가 컴퓨터를 이용해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가는 상황을 구현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죄수의 딜레마’를 진화적 게임이론의 틀 안에서 2차원 평면 위에 그린 것이다. 파란색은 착한 사람, 빨간색은 나쁜 사람으로 보면 된다. 파란색은 서로 뭉쳐 있고 빨간색은 파란색이 모여 있는 영역을 마치 길을 내듯 좁게 관통하는 경향을 띠는 게 보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파란색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한 명의 나쁜 사람이 등장해 주변의 모든 파란색을 ‘등쳐먹어’ 큰 이익을 낸다. 그럼 바로 그다음 순간 나쁜 사람의 주변 이웃이 그의 이익을 부러워하며 자기도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즉, 파란색의 착한 사람 집단은 나쁜 사람 한 사람의 침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당히 불안정한 모임인 것이다.
반대로 사회 전체가 나쁜 사람인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에는 앞 상황과 달리 단 한 명의 착한 사람도 그 사회에 정착할 수 없다. 주변의 나쁜 사람이 이 사람을 모두 속여먹으니 이 사람은 주변보다 이익이 적어지고, 따라서 바로 그다음 순간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되니 말이다. 이처럼 착한 사람은 따로따로는 사회에 정착할 수 없고, 항상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사회 안에서 사람 사이의 협력은 소중한 것이다. 협력을 통해 상호이익의 경험을 갖는 것이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나라 경제 발전에도 중요한 것 같다. 휴대전화를 주문하면 벽돌만 배달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경제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는 아주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있다(‘주간동아’ 932호 ‘이색연구’ 참조). 이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는 보통 사람과는 판이하다. 이들은 아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대통령이 내린 결정 하나하나는 나라 전체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지만, 대통령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요즘은 더욱 그렇다. 이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가 입고 나온 옷이 수많은 시청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천송이가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만 봐도 마찬가지다.
‘그래프1’은 이런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필자가 컴퓨터로 구현한 2차원 가상 사회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사회 전체의 착한 사람 수가 어느 순간 급격히 줄어드는데, 그 시점을 가로축 원점(0)으로 놓고 그래프를 그린 것이다. 이때는 바로 마당발(대통령이든 천송이든)이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착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배반하는 나쁜 사람으로 바뀐 직후다. 당연한 일이다. 마당발이 나쁜 사람이 돼 큰 이익을 얻으면 그를 본받아 엄청난 수의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이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파괴된 사회 전체의 ‘착함의 정도’가 파괴되기 이전 수준까지 복구되는 데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정치인이든 유명 연예인이든, 또는 한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든,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이름이 등장하는 대기업 총수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돼야 하는지, 이 그래프가 어느 정도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높은 도덕성 요구
유명인은 유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이들이 우리 사회 전체가 서로 돕고 사는 협력의 정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사회 전체의 협력관계를 해치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복구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조금씩 ‘협력의 섬’을 넓혀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의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당연히 높은 도덕성을 요구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서 빨리 끌어내려야 한다. 처벌하거나 미워할 것도 없다. 그냥 그 사람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만 줄이면 된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을 원하는가. 안 그래도 순진하고 착한 대부분의 보통 사람에게 통합하라고 목 아프게 외치느니, 영향력은 있지만 부도덕한 자를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편이 낫다. 통합은 지난하지만 파괴는 순간이다. 그리고 사회 통합의 파괴는 우리 같은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부도덕한 그들이 저지른다.
독자가 중고 휴대전화를 주문하고 인터넷뱅킹으로 필자에게 돈을 송금했다고 하자. 필자는 통장에 들어온 돈만 ‘꿀꺽’하고 휴대전화 대신 벽돌을 보내는 것이 이익이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내 손에 있는데 돈을 벌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가 된다. 돈 벌기가 이처럼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운데 왜 ‘돈 받고 벽돌 보내기’를 하는 사람보다 ‘돈 받고 휴대전화 보내기’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까.
문제를 단순화해 살펴보자. 휴대전화를 사려는 독자가 필자에게 송금하는 바로 그 순간 필자도 독자에게 물건을 부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때 독자는 걱정이 생긴다. “내가 송금했는데 저자가 벽돌을 보내면 어쩌지.” 한편 필자도 마찬가지로 걱정한다. “내가 휴대전화를 발송했는데 주문자가 돈을 안 보내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돈 받고 벽돌 보내는 사람들
이 상황에서 독자와 필자는 각각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독자는 돈을 보내거나 안 보낼 수 있고, 필자는 휴대전화를 부치거나 벽돌을 부칠 수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독자는 필자가 휴대전화를 보내든 벽돌을 보내든 송금을 안 하는 것이 낫고, 필자는 독자가 돈을 주든 말든 벽돌을 부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돈을 안 보내고 필자는 벽돌을 부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문제는 이처럼 거래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상황은 필자나 독자 둘 다 원하던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게, 필자는 돈을 받고 독자는 휴대전화를 받는 행복한 상황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결말은 ‘돈을 안 보내고 휴대전화도 못 받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상황을 게임이론에서는 ‘사회적 딜레마’라고 부른다. 필자가 제시한 ‘휴대전화 거래의 딜레마’는 사실 보통 ‘죄수의 딜레마’라고 부르는 것을 휴대전화 거래에 빗대 얘기한 것이다.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위해 상대방을 믿고 행동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상대방을 배반해 속이려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부르자. 원래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착하다’ ‘나쁘다’처럼 가치 판단이 들어간 표현 대신 각각을 ‘협력자’와 ‘배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착하다’와 ‘나쁘다’로 양자를 구별하기로 한다.
‘휴대전화 거래의 딜레마’에서는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착하게 행동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게임이론의 권위자인 경제학자 최정규 교수의 책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적극 추천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각자에게 이익인데도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왜 착하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또 사람들이 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학자가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같은 사람을 한 번은 ‘등쳐먹을’ 수 있지만 여러 번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독자나 필자가 휴대전화를 사고파는 일을 여러 번 할 것이 확실하다면, 양쪽 다 착하게 행동하는 것(즉 돈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보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만약 나쁘게 행동하면 두 번째부터는 누구도 그와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는 다른 사례도 있다. 여름 휴가철 바닷가에 놀러가면 많은 사람이 바가지요금 때문에 불만을 느낀다. 바닷가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가격은 일반 소매점 가격의 몇 배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스크림에 바가지를 씌워 파는 휴양지 가게 주인이 자기 옆집 사람에게도 바가지를 씌울까. 당연히 아니다. 왜. 장사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람들이 여러 번 거래를 반복하는 상황이나, 지역적으로 가까운 위치라서 다시 만날 개연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유리하다.
요사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온라인 거래 사이트에는 ‘판매자의 신뢰도’에 대한 표시가 있다. 물건을 구매할 때면 누구나 판매자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품을 팔아왔는지, 또 그에게서 물건을 구매한 사람이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덕분에 특정 판매자의 물건을 단 한 번만 구매하는 경우에도, 소비자는 판매자의 ‘평판’을 참고해 안심하고 대금을 보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판매자는 자신의 ‘평판점수’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굳이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착하게 행동한다. 이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평판점수’를 제공하는 건 사람으로 하여금 착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만난 적도 없고,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거래하는 온라인 사이트의 성공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하라고 백날 계몽하는 것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사회뿐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이득이 되는 제도를 고안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까지는 개인 성향이 정해져 있어 착한 사람은 계속 착하게 행동하고, 나쁜 사람은 계속 나쁘게 행동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개인 성향은 고정돼 있지 않고, 주변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한다.
주변에 영향 받는 개인 성향
‘그림1’은 필자가 컴퓨터를 이용해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가는 상황을 구현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죄수의 딜레마’를 진화적 게임이론의 틀 안에서 2차원 평면 위에 그린 것이다. 파란색은 착한 사람, 빨간색은 나쁜 사람으로 보면 된다. 파란색은 서로 뭉쳐 있고 빨간색은 파란색이 모여 있는 영역을 마치 길을 내듯 좁게 관통하는 경향을 띠는 게 보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파란색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한 명의 나쁜 사람이 등장해 주변의 모든 파란색을 ‘등쳐먹어’ 큰 이익을 낸다. 그럼 바로 그다음 순간 나쁜 사람의 주변 이웃이 그의 이익을 부러워하며 자기도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즉, 파란색의 착한 사람 집단은 나쁜 사람 한 사람의 침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당히 불안정한 모임인 것이다.
반대로 사회 전체가 나쁜 사람인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에는 앞 상황과 달리 단 한 명의 착한 사람도 그 사회에 정착할 수 없다. 주변의 나쁜 사람이 이 사람을 모두 속여먹으니 이 사람은 주변보다 이익이 적어지고, 따라서 바로 그다음 순간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되니 말이다. 이처럼 착한 사람은 따로따로는 사회에 정착할 수 없고, 항상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사회 안에서 사람 사이의 협력은 소중한 것이다. 협력을 통해 상호이익의 경험을 갖는 것이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나라 경제 발전에도 중요한 것 같다. 휴대전화를 주문하면 벽돌만 배달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경제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는 아주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있다(‘주간동아’ 932호 ‘이색연구’ 참조). 이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는 보통 사람과는 판이하다. 이들은 아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대통령이 내린 결정 하나하나는 나라 전체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지만, 대통령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요즘은 더욱 그렇다. 이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가 입고 나온 옷이 수많은 시청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천송이가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만 봐도 마찬가지다.
‘그래프1’은 이런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필자가 컴퓨터로 구현한 2차원 가상 사회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사회 전체의 착한 사람 수가 어느 순간 급격히 줄어드는데, 그 시점을 가로축 원점(0)으로 놓고 그래프를 그린 것이다. 이때는 바로 마당발(대통령이든 천송이든)이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착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배반하는 나쁜 사람으로 바뀐 직후다. 당연한 일이다. 마당발이 나쁜 사람이 돼 큰 이익을 얻으면 그를 본받아 엄청난 수의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이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파괴된 사회 전체의 ‘착함의 정도’가 파괴되기 이전 수준까지 복구되는 데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정치인이든 유명 연예인이든, 또는 한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든,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이름이 등장하는 대기업 총수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돼야 하는지, 이 그래프가 어느 정도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높은 도덕성 요구
유명인은 유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이들이 우리 사회 전체가 서로 돕고 사는 협력의 정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사회 전체의 협력관계를 해치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복구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조금씩 ‘협력의 섬’을 넓혀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의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당연히 높은 도덕성을 요구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서 빨리 끌어내려야 한다. 처벌하거나 미워할 것도 없다. 그냥 그 사람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만 줄이면 된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을 원하는가. 안 그래도 순진하고 착한 대부분의 보통 사람에게 통합하라고 목 아프게 외치느니, 영향력은 있지만 부도덕한 자를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편이 낫다. 통합은 지난하지만 파괴는 순간이다. 그리고 사회 통합의 파괴는 우리 같은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부도덕한 그들이 저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