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 농구 대통령으로 불렸던 KCC 허재 감독.
‘농구대잔치 세대’는 프로무대에서도 각 팀 주축선수로 활약하며 수많은 팬을 웃고 울렸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농구대잔치 세대’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농구대잔치 세대’가 차례로 현역에서 물러나자 프로농구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잠시 코트를 떠났던 농구대잔치 시절 최고 스타들이 서서히 지도자로서 코트로 돌아오고 있다. 최근에는 한 팀을 책임지는 감독이 된 농구대잔치 출신 스타가 늘어나면서 프로농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모두가 놀란 삼성의 이상민 감독 선임
1972년생 이상민(42)은 연세대 재학 시절부터 엄청난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농구스타다. 미소년같이 가냘픈 몸매와 외모였지만 코트에선 몸을 사리지 않는 저돌적인 플레이와 화려한 패스워크로 여성 팬을 사로잡았다. 90년대 초·중반 각종 TV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을 정도로 당대 최고 스타로 각광받았다. 프로무대에 진출해서도 소속팀을 여러 차례 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그는 9시즌 연속 한국 프로농구 최고 인기선수에 선정됐을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최고의 선수 시절을 보낸 그는 2010년 은퇴하며 잠시 코트와 작별했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2년간 연수하며 잠시 잊혔던 이상민은 2012년 삼성 코치로 컴백했다. 하지만 코치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삼성은 2012~2013시즌 중반까지 하위권에 머물다 힘들게 6강 플레이오프(PO)에 진출해 한숨 돌렸다. 2013~2014시즌에는 부상자가 속출해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보고 8위에 머물렀다. 설상가상으로 김동광 감독이 시즌 도중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4월로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이상민 코치도 애매한 상황을 맞았다.
삼성은 차기 감독을 놓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코치에게 지휘봉을 맡기기로 했다. 베테랑 등 수많은 감독 후보가 있었지만 팀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 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성적을 가장 중요시하는 삼성이 감독 경험이 전무한 이 코치에게 3년간 팀을 맡기기로 한 것은 파격이다. 삼성이 이 감독 선임을 발표하기 사흘 전까지도 대학팀 감독 출신 다른 지도자가 차기 삼성 감독으로 유력하다는 설이 파다했다. 삼성의 결정은 그만큼 전격적이어서 팬은 물론이고 농구 관계자들도 놀랄 일이었다.
한국 프로농구 사령탑은 지난 10년간 1980년대 학번이 주름잡았다. 2013~2014시즌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지휘한 김진 감독은 80학번. 2013~2014시즌 모비스를 챔피언에 올려놓은 유재학 감독을 비롯해 KT 전창진 감독, 오리온스 추일승 감독은 82학번 동기다. KCC 허재 감독과 전자랜드 유도훈 감독은 86학번으로 동갑내기. 강동희(87학번) 전 동부 감독, 이상범(88학번) 전 KGC 감독이 뒤를 이었다. 80년대 학번 사령탑 가운데 추일승, 유도훈 감독을 제외하면 한 차례 이상씩 챔피언결정전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춘 경험이 있다.
최근 프로농구 코트는 스타 출신 감독이 큰 주목을 끌고 있다. 동부 김영만 감독, LG 김진 감독, 모비스 유재학 감독, KT 전창진 감독(왼쪽부터).
특히 이상민 감독이 취임하면서 스타 감독들의 맞대결 카드가 대거 늘어났다. 연세대 시절 선수와 코치로 사제 연을 맺은 ‘이상민-유재학’,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프로까지 라이벌이었던 ‘이상민-허재’, 2002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합작한 ‘이상민-김진’ 등 수많은 얘기가 만들어질 전망이다.
1990년대 학번끼리 맞대결도 뜨거운 관심사다. 연세대 전성 시절 호흡을 맞췄던 ‘이상민-문경은’의 대결은 매 경기마다 수많은 화제를 낳을 것이다. 이 신임 감독은 벌써부터 “(문)경은이 형과 대결도 마찬가지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선수 시절 내 근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안다. 난 경기장에 들어설 때마다 단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감독 대결도 무조건 이겨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스타 출신 감독들의 맞대결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 경기는 열리지 않았지만 선수단 구성부터 외국인 선수 선발과 자유계약선수(FA) 영입까지 엄청난 머리싸움을 해야 한다. 감독끼리 대결은 코트 위에서뿐 아니라 코트 밖에서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프로농구 제2 흥행바람 불어오나
코치에서 새롭게 감독에 선임된 삼성 이상민 감독.
하지만 2013~2014시즌 프로농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대학에서 가능성 있는 신인이 대거 프로에 진출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경희대 삼총사’ 김종규(23·LG), 김민구(23·KCC), 두경민(23·동부)이 좋은 활약을 펼쳐 리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덕분에 LG와 모비스의 2013~2014시즌 챔피언결정전 시청률이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통해 생중계한 챔피언결정전 시청 인원이 사상 최초로 10만 명을 넘기도 했다.
이러한 호재 속에 다음 시즌은 스타 감독 등장으로 팬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컴퓨터 가드’라는 별명처럼 똑똑하게 농구를 했던 이 신임 감독이 과연 어떤 농구를 펼칠지 벌써부터 많은 팬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실업과 프로팀 기아에서 허재, 강동희와 함께 ‘허·동·만’ 트리오로 활약했던 동부 김영만 감독이 새롭게 써나갈 농구 얘기에도 시선이 모아진다. 1990년대 학번 감독들이 짧은 기간에 성공적으로 프로농구 리그에 정착하면 ‘프로농구 감독 90년대 학번 시대’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 문경은, 이상민, 김영만, 이동남 감독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느냐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다.
한국 프로농구 관계자는 “프로농구가 흥행하려면 선수뿐 아니라 감독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만한 역량도 갖춰야 한다”며 “젊은 감독들은 리그에 신선함뿐 아니라 돌풍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