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사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전직 군 관계자의 말이다. 모두가 염두에 두고 있지만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를테면 ‘불편한 진실’이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은 해외 분쟁에 개입할 때면 언제나 ‘유엔 모자’를 썼고, 이는 한반도 유사시에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작권 논의와 관련해 실제로 중요한 것은 개전 이후 상황이 아니라 이에 대비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평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에 따라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임무 및 위상, 나아가 군 구조와 국방비 배분까지 결정되는 까닭이다. 2003년 이후 10년간 한미 양국의 핵심 현안이던 전작권 문제는 이러한 틀로 봐야 비로소 ‘진짜 그림’이 나온다는 게 오랫동안 지켜봐온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최근 공개된 연합전구사령부 방안 역시 마찬가지다. 6월 1일 국방부는 2015년 12월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현재의 연합사와 유사한 지휘구조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새로 창설하는 연합전구사령부의 사령관은 한국군 합참의장(대장)이 맡고 부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대장)이 맡는다는 것. 양국군이 2개로 분리된 사령부를 각각 운영한다는 당초 방안에서 크게 선회한 셈이다.
새로 구성하는 연합전구사령부는 한국군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고, 수백 명 규모의 미군 측 인원이 이곳에 들어와 함께 근무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과 미군 참모의 비율이 기존 1.5대 1에서 2대 1로 바뀌고, 휘하에 편성하는 5개 연합구성군사령부(육·해·공군, 해병대, 특수전) 가운데 공군을 제외한 나머지 사령부는 모두 한국군 장성이 맡는다. 국방부 측은 “전체 지휘는 한국군이 맡고 미군은 차석 자리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그림은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단하다. 현재 연합사 체제에서 꼭대기 두 자리만 한국군과 미군 장성이 자리를 맞바꾸는 셈이다. 한국군으로서는 연합사 부사령관이라는 대장 자리가 하나 줄어들지만, 합참의장의 업무 과부하를 피하기 위해 합동군사령관 자리를 신설, 연합전구사령관을 겸임케 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 또한 사실상 변화가 없다. 쉽게 말해 연합사 부사령관이 합동군사령관으로 바뀌면서 연합전구사령관을 맡는 게 전작권 전환 이후 발생할 변화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안보공약 자문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따르면, 이러한 그림은 전작권 전환 문제와 관련해 캠프 내부에서 논의했던 세 가지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첫째는 전환 일정 추가 연기, 둘째는 이른바 ‘미니연합사’ 신설, 셋째가 바로 이번에 나온 한미 사령관의 자리 바꾸기였다는 것. 북핵 문제 장기화 등을 이유로 전작권 전환과 연합사 해체를 비판하는 보수층 일각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에 대응하려고 만든 3개의 그림이었던 셈이다.
가장 힘을 얻은 견해는 특정 일자를 못 박지 말고 ‘안보 불안이 큰 진전을 보일 때까지’ 전환 자체를 연기하자는 것이었지만, 국민을 볼 면목이 없다는 ‘자존심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보위기가 닥치면 미국만 쳐다보는 행태를 언제까지나 반복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미 사령관의 자리 바꾸기는 이러한 양측 견해를 조합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전작권 전환은 예정대로 가지만, 사실상 연합사를 존속해 보수층의 불안을 달래고, 연합전구사령관을 한국군이 맡음으로써 자존심도 챙기겠다는 계산이다. 군사적 효율성과 주권론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절충안이라는 게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월 22일 오전 서울 용산 한미연합군사령부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잔마크 조아스 주한미군 부사령관, 성김 주한미국대사,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 사령관, 박근혜 당선인, 권오성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김장수 대통령 국가안보실장, 김병관 국방부 장관 내정자.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판단이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바로 앞서 설명했던 ‘불편한 진실’이다. 전작권 전환 문제는 한국군과 미군이 향후 어떻게 위상과 임무를 조정해나가느냐의 문제라는 점이고, 특히 워싱턴이 과연 지금 같은 수준의 재정적 부담을 계속 지고 갈 생각이 있느냐라는 점이다.
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보자.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가 전작권 전환에 합의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측의 요구 못지않게 미국 측도 이를 적극 환영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련 논의가 공개된 이후 보수층의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힌 노무현 정부는 당초 거론됐던 ‘2009년까지 전환’이라는 일정을 ‘2012년까지’로 미루자고 요청했지만, 오히려 미국 측은 논의했던 일정대로 진행하자고 강하게 주장했다. 리처드 롤리스 당시 미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부차관보는 2009년 전환안을 관철하려고 한국 언론을 이용한 ‘플레이’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측이 전작권 논의에 이렇듯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 역시 돈 문제 때문이었다. 중동에서 전쟁 2개를 동시에 수행하던 워싱턴으로서는 주한미군처럼 ‘운영비가 비싼’ 전력을 유지하기 버거웠고, 따라서 “한국의 방어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언급을 반복하면서 한국 측의 임무 증대를 요구했던 것. 쏟아져 나왔던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특히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국방부 장관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던 군사혁신(RMA) 프로젝트는 주한미군 2사단 같은 둔중한 지상전력 대신 전 세계 어디라도 날아갈 수 있는 ‘날렵하고 슬림한 군대’를 목표로 했고, 따라서 현재의 주한미군 구조는 개혁 대상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최근 논의를 둘러싸고도 질문은 하나로 요약된다. 현재의 연합방위체계를 사실상 유지하는 연합전구사령부 방안은 미국 측의 군사적 기여나 주한미군의 규모 및 위상도 현재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과연 미 국방부나 백악관의 기본 견해가 변한 것일까. 강도 높은 해외 주둔 미군 개혁을 추진했던 럼즈펠드나 2010년 ‘포린 어페어스’ 기고를 통해 ‘기존의 방식 이외의 대안’을 외쳤던 로버트 게이츠 등 전임자들과 달리, 공화당 출신의 척 헤이글 국방부 장관은 이전의 시스템을 유지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억해둬야 할 것은 한국 국방부가 공개한 연합전구사령부 방안이 양국 합참의 잠정합의안일 뿐 미 국방부의 최종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4월 정승조 합참의장과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이 원격화상회의로 진행한 군사위원회(MCM)에서 합의가 이뤄진 직후 한국 국방부는 5월 말까지 엠바고를 걸고 언론을 상대로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가진 바 있다. 5월 초 한미 정상회담과 6월 초 양국 국방부 장관 회담을 거쳐 확정한 뒤 공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는 이 문제를 에둘러 언급하는 데 그쳤고,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헤이글 장관이 만난 6월 1일 싱가포르 회담에서도 최종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양국은 ‘추가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승인 시점을 10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로 미룬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측이 이 방안을 공개한 후에도 미 국방부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 측 일부 당국자 사이에서는 “합의가 끝나지 않았는데 공개한 것은 일종의 ‘공 넘기기’”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펜타곤이나 백악관 처지에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 남아 있음에도 합참 사이의 잠정합의를 근거로 공론화한 데 대한 불만 어린 시선이다.
사실 미국 내에서도 전작권 문제에 대해 주한미군·합참과 국방부 사이에 적잖은 이견이 있음은 이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 지휘관 처지에서는 연합사 체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군사적·제도적 이점을 선뜻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 전 세계를 통틀어 재래식 전쟁교리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한 주한미군 체제는 당초 논의했던 2개의 별도 사령부 운영 방안이 현실화하면 그 위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새로 나온 연합전구사령부 방안은 이러한 우려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겐 매력적이다.
다시, 선택의 기로
3월 15일 서울 용산 한미연합군사령부 기지 내 연합전투모의 훈련센터에서 한미 연합군사연습인 ‘키리졸브’에 참여한 양국군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한민국 방어 및 군사작전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당장 근무자들의 순환 무급휴가 일정을 짜야 하는 합참과 주한미군으로서는 이러한 백악관의 공언을 빌미 삼아 현재의 예산이나 병력 수준을 유지해달라고 요구하려 한다는 게 미국 측 인사들의 전언이다. 4월 뎀프시 합참의장이 사실상의 연합사 유지에 동의한 것 역시 이를 노린 카드일 수 있다는 것. 워싱턴을 향해 “아시아는 유지하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압박카드를 던진 모양새다. 물론 미국 측 시각으로 보자면 한국 역시 마찬가지 압박을 백악관에 가하는 셈이 된다.
국내 언론은 대부분 미 국방부가 “미군이 다른 군대의 지휘를 받는다는 그림 자체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지만, 이처럼 미국 측 인사들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문제는 미국 측의 예산과 병력을 연합사 체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옳은가 하는 것이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 후 누가 누구를 지휘하느냐는 부차적인 쟁점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당장은 한국 측과 미 합참이 함께 워싱턴을 압박하는 모양새지만 앞으로는 그림이 사뭇 달라지리라는 점이다. 미 국방부가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한국 측에게 부담하라고 요구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10월 SCM까지 논의하게 될 ‘추가적인 보완’이란 바로 돈 문제라는 것. 이렇게 되면 백악관으로서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필요한 재정의 상당 부분을 한국에서 끌어낼 수 있고, 합참이나 주한미군으로서는 예산 압박을 피해 현재의 위상과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만하다. 펜타곤이 최종 합의를 미루는 속내는 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경우 우리에게 남는 쟁점은 하나다. 한국 국방예산의 상당 부분을 방위비분담금 증액분으로 미국 측에 제공하고 연합사 체제를 사실상 유지하는 게 옳으냐, 아니면 당초 계획대로 미국 측 기여가 줄어드는 불안을 감수하는 대신 이를 한국군에 투자해 독자 능력을 키워나가는 게 맞느냐다. 전쟁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준비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군의 형태와 미래를 결정한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한국군의 미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 미국에만 매달릴 것이냐”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