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저녁 서울 마포구 대한불교진흥원에서 강연하는 이남곡 이사장.
청중 50여 명이 기다리는 건 이남곡(67) 논실마을학교 이사장의 ‘논어’ 강연. 대한불교진흥원이 매달 마련하는 화요열린강좌에서 4월 강연자로 이 이사장을 초청했다. 최근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휴)을 펴낸 이 이사장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복역했다. 이후 정토회 법륜 스님의 영향을 받아 1996년부터 8년간 무소유를 표방한 삶을 실천하기도 했다.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뜻있는 사람들과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며 인문학을 강의한다.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은 그가 나이 육십이 넘어 이웃과 2년에 걸쳐 ‘논어’를 읽고 토론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 무지의 자각, 소통의 출발점
“요새 신문에 자꾸 등장하니 부끄러워요. 논어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아닌데 마치 전문가처럼 비치니까. 2년여 ‘논어’를 강독하면서 감동을 많이 받은 건 분명하니 그걸 여러분과 나누면 좋겠어요.”
이 이사장은 ‘소통’ ‘경쟁’ ‘현대사회 모순’ 세 가지 문제에 집중해 ‘논어’를 들여다보겠다고 했다. 교사 출신답게 중간 중간 질문도 던져가며 2시간 가까이 막힘없이 얘기를 풀어나갔다.
“‘논어’를 읽기 전에는 군자(君子)가 엄숙하고 뻣뻣하며 재미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 대단히 자유롭고 유쾌한 사람이더군요.”
그는 이 시대 화두인 소통을 원활하게 해나가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지나친 경쟁, 양극화와 지구생태계 위기 같은 현대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논어’에 묘사된 군자의 모습에서 찾고자 했다.
그가 ‘논어’의 핵심 구절이라며 화이트보드에 한자를 적어나갔다. 몇몇 사람이 그가 적은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무적무막 의지여비(無適無莫 義之與比·옳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무지야(無知也·나는 모른다).”
“무적무막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옳다, 틀림없다는 단정 없이 의가 무엇인지 추구하겠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무지야는 공자의 겸손일까요?”
그가 맨 앞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며 대뜸 물었다.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까?”
지목당한 사람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아이처럼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한번은 15명에게 과자를 주고 그 맛을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더니 답이 다 다르더라고요. 그중에 아주 부정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있었는데,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쓴 것이었어요. 각종 첨가물이 들어간 과자는 몸에 해롭다는 정보와 그런 과자를 아이에게 먹이면 안 된다는 가치관이 미각에까지 작용한 거죠. 우리는 감각기관이 입력한 것을 기억과 경험, 가치관 등에 근거해 판단하는 것이지, 사물이나 사실 자체를 안다고 볼 순 없어요. 공자가 무지야라고 한 것도 사실이나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하는 무지의 자각이죠.”
그렇다고 무지야가 불가지(不可知)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해 그 양끝을 들춰내어 마침내 밝혀보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목을 들어 “누구도 사실이나 진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잘못이며, 누구라도 물어오면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샅샅이 밝혀보겠다는 의미”라면서 “내가 옳다고 단정하지 않고 내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각과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일상적 자각이 소통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 과도한 경쟁, 그리고 忠과 恕
4월 24일 이남곡 이사장의 ‘논어’ 강연에 참석한 청중.
“충은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는 상태를 말해요. 집중하면 즐겁고 성실성도 높아져요. 충이라면 경쟁의 비인간적 야만성을 대신해 시장을 인간화하는 등 인간 본위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한 남성을 지목해 물었다.
“선생님은 집에서 설거지를 좀 하십니까? 설거지 후에 그릇 정리도 잘하시나요?”
“설거지는 제가 하고 그릇 정리는 아내가 하는 식으로 일을 분담합니다.”
그가 “설거지하고 그릇 정리까지 하셔야 거룩한 것”이라고 맞받아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충을 논하다 거룩한 설거지라니.
“독일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가 해야 할 일의 다음을 하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얘기했어요. 에크하르트는 자발성, 몰두, 즐거움 이 세 가지가 있어야 거룩하다고 했는데 공자의 충과 상통하지 않나요?”
그가 남성에게 다시 물었다.
“설거지를 온 마음을 다해 해본 적 있습니까? 만약 부인이 TV를 보고 있다면 그래도 설거지가 즐거울까요?”
질문을 받은 남성이 고개를 젓자 그는 “아무리 일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신경 쓰여 마음이 불편하다면 충이 아니다”라며 “서가 되어야 충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충과 붙어 다니는 개념”으로서 ‘서’를 소개했다.
“제 생각에 서는 프랑스의 톨레랑스(tole´-rance·관용)보다 진일보한 개념인 것 같아요. 관용은 왠지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데, 서는 상대의 마음이 되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는 의미거든요.”
8년간 무소유 생활을 실천했던 그는 “작은 규모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상(像)을 실험해봤다”면서 “경쟁 없이도 생산력을 유지하려면 구성원을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충과 서를 기대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해서 사회가 돌아갈까. 그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갖춰가고 있다”며 낙관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 재앙을 가져오리라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전쟁 위협과 기후 온난화로 대표되는 지구 생태계 파괴 등이 비관론에 힘을 싣는다. 그는 이 같은 과학기술 발전의 양면성을 극복하려면 “인간의 행위 능력이 엄청나게 커진 데 반해 인간의 자기중심적 가치체계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순을 건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자기중심적 가치체계를 변화시키는 지침으로 공자가 제시한 군자상(君子像)을 제시했다.
# 인간의 진화와 군자의 길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못하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혹시 지금 자기 모습이 소인에 가까워 불쾌한가. 그는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기계적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향하는 인간의 진화에 대해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사회주의자를 꿈꿨던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험한 사람이 바라는 미래는 “자유롭고 따뜻한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 의식이 진화할 수 있기에 개개인이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켜 나간다면 그러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2500년 전이라면 성인이나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죠. 하지만 요즘은 일반인도 가능해요. 고전을 읽고 생활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인문운동을 통해서 말이에요. 과거에는 선각자들이나 경험했던 세계를 일반인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보이고 진화가 아닐까요.”
강연 후 한 40대 남성에게 강연을 들은 소감을 물었다. 평소 고전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우리가 사회문제를 보면서 제도 탓, 기술 탓, 남 탓을 많이 하는데, 무지와 자기중심성이라는 나 자신의 한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얘기한 오늘 강연이 매우 유익했다”고 말했다. 불교계에서 주최한 자리라 불자인지 물었더니 뜻밖에도 “교회에 다닌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사람들은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막연한 불안감과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람이 사람들을 고전에 빠져들고 종교를 초월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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