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중략)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중략)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조지훈은 시 ‘승무’에서 춤인 동시에 수행이자 예불인 승무(僧舞)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묘선(56)의 춤이 바로 이렇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전수교육조교(준인간문화재)인 그는 일본 오사카 시코쿠 섬의 대일사와 그 부속 사찰 국중사 주지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 5시부터 3시간씩 불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독경을 한 뒤 비로소 춤을 춘다. 승려이면서 승무 춤꾼인 이는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다.
승무 전수교육조교에 선발
없는 길이니, 애초 이런 삶을 꿈꿨을 리 없다. 김씨는 어린 시절 그저 춤이 좋았다고 했다.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의 제자가 됐고, 동아국악콩쿠르 전통무용 부문 금상,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등을 받으며 이름을 얻었다. 그때 사랑이 찾아왔다. 1995년 공연 차 시코쿠 섬의 한 절을 찾았을 때다. 그의 고아한 춤사위에 반한 주지가 결혼을 청해왔다.
“일본 승려는 결혼할 수 있고, 자식도 낳을 수 있어요.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저와 제 춤을 깊이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부부의 연을 맺은 후 오구리 고에이 주지는 정말 김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일본 곳곳에서 공연을 열 수 있게 주선했고, 늘 가장 앞자리에 앉아 그를 격려했다. 김씨는 2005년 승무 전수교육조교로 선발되며 이에 화답했다.
전수교육조교는 인간문화재 문하에서 전수자와 이수자 과정을 거친 이 가운데 문화재청이 후계자로 인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 우리나라에서 승무 전수교육조교는 김씨를 포함해 3명이다. 현재 승무 인간문화재인 이매방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 문화재청은 전수교육조교 중 한 명을 다음 인간문화재로 선발하게 된다. 외국에 살면서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은 김씨가 처음이다. 그는 “남편이 계속 춤꾼 인생을 이어가기를 원해 결혼 후에도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고 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 오구리 고에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한 달 만에 타계한 것. 열 살 아들과 김씨만 덩그러니 세상에 남았다. 깊은 슬픔과 더불어 해결해야 할 갖가지 문제가 그의 앞에 쏟아졌다. 특히 남편이 주지로 있던 1200년 역사의 고찰을 어찌할지 정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절이 가업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상속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어요. 당장 친척들과 절 관계자가 이 절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게 느껴졌지요.”
그럴 법도 한 것이 대일사는 예사 절이 아니다. 김씨는 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88개소’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고승(高僧) 홍법대사가 9세기 무렵 순례한 일본 시코쿠 섬 88개 절을 가리키는 ‘88개소’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난 문화 여행지다. 매년 참배객 수십만 명이 홍법대사를 기리며 이 길을 따라 걷는다. 대일사는 약 1400km에 이르는 순례길에서 13번째 만나게 되는 절로, 역사·문화적 의의가 클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안정돼 있다.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긴다면, 영영 되찾아올 수 없게 될 공산이 컸다.
“그때 아들이 ‘훌륭한 주지가 되고 싶다’며 ‘엄마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자신이 자랄 때까지만 절을 맡아 운영해준다면, 뒤를 이어 아버지 못지않은 스님이 되겠다고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먼저 승려가 돼야 했다. 김씨는 “그전까지 나는 초(超)종교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승무를 췄지만 진정한 춤꾼이 되려면 초국가, 초종교, 나아가 초인간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남편의 노력과 추억이 서린 공간을 지키려고 그는 불문(佛門)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는 시험을 통과하면 승려, 주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김씨는 남편이 득도한 일본 교토 대각사를 찾아 승려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경전을 외운 끝에 그해 말 시험을 통과한 뒤 바로 주지시험에도 도전해 반 년 만에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2008년 5월 일이다.
“한일 문화교류 가교 구실 하고파”
그러나 아직 기뻐하긴 일렀다. ‘주위의 인정’이라는 마지막 시험이 남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일본에서 절은 마을 제사를 책임지고 혼례·장례 등 경조사를 주관한다. 여성이면서 외국인인 내가 주지가 되는 걸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일 리 없었다”고 했다. 그는 절의 주지 선출 권한을 가진 ‘총대’ 20명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마침내 남편이 주지로 있던 대일사와 국중사 두 절의 주지로 취임했다. 선거 결과는 찬성 19, 반대 1로 압도적이었다.
“주지로 취임하던 날, 이매방 선생님과 사모님이 일본으로 저를 보러 오셨어요. 선생님께서 ‘나는 평생 춤을 췄지만 스님은 못 돼봤다. 너는 스님이 됐으니 이전과는 다른 춤을 출 수 있겠구나’라며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스승의 말은 옳았다. 김씨는 “정말 승려가 된 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 했다. 춤이 곧 공양이자 예불이 되면서 그의 몸놀림은 한층 더 깊이 있고 아름다워졌다. 지금 김씨는 법당에서, 신도들 앞에서 춤을 춘다. 승무의 전통이 없는 일본에서 ‘주지의 춤’은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만 다행히 호의적인 시선이 많다고 한다.
NHK 등 여러 방송사가 그의 남다른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면서 ‘일본 최초이자 유일의 외국인 여성 주지’인 김씨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는 “3월 에세이집 ‘참는 끝에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원제 がまんの先には、いいことが待っている)’를 냈는데 초판이 금세 매진돼 2쇄를 찍었다”고 했다. 그를 보려고 절을 찾아오는 이가 늘면서 신도들도 그를 ‘대일사의 보물’로 여기는 눈치다.
김씨의 목표는 이런 관심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한국 춤과 문화를 알리는 데 더욱 앞장서는 것. 특히 내년 1년간 시코쿠 섬의 ‘88개소’ 법당에서 승무를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그는 이것이 한국 춤꾼으로서 일본 절의 주지가 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절대로 귀화하지 말고 꼭 문화재가 되라는 남편의 유언이 있긴 했지만, 문화재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있는 곳에서 우리 전통무용의 세계화를 위해 춤추고 가르치는 것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남편 생전에는 한국무용가로서 일본에 한국전통무용의 뿌리를 심겠다는 목표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일본 승려로서 춤을 통해 한일 문화교류의 가교 구실을 하고 싶습니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중략)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조지훈은 시 ‘승무’에서 춤인 동시에 수행이자 예불인 승무(僧舞)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묘선(56)의 춤이 바로 이렇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전수교육조교(준인간문화재)인 그는 일본 오사카 시코쿠 섬의 대일사와 그 부속 사찰 국중사 주지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 5시부터 3시간씩 불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독경을 한 뒤 비로소 춤을 춘다. 승려이면서 승무 춤꾼인 이는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다.
승무 전수교육조교에 선발
없는 길이니, 애초 이런 삶을 꿈꿨을 리 없다. 김씨는 어린 시절 그저 춤이 좋았다고 했다.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의 제자가 됐고, 동아국악콩쿠르 전통무용 부문 금상,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등을 받으며 이름을 얻었다. 그때 사랑이 찾아왔다. 1995년 공연 차 시코쿠 섬의 한 절을 찾았을 때다. 그의 고아한 춤사위에 반한 주지가 결혼을 청해왔다.
“일본 승려는 결혼할 수 있고, 자식도 낳을 수 있어요.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저와 제 춤을 깊이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부부의 연을 맺은 후 오구리 고에이 주지는 정말 김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일본 곳곳에서 공연을 열 수 있게 주선했고, 늘 가장 앞자리에 앉아 그를 격려했다. 김씨는 2005년 승무 전수교육조교로 선발되며 이에 화답했다.
전수교육조교는 인간문화재 문하에서 전수자와 이수자 과정을 거친 이 가운데 문화재청이 후계자로 인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 우리나라에서 승무 전수교육조교는 김씨를 포함해 3명이다. 현재 승무 인간문화재인 이매방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 문화재청은 전수교육조교 중 한 명을 다음 인간문화재로 선발하게 된다. 외국에 살면서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은 김씨가 처음이다. 그는 “남편이 계속 춤꾼 인생을 이어가기를 원해 결혼 후에도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고 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 오구리 고에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한 달 만에 타계한 것. 열 살 아들과 김씨만 덩그러니 세상에 남았다. 깊은 슬픔과 더불어 해결해야 할 갖가지 문제가 그의 앞에 쏟아졌다. 특히 남편이 주지로 있던 1200년 역사의 고찰을 어찌할지 정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절이 가업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상속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어요. 당장 친척들과 절 관계자가 이 절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게 느껴졌지요.”
그럴 법도 한 것이 대일사는 예사 절이 아니다. 김씨는 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88개소’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고승(高僧) 홍법대사가 9세기 무렵 순례한 일본 시코쿠 섬 88개 절을 가리키는 ‘88개소’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난 문화 여행지다. 매년 참배객 수십만 명이 홍법대사를 기리며 이 길을 따라 걷는다. 대일사는 약 1400km에 이르는 순례길에서 13번째 만나게 되는 절로, 역사·문화적 의의가 클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안정돼 있다.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긴다면, 영영 되찾아올 수 없게 될 공산이 컸다.
“그때 아들이 ‘훌륭한 주지가 되고 싶다’며 ‘엄마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자신이 자랄 때까지만 절을 맡아 운영해준다면, 뒤를 이어 아버지 못지않은 스님이 되겠다고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먼저 승려가 돼야 했다. 김씨는 “그전까지 나는 초(超)종교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승무를 췄지만 진정한 춤꾼이 되려면 초국가, 초종교, 나아가 초인간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남편의 노력과 추억이 서린 공간을 지키려고 그는 불문(佛門)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는 시험을 통과하면 승려, 주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김씨는 남편이 득도한 일본 교토 대각사를 찾아 승려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경전을 외운 끝에 그해 말 시험을 통과한 뒤 바로 주지시험에도 도전해 반 년 만에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2008년 5월 일이다.
김묘선 씨는 한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4월 일본 도쿠시마현 문화친선대사에 임명됐고(왼쪽), 6월 3일엔 표창장을 받았다. 그는 시상식장에 고운 한복 차림으로 참석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아직 기뻐하긴 일렀다. ‘주위의 인정’이라는 마지막 시험이 남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일본에서 절은 마을 제사를 책임지고 혼례·장례 등 경조사를 주관한다. 여성이면서 외국인인 내가 주지가 되는 걸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일 리 없었다”고 했다. 그는 절의 주지 선출 권한을 가진 ‘총대’ 20명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마침내 남편이 주지로 있던 대일사와 국중사 두 절의 주지로 취임했다. 선거 결과는 찬성 19, 반대 1로 압도적이었다.
“주지로 취임하던 날, 이매방 선생님과 사모님이 일본으로 저를 보러 오셨어요. 선생님께서 ‘나는 평생 춤을 췄지만 스님은 못 돼봤다. 너는 스님이 됐으니 이전과는 다른 춤을 출 수 있겠구나’라며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스승의 말은 옳았다. 김씨는 “정말 승려가 된 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 했다. 춤이 곧 공양이자 예불이 되면서 그의 몸놀림은 한층 더 깊이 있고 아름다워졌다. 지금 김씨는 법당에서, 신도들 앞에서 춤을 춘다. 승무의 전통이 없는 일본에서 ‘주지의 춤’은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만 다행히 호의적인 시선이 많다고 한다.
NHK 등 여러 방송사가 그의 남다른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면서 ‘일본 최초이자 유일의 외국인 여성 주지’인 김씨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는 “3월 에세이집 ‘참는 끝에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원제 がまんの先には、いいことが待っている)’를 냈는데 초판이 금세 매진돼 2쇄를 찍었다”고 했다. 그를 보려고 절을 찾아오는 이가 늘면서 신도들도 그를 ‘대일사의 보물’로 여기는 눈치다.
김씨의 목표는 이런 관심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한국 춤과 문화를 알리는 데 더욱 앞장서는 것. 특히 내년 1년간 시코쿠 섬의 ‘88개소’ 법당에서 승무를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그는 이것이 한국 춤꾼으로서 일본 절의 주지가 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절대로 귀화하지 말고 꼭 문화재가 되라는 남편의 유언이 있긴 했지만, 문화재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있는 곳에서 우리 전통무용의 세계화를 위해 춤추고 가르치는 것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남편 생전에는 한국무용가로서 일본에 한국전통무용의 뿌리를 심겠다는 목표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일본 승려로서 춤을 통해 한일 문화교류의 가교 구실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