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비극의 중요한 코드 가운데 하나는 욕망이다. 고전 비극의 주인공이 공동체를 대표해 희생하는 숭고미를 보여줬다면, 현대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 속에 함몰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헤다 가블러’(연출 박정희)의 헤다 역시 욕망과 분열로 점철된 현대 비극의 인물이다. 그런데 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갈증을 느끼기보다 들끓는 욕망 자체가 현현된 것 같은 부조리한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 저 너머의 ‘실재’ 혹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는 어딘지 음험하면서도 그지없이 매력적이다.
헤다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헤다를 둘러싼 모든 남자가 그를 갈망하지만,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욕망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의 주체로 인식하고 심리를 따라간다면 그의 행동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헤다가 욕망의 대상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 욕망의 주체로서 치밀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극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도 ‘사건’이 아닌 ‘심리’다.
이야기는 헤다, 옛 애인 옐레르트 뢰브보르그, 여학교 동창 테아의 의뭉스러운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그 방식이 여느 삼각관계와는 다르다. 갈등이 명쾌하게 표면화하지 않지만, 인물이 주고받는 감정은 미묘하고 신경전도 치열하다. 재미있는 것은 인물들의 감정을 가지고 놀면서 그들의 운명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헤다라는 점이다.
사실주의 연극의 선구자인 입센은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초기작은 낭만주의, 후기작은 상징주의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헤다 가블러’에서는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단일 세트인 무대(무대디자인 여신동)는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저택 모습이지만, 그 속에 헤다의 내면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시선을 끈다. 무대 한쪽에 화로가 놓였는데, 그 위의 벽은 반짝반짝 빛나는 다른 곳과 달리 시커멓게 그을어 있다. 헤다가 연신 이 화로 속으로 땔감을 집어넣는 행위는 그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헤다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은 불안정한 곡선을 그리는 데다 그 바로 옆에 장총이 걸려 있어 위태로운 느낌이다.
중간 중간 삽입한 인물의 양식적인 동작과 음향, 음악(작곡, 음악감독 박천휘) 역시 심리적 효과를 강조한다. 간간이 나오는 판사의 비사실적이고 과장된 행동도 저변에 흐르는 강박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헤다의 자살을 묘사하는 마지막 부분은 이전 장면들과는 전혀 다른 환상성을 지닌다.
어떻게 보면 헤다는 시대와 불협화음을 이루며 좌절된 열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자아가 강하고 자기 욕구에 충실한 여인이다. 아버지가 장군이었다는 사실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권총을 가지고 유희하는 모습이 그의 기질을 잘 설명해준다. 이런 그가 연거푸 읊어대는 말은 ‘지루하다’다. 투구를 쓴 브륀힐데(북유럽 신화 속 인물)처럼 에너지 넘치는 그가 소극적이고 아둔한 남편과 중산층 가정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현실 탓이다. 작품 배경은 19세기 유럽이지만, 헤다는 동시대 여성상이기도 하다. 뢰브보르그와 헤다의 관계, 인물들의 사회적 행위 역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위선과 소외를 보여준다.
이혜영이 헤다 역으로 출연해 특유의 카리스마와 오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호들갑스러운 시고모 율리안네(강애심 분), 등이 굽은 채 날렵하게 움직이는 하녀 베르타(임성미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판사(김정호 분)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남편 이외르겐 테스만(김수현 분), 뢰브보르그(호산 분)의 명확한 캐릭터 역시 극을 균형 있게 이끌며 흥미를 자극한다. 5월 2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헤다 가블러’(연출 박정희)의 헤다 역시 욕망과 분열로 점철된 현대 비극의 인물이다. 그런데 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갈증을 느끼기보다 들끓는 욕망 자체가 현현된 것 같은 부조리한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 저 너머의 ‘실재’ 혹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는 어딘지 음험하면서도 그지없이 매력적이다.
헤다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헤다를 둘러싼 모든 남자가 그를 갈망하지만,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욕망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의 주체로 인식하고 심리를 따라간다면 그의 행동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헤다가 욕망의 대상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 욕망의 주체로서 치밀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극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도 ‘사건’이 아닌 ‘심리’다.
이야기는 헤다, 옛 애인 옐레르트 뢰브보르그, 여학교 동창 테아의 의뭉스러운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그 방식이 여느 삼각관계와는 다르다. 갈등이 명쾌하게 표면화하지 않지만, 인물이 주고받는 감정은 미묘하고 신경전도 치열하다. 재미있는 것은 인물들의 감정을 가지고 놀면서 그들의 운명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헤다라는 점이다.
사실주의 연극의 선구자인 입센은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초기작은 낭만주의, 후기작은 상징주의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헤다 가블러’에서는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단일 세트인 무대(무대디자인 여신동)는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저택 모습이지만, 그 속에 헤다의 내면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시선을 끈다. 무대 한쪽에 화로가 놓였는데, 그 위의 벽은 반짝반짝 빛나는 다른 곳과 달리 시커멓게 그을어 있다. 헤다가 연신 이 화로 속으로 땔감을 집어넣는 행위는 그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헤다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은 불안정한 곡선을 그리는 데다 그 바로 옆에 장총이 걸려 있어 위태로운 느낌이다.
중간 중간 삽입한 인물의 양식적인 동작과 음향, 음악(작곡, 음악감독 박천휘) 역시 심리적 효과를 강조한다. 간간이 나오는 판사의 비사실적이고 과장된 행동도 저변에 흐르는 강박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헤다의 자살을 묘사하는 마지막 부분은 이전 장면들과는 전혀 다른 환상성을 지닌다.
어떻게 보면 헤다는 시대와 불협화음을 이루며 좌절된 열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자아가 강하고 자기 욕구에 충실한 여인이다. 아버지가 장군이었다는 사실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권총을 가지고 유희하는 모습이 그의 기질을 잘 설명해준다. 이런 그가 연거푸 읊어대는 말은 ‘지루하다’다. 투구를 쓴 브륀힐데(북유럽 신화 속 인물)처럼 에너지 넘치는 그가 소극적이고 아둔한 남편과 중산층 가정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현실 탓이다. 작품 배경은 19세기 유럽이지만, 헤다는 동시대 여성상이기도 하다. 뢰브보르그와 헤다의 관계, 인물들의 사회적 행위 역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위선과 소외를 보여준다.
이혜영이 헤다 역으로 출연해 특유의 카리스마와 오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호들갑스러운 시고모 율리안네(강애심 분), 등이 굽은 채 날렵하게 움직이는 하녀 베르타(임성미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판사(김정호 분)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남편 이외르겐 테스만(김수현 분), 뢰브보르그(호산 분)의 명확한 캐릭터 역시 극을 균형 있게 이끌며 흥미를 자극한다. 5월 2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