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본이 미국의 경고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한 곳이어서 한국과 중국은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하게 비난한다. 미국 역시 2013년 12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때 “실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힐 정도로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에도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계속 이어진다. 왜일까.
4월 2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8년 만에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일본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최고 우방 지도자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 직전까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했다. 아베 총리는 21일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봄 제사(4월 21~23일)에 공물을 보내 간접 참배했다. 개인 돈으로 공물 비용 5만 엔(약 51만 원)을 냈다. 명의는 ‘내각 총리대신 아베 신조’였다. 공적 신분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정치적 ‘빨간불’ 들어오면 찾아가
한국 외교부는 “과거 식민 침탈 및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보낸 것은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던 아베 총리 자신의 공언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정례 브리핑에서 “일본 지도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는 것은 일본 내각이 역사를 잘못 보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비난했다. 미국도 가세했다. ‘뉴욕타임스’는 ‘아베 총리의 공물 봉납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도쿄 방문을 이틀 앞두고 한국과 중국을 화나게 하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꿈쩍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4월 20일 요미우리TV에 출연해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쓰러진 병사들을 위해 손을 모으고 비는 것은 지도자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아베 총리의 의중을 헤아린 각료와 국회의원이 연이어 참배하고 있다. 일본 초당파 의원연맹 ‘다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의원 147명은 22일 집단으로 참배했다. 보수정당인 자민당뿐 아니라 민주당 같은 야당 인사도 포함돼 있다. 참배 의원 수를 발표하기 시작한 1989년 이래 세 번째로 많은 인원이다.
외교적 논란에도 아베 정권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집착하는 이유는 보수층 지지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신(神)으로 모신다. 현재 신의 수는 246만6000여 명. 이 중 태평양전쟁 전몰자가 213만여 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의 유족은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일반인 생각도 비슷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한국과 중국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도 국민 대부분은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정치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수록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는다. 한국, 중국의 외교 공세에 맞서는 ‘용기 있는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는 것이다.
60~70%대를 오가던 아베 내각 지지율이 최근 50% 밑으로 떨어지며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사히신문’이 4월 19, 20일 벌인 전화 여론조사 결과 아베 내각 지지율은 48%로 한 달 전 조사보다 2%p 하락했다. ‘마이니치신문’이 같은 시기 시행한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6%p 하락한 49%였다. 정치적으로 ‘빨간불’이 들어오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열기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4월 21일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봄 제사에 봉납한 ‘마사카키’(제단 양옆에 세우는 화환 모양 제구)에 ‘내각 총리대신 아베 신조’(왼쪽)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은 ‘참의원 의장 야마자키 마사아키’가 올린 마사카키.
야스쿠니 신사는 또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한다. 신사 안에 들어선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은 그 핵심이다. 유슈칸은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 부른다. 일본은 1941년 말 아시아 침략을 시작하면서 “서양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아전쟁이란 말에는 침략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 전쟁이라는 일본 우익의 시각이 담겨 있다.
A급 전범 14명 합사가 문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 14명을 극비리에 합사한 것도 큰 문제다. 1978년 이 신사는 당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되거나 옥중에서 사망한 전범 14명을 ‘쇼와(昭和) 시대 순난자(殉難者)’라는 이름으로 합사했다. 한국은 이를 집중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크게 보면 ‘A급 전범 분사’와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 건립’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A급 전범 분사와 관련해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 “교리상 A급 전범만 따로 떼어내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부하고 있다.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 건립에 대해선 일본유족회가 결사반대한다. 새 추도시설이 건립돼 총리와 정치 지도자들이 그 시설에 참배하면 자신들의 세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현재 상태에선 ‘야스쿠니 해법’은 없어 보인다. 매년 봄가을 제삿날과 8월 15일 패전기념일마다 한중일은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항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나 공존의식 없이 나 홀로 길을 가는 일본이 빚은 슬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