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장퇴유 보트 선상에서 작업 중인 모네’, 1874년, 캔버스에 유채, 82.5x100.5cm,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명성이라고 했지만 사실 1800년대 후반 마네와 모네는 ‘악명 높은’ 화가들이었다. 마네가 1863년 살롱 낙선전에 내놓은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불손하고 끔찍한 그림”이라는 평을 들었고, 모네가 주도해 결성한 젊은 화가 그룹이 1874년 연 제1회 인상파 전시회는 “말도 뒷발 들고 일어설 만큼 흉측한 그림들(이 모인 전시)”라는 비난만 얻었다.
그나마 마네는 법조인 아버지를 둔 상류 집안 출신이라 생계를 꾸리는 데 문제가 없었다. 반면 모네는 30대 후반까지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모네는 염치불구하고 마네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했다. 후배의 재능을 아끼던 마네는 아무 조건 없이 생활비와 물감 살 돈을 모네에게 부치곤 했다. 1879년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서른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비를 선뜻 보내준 사람도 마네였다.
경제적 도움을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네는 모네의 그림 경향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마네는 다른 인상파 화가와 달리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반면 모네는 폭풍우 속에서 나무 등걸에 이젤을 묶고 그릴 정도로 야외 작업을 고집했다. 한창 프랑스 파리 센 강 풍경을 그리는 데 열중하던 모네는 1873년 작은 보트 하나를 개조해 스튜디오로 사용했다. 이듬해 여름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로 모네를 찾아간 마네는 이 보트 스튜디오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를 발견했다. 배 안에서 그림에 열중하는 후배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아르장퇴유의 보트 선상에서 작업 중인 모네’라는 작은 초상을 그렸다. 마네로서는 드물게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다. 일렁이는 물결을 묘사한 테크닉에서 마네는 주저 없이 모네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한참 후배라 해도 그의 재능은 마네에게 존경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마네가 세상을 떠난 뒤 모네는 마침내 유명해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났다. 모네는 1890년 마네의 화제작인 ‘올랭피아’가 미국 수집가에게 팔리자 이를 되찾아오기 위한 국민운동을 주도했다. 각계각층에서 거둔 모금으로 ‘올랭피아’를 다시 사들인 모네는 “이 그림은 프랑스의 영광이자 기쁨”이라는 편지와 함께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선배의 그림을 되찾는 운동을 주도했던 모네의 인품도 훌륭하지만 더 깊은 울림을 남기는 것은 후배에게 늘 도움을 아끼지 않던 마네의 대인배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아르장퇴유 보트 선상에서 작업 중인 모네’를 볼 때마다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의 우정과 그 우정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새삼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