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 29일 ‘조선중앙통신’은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이날 0시가 넘은 시간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군 최고수뇌부를 긴급 소집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진에는 현영철 인민군 총참모장, 이영길 총참모부 작전국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겸 부총참모장, 김락겸 전략로케트군 사령관이 김 제1비서 뒤에 서서 작전문서를 검토하는 장면이 담겼다. 김정은이 심야에 최고사령부 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북한 매체가 곧바로 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2 20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자.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마무리된 후, 평양은 ‘력사의 대하’라는 실화소설을 통해 당시의 정책 논의구조를 공개한 바 있다. 외교부(1998년 외무성으로 명칭 변경)와 원자력공업부 주요 당국자에 과학기술 전문가 20여 명이 결합한 ‘핵 상무조’(우리의 태스크포스에 해당)가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장면이었다. 강석주 당시 외교부 제1부부장이 이끌었던 이 핵 상무조는 이후 상황이 워싱턴의 영변 핵시설 제한공격 검토 등 군사적 대립으로 비화하면서 인민무력부 관계자들까지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1차 핵 위기의 주요 국면마다 ‘비장의 한 수’를 고심하고 기획해낸 주체였다.
못 나가던 인물들 발탁한 이유
‘판가리(판갈이) 대전.’ 지난해 12월 은하3호 로켓 발사를 시작으로 2월 3차 핵실험을 거쳐 현재까지 5개월간 이어진 강도 높은 도발 행보를 북측 매체들이 일컫는 용어다. 단순히 남북 혹은 북·미 간 기 싸움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국제질서 판도를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바꿔내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이 ‘판가리 대전’을 이끄는 이들은 누구이고, 과연 강도 높은 도발의 정책결정 과정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까. 2013년판 ‘핵 상무조’의 주요 멤버들을 살펴보는 것은 북한의 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다.
먼저 앞서 사진 속 인민군 최고위 지휘관 4명부터 살펴보자. 3차 핵실험 이후 한 달여 북한이 쏟아낸 ‘말 폭탄’ 정국에서 이들이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목할 사실은 이들이 김정일 시대의 군 수뇌부에 비해 정통파 군사지휘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재홍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오극렬, 김명국, 김정각 등 이전 시기 핵심부에 밀려 작전이나 전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2류들’”이라고 평한다. 현영철 총참모장만 해도 후방인 평안북도 8군단장을 오래 지냈을 뿐 전방군단을 맡은 적이 없고, 부하가 추월해 승진했을 정도로 경쟁에서 밀리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 총참모장은 2010년까지 ‘노동신문’에 한 차례도 사진이 실린 적이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다.
김정은 시대의 첫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이었던 최부일도 마찬가지다. 국경경비대표단 단장 등 북한 측 매체들이 소개하는 약력은 화려하지만, 북·중 접경지역 보안문제를 주로 관할해온 그의 경력은 인민군 전체 차원의 전력 운용이나 전략 구성과는 거리가 멀다. 일각에서 “김정은에게 농구를 가르쳐준 인연으로 발탁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왔던 것 또한 그의 경력이 인민군 지휘체계의 핵심 고리인 작전국장을 맡기에 적절치 않았던 탓이 컸다.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경우 남북 간 군사대화를 주로 담당했던 인물로, 역시 전체 비정규전 전력을 운용하는 정찰총국을 책임지기에는 경험이 짧다. 핵과 미사일을 관할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략로케트군의 김락겸 사령관은 더욱 그렇다. 장령(장성)으로 승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이전 작전국장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넘겨받은 이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게 인민군 인사 변동을 관찰해온 전문가들의 평가다. 예컨대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작전국장이었던 김명국은 1980년대부터 중동국가에 대한 미사일 수출에 관여했던 베테랑이었다.
판을 읽는 3개 단서
북측이 올해 들어 작전국장을 최부일에서 이영길로 교체한 것 또한 이러한 한계를 감안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 속 인물 가운데는 강원도 최전방의 5군단장을 지낸 이영길 정도가 상대적으로 작전이나 전략문제에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2000년대 초까지 이영호 전 총참모장과 승진경쟁을 벌였던 그는 2009년 후계세습 과정에서 다음 세대 인민군을 책임질 인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다. 거꾸로 말해 1순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인민군 수뇌부는 ‘김정일 시대에는 잘나가지 못했던 인물들’로 채워졌다. 특히 이런 흐름이 가속화한 것은 지난해 7월 있었던 이영호 총참모장의 경질과 김정각 인민무력부장의 퇴진이다. 인민군 내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승승장구했던 이들은 2010년을 전후해 김정일 위원장이 앞으로 인민군을 책임질 인물로 낙점한 사람들이었고, 김 위원장의 장례식 당시 영구차를 수행했던 이른바 ‘실세 8인방’에 포함됐다. 아버지가 직접 골랐던 이들 ‘최고 실력파’들을 모두 쳐내고, 2선에 있던 인물들을 발탁해 구성한 것이 현재의 수뇌부인 셈이다.
올해 들어서야 진용이 완료된 이들의 불안정한 위치는 3월 한 달간 긴장고조 국면이 전례 없이 거칠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케 해준다. 군사전략에 입각한 계산과 전문성 있는 판단보다 자신들을 발탁해준 김 제1비서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순위에 올려둔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북측이 이른바 최고지도자의 ‘존엄’ 문제에 대해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고재홍 연구위원은 분석한다.
이렇듯 극단적인 긴장 고조와 대남·대미 위협을 쏟아내던 평양의 행보는 4월 들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첫 시작은 4월 3일 북측의 개성공단 통행제한 조치였다. 그간의 흐름이 단순히 위협 수위를 높여가는 패턴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었다면, ‘나가는 것은 막지 않겠다. 그 대신 들어오지는 못한다’는 통행제한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행동이었다. 정상적인 공단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도 그 책임을 남측에게 돌리는, 그와 동시에 남측이 마땅한 대응방법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교묘한 한 수였기 때문이다.
이는 강경 일변도의 행동패턴만을 이어온 인민군 수뇌부 차원에서는 기획하기 어려운 ‘창의적이면서도 노련한’ 수였다. 군부가 논의를 주도하던 이전 상황에서 벗어나 더욱 큰 틀의 역량과 기획력이 동원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측은 4월 8일 김양건 당 중앙위 대남비서가 개성공단을 방문한 뒤 가동 잠정중단 및 북측 근로자 철수를 발표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됐다. 2013년 ‘핵 상무조’에서 대남라인 등 군부 외의 오랜 경험을 가진 노회한 인물들이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까닭이다.
통일전선부장을 겸임한 김양건 비서는 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남라인이 대대적으로 숙청됐을 때 거의 유일하게 남은 핵심 중 핵심이다. 외교부에서 관료 경력을 시작했다가 당 국제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권력 뒤편으로 밀려났지만, 후계 논의가 본격화된 2000년대 후반 들어 통일전선부장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김 제1비서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후계구축 과정에서 대중·대남 관계를 사실상 모두 지휘하는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4월 중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대화 제의와 존 케리 미국 국무부 장관의 “대화의 길은 열려 있다”는 발언에 대해 북측이 보인 반응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4월 14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담화 형식으로 류 장관의 대화 제의를 “교활한 술책”이라며 거부했던 평양은 케리 장관의 언급에 대해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18일에 이르러서야 “기만의 극치”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 나흘의 시차는 대남라인과 대미라인의 상황판단 차이 역시 내부 정책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날을 계기로 북측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조치를 해제해야 대화가 가능하다”며 본격적으로 미국을 향한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현재 논의에 참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대미라인으로는 강석주 내각 부총리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꼽힌다. 1939년생으로 1차 핵 위기 당시 대미협상을 주도했던 강 부총리는 80년대 초 40대 젊은 나이에 외교부 수뇌부에 입성한 뒤 30년 이상을 대미라인 핵심으로 일해왔다. 2010년 9월 그가 부총리에 임명되고 난 뒤에는 후임자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대미라인의 실세라는 견해도 만만찮다. 1943년생으로 73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 역시 90년대 초부터 북·미 대화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
생각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
4월 18일 벌어진 또 다른 이례적인 사건도 평양 정책결정 구조 내부를 엿보게 해주는 흥미로운 단초다. 이른바 ‘기사 교체’ 사건이다. 이날 오전 ‘조선중앙통신’은 “이번에 우리는 미국과 사실상 한 차례 핵전쟁을 치른 것이나 같다”면서 “미국은 최신 핵전략 무기들과 장비들을 총동원하여 우리를 위협하였다”고 과거형을 사용했으나, 오후 들어 ‘조선중앙TV’는 이를 “핵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같다”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현재진행형으로 바꿔 전했다. 대남라인의 주요 기구인 조평통의 담화문이 공개된 지 몇 시간 만에 수정된 것이다.
이러한 혼선은 4월 중순 이후 상황 대응과 관련해 북측의 정책결정권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전쟁 국면이 사실상 종료됐다고 쉽게 생각하는 대남라인과 여전히 전쟁 상태를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군 수뇌부의 판단 차이다. 실제로 앞서 살펴본 실화소설 ‘력사의 대하’는 1차 핵 위기 당시에도 이러한 이견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고 공공연히 기록하고 있다. 한 군부 인사가 외교부 수뇌부에게 “우린 외교관들의 처사에 불만이 없지 않다. 그렇게 옴질옴질하니까 놈들(미국)이 팀스피리트를 재개하는 것”이라며 언성을 높이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1차 핵 위기가 NPT 탈퇴라는 외교부의 최초 기획에 의해 시작됐다가 이후 군부까지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반면, 2013년 ‘판가리 대전’은 군부의 강경행보로 시작해 대남·대미 등 외교 차원의 후속조치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양상을 띤다. 즉 1993년 핵 상무조가 외교부를 중심으로 군부가 결합한 형태였다면 이번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외교부나 통일전선부가 결합한 형태일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4월 하순 들어 북측의 도발 행진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것은 이제 평양이 냉정한 손익계산에 돌입했음을 뜻한다. 한국과 미국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미사일·핵 실험 등 추가 행동에 나설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의 와중에 군부와 외교·대남라인 사이의 견해 차이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적잖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고민이 결국 어떻게 귀결될지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가장 엇갈리는 부분이다. 이승열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군부가 주도하는 판은 끝났고 주도권도 그들을 떠났다”고 분석한다. 반면 익명을 요청한 군당국자는 “1차 핵 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논의구조 자체가 군부에 크게 기울어진 상태”라며 강경행보를 이어갈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흥미롭게도 평양이 이를 결판 짓게 될 결정적 시점이 언제일지, 그 판단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하나로 모인다. 바로 5월 7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과 이후 두 나라가 내놓을 대화 카드의 수위다.
#2 20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자.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마무리된 후, 평양은 ‘력사의 대하’라는 실화소설을 통해 당시의 정책 논의구조를 공개한 바 있다. 외교부(1998년 외무성으로 명칭 변경)와 원자력공업부 주요 당국자에 과학기술 전문가 20여 명이 결합한 ‘핵 상무조’(우리의 태스크포스에 해당)가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장면이었다. 강석주 당시 외교부 제1부부장이 이끌었던 이 핵 상무조는 이후 상황이 워싱턴의 영변 핵시설 제한공격 검토 등 군사적 대립으로 비화하면서 인민무력부 관계자들까지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1차 핵 위기의 주요 국면마다 ‘비장의 한 수’를 고심하고 기획해낸 주체였다.
못 나가던 인물들 발탁한 이유
‘판가리(판갈이) 대전.’ 지난해 12월 은하3호 로켓 발사를 시작으로 2월 3차 핵실험을 거쳐 현재까지 5개월간 이어진 강도 높은 도발 행보를 북측 매체들이 일컫는 용어다. 단순히 남북 혹은 북·미 간 기 싸움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국제질서 판도를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바꿔내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이 ‘판가리 대전’을 이끄는 이들은 누구이고, 과연 강도 높은 도발의 정책결정 과정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까. 2013년판 ‘핵 상무조’의 주요 멤버들을 살펴보는 것은 북한의 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다.
먼저 앞서 사진 속 인민군 최고위 지휘관 4명부터 살펴보자. 3차 핵실험 이후 한 달여 북한이 쏟아낸 ‘말 폭탄’ 정국에서 이들이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목할 사실은 이들이 김정일 시대의 군 수뇌부에 비해 정통파 군사지휘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재홍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오극렬, 김명국, 김정각 등 이전 시기 핵심부에 밀려 작전이나 전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2류들’”이라고 평한다. 현영철 총참모장만 해도 후방인 평안북도 8군단장을 오래 지냈을 뿐 전방군단을 맡은 적이 없고, 부하가 추월해 승진했을 정도로 경쟁에서 밀리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 총참모장은 2010년까지 ‘노동신문’에 한 차례도 사진이 실린 적이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다.
김정은 시대의 첫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이었던 최부일도 마찬가지다. 국경경비대표단 단장 등 북한 측 매체들이 소개하는 약력은 화려하지만, 북·중 접경지역 보안문제를 주로 관할해온 그의 경력은 인민군 전체 차원의 전력 운용이나 전략 구성과는 거리가 멀다. 일각에서 “김정은에게 농구를 가르쳐준 인연으로 발탁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왔던 것 또한 그의 경력이 인민군 지휘체계의 핵심 고리인 작전국장을 맡기에 적절치 않았던 탓이 컸다.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경우 남북 간 군사대화를 주로 담당했던 인물로, 역시 전체 비정규전 전력을 운용하는 정찰총국을 책임지기에는 경험이 짧다. 핵과 미사일을 관할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략로케트군의 김락겸 사령관은 더욱 그렇다. 장령(장성)으로 승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이전 작전국장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넘겨받은 이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게 인민군 인사 변동을 관찰해온 전문가들의 평가다. 예컨대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작전국장이었던 김명국은 1980년대부터 중동국가에 대한 미사일 수출에 관여했던 베테랑이었다.
판을 읽는 3개 단서
북측이 올해 들어 작전국장을 최부일에서 이영길로 교체한 것 또한 이러한 한계를 감안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 속 인물 가운데는 강원도 최전방의 5군단장을 지낸 이영길 정도가 상대적으로 작전이나 전략문제에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2000년대 초까지 이영호 전 총참모장과 승진경쟁을 벌였던 그는 2009년 후계세습 과정에서 다음 세대 인민군을 책임질 인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다. 거꾸로 말해 1순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인민군 수뇌부는 ‘김정일 시대에는 잘나가지 못했던 인물들’로 채워졌다. 특히 이런 흐름이 가속화한 것은 지난해 7월 있었던 이영호 총참모장의 경질과 김정각 인민무력부장의 퇴진이다. 인민군 내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승승장구했던 이들은 2010년을 전후해 김정일 위원장이 앞으로 인민군을 책임질 인물로 낙점한 사람들이었고, 김 위원장의 장례식 당시 영구차를 수행했던 이른바 ‘실세 8인방’에 포함됐다. 아버지가 직접 골랐던 이들 ‘최고 실력파’들을 모두 쳐내고, 2선에 있던 인물들을 발탁해 구성한 것이 현재의 수뇌부인 셈이다.
올해 들어서야 진용이 완료된 이들의 불안정한 위치는 3월 한 달간 긴장고조 국면이 전례 없이 거칠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케 해준다. 군사전략에 입각한 계산과 전문성 있는 판단보다 자신들을 발탁해준 김 제1비서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순위에 올려둔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북측이 이른바 최고지도자의 ‘존엄’ 문제에 대해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고재홍 연구위원은 분석한다.
이렇듯 극단적인 긴장 고조와 대남·대미 위협을 쏟아내던 평양의 행보는 4월 들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첫 시작은 4월 3일 북측의 개성공단 통행제한 조치였다. 그간의 흐름이 단순히 위협 수위를 높여가는 패턴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었다면, ‘나가는 것은 막지 않겠다. 그 대신 들어오지는 못한다’는 통행제한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행동이었다. 정상적인 공단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도 그 책임을 남측에게 돌리는, 그와 동시에 남측이 마땅한 대응방법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교묘한 한 수였기 때문이다.
이는 강경 일변도의 행동패턴만을 이어온 인민군 수뇌부 차원에서는 기획하기 어려운 ‘창의적이면서도 노련한’ 수였다. 군부가 논의를 주도하던 이전 상황에서 벗어나 더욱 큰 틀의 역량과 기획력이 동원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측은 4월 8일 김양건 당 중앙위 대남비서가 개성공단을 방문한 뒤 가동 잠정중단 및 북측 근로자 철수를 발표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됐다. 2013년 ‘핵 상무조’에서 대남라인 등 군부 외의 오랜 경험을 가진 노회한 인물들이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까닭이다.
통일전선부장을 겸임한 김양건 비서는 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남라인이 대대적으로 숙청됐을 때 거의 유일하게 남은 핵심 중 핵심이다. 외교부에서 관료 경력을 시작했다가 당 국제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권력 뒤편으로 밀려났지만, 후계 논의가 본격화된 2000년대 후반 들어 통일전선부장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김 제1비서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후계구축 과정에서 대중·대남 관계를 사실상 모두 지휘하는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김양건 북한 노동당 대남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현재 논의에 참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대미라인으로는 강석주 내각 부총리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꼽힌다. 1939년생으로 1차 핵 위기 당시 대미협상을 주도했던 강 부총리는 80년대 초 40대 젊은 나이에 외교부 수뇌부에 입성한 뒤 30년 이상을 대미라인 핵심으로 일해왔다. 2010년 9월 그가 부총리에 임명되고 난 뒤에는 후임자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대미라인의 실세라는 견해도 만만찮다. 1943년생으로 73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 역시 90년대 초부터 북·미 대화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
생각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
4월 18일 벌어진 또 다른 이례적인 사건도 평양 정책결정 구조 내부를 엿보게 해주는 흥미로운 단초다. 이른바 ‘기사 교체’ 사건이다. 이날 오전 ‘조선중앙통신’은 “이번에 우리는 미국과 사실상 한 차례 핵전쟁을 치른 것이나 같다”면서 “미국은 최신 핵전략 무기들과 장비들을 총동원하여 우리를 위협하였다”고 과거형을 사용했으나, 오후 들어 ‘조선중앙TV’는 이를 “핵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같다”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현재진행형으로 바꿔 전했다. 대남라인의 주요 기구인 조평통의 담화문이 공개된 지 몇 시간 만에 수정된 것이다.
이러한 혼선은 4월 중순 이후 상황 대응과 관련해 북측의 정책결정권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전쟁 국면이 사실상 종료됐다고 쉽게 생각하는 대남라인과 여전히 전쟁 상태를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군 수뇌부의 판단 차이다. 실제로 앞서 살펴본 실화소설 ‘력사의 대하’는 1차 핵 위기 당시에도 이러한 이견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고 공공연히 기록하고 있다. 한 군부 인사가 외교부 수뇌부에게 “우린 외교관들의 처사에 불만이 없지 않다. 그렇게 옴질옴질하니까 놈들(미국)이 팀스피리트를 재개하는 것”이라며 언성을 높이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1차 핵 위기가 NPT 탈퇴라는 외교부의 최초 기획에 의해 시작됐다가 이후 군부까지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반면, 2013년 ‘판가리 대전’은 군부의 강경행보로 시작해 대남·대미 등 외교 차원의 후속조치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양상을 띤다. 즉 1993년 핵 상무조가 외교부를 중심으로 군부가 결합한 형태였다면 이번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외교부나 통일전선부가 결합한 형태일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4월 하순 들어 북측의 도발 행진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것은 이제 평양이 냉정한 손익계산에 돌입했음을 뜻한다. 한국과 미국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미사일·핵 실험 등 추가 행동에 나설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의 와중에 군부와 외교·대남라인 사이의 견해 차이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적잖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고민이 결국 어떻게 귀결될지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가장 엇갈리는 부분이다. 이승열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군부가 주도하는 판은 끝났고 주도권도 그들을 떠났다”고 분석한다. 반면 익명을 요청한 군당국자는 “1차 핵 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논의구조 자체가 군부에 크게 기울어진 상태”라며 강경행보를 이어갈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흥미롭게도 평양이 이를 결판 짓게 될 결정적 시점이 언제일지, 그 판단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하나로 모인다. 바로 5월 7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과 이후 두 나라가 내놓을 대화 카드의 수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