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12월부터 조선왕실의궤(儀軌)가 순차적으로 한국에 돌아온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빼돌린 조선왕실의궤는 ‘조선왕조실록’에 버금가는 기록문화의 진수. 왕실에서 거행한 의례를 그림과 글로 남겼다(Tip 참조).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10월 19일 한일정상회담 때 조선왕실의궤 반환의 상징 격으로 ‘대례의궤(大禮儀軌)’ 등 3종 5책을 가져왔다. 한국으로 귀환하는 조선왕실의궤는 81종 161책.
권철현(64) 세종재단 이사장이 조선왕실의궤 반환의 수훈갑이다. 그는 2008년 4월~2011년 6월 주일대사로 일했다. 정치인 출신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족제비 이 잡듯 될성부른 일본 정치인을 골라내 관리했다. ‘찬찬찬 대사’로 불렸다.
“비슷비슷한 웃음, 비슷비슷한 음식, 비슷비슷한 대화…. 조찬, 오찬, 만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더군요. 오죽했으면 찬찬찬 대사로 불렸겠습니까? 일본 정권 교체 이전까지 이중생활을 했어요. 낮에는 자민당을 관리하고, 밤에는 민주당 사람과 연을 맺었습니다. 2009년 8월 30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게 확실했거든요. 한국 외교는 민주당 인맥이 약했습니다. 밥 먹고, 술 마셔야 친해져요. 특별 예산을 요청해 민주당 의원을 챙겼습니다.”
정부에 특별 예산 요청해 사용
외교도 결국은 사람 관계다. ‘찬찬찬 대사’로 일한 게 조선왕실의궤 반환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얽힌 뒷얘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협상 과정에 외교 기밀이 많아요.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민주당 실력자를 관리하는 데 돈을 얼마나 썼느냐고 찔러 물었다.
“기밀이에요. 못 밝힙니다.”
서울에서 상당한 액수를 지원했다면서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전 외상이 야당 시절에 찾아왔어요. 한국을 좋아하는 의원 모임을 꾸린다고 하더군요. 대사관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민주당 정권 초대 총리에 오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이 모임 고문을 맡았어요.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친분을 쌓은 이들이 정권 교체 후 하나같이 요직에 올랐습니다. 하토야마, 마에하라를 비롯해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전 관방장관이 조선왕실의궤를 돌려받는 일에 도움을 줬어요.”
음지에 있을 때 친분을 쌓아놓아야 양지에 갔을 때 도움을 받는 법. 그는 정부에 특별예산을 요청하면서 민주당을 각별히 관리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간 전 총리가 민주당 축하 사절단장으로 서울에 왔어요.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는데, 어렵다는 대답을 들은 모양이에요. 간 전 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대통령과 면담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대통령에게 언젠가 총리가 될 사람이다, 만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 면담이 성사됐죠.”
▼ 간 총리가 강제병합 100년과 관련한 사죄 담화문을 내놓았죠.
“그렇습니다. 간은 민주당 정권 두 번째 총리를 지냈습니다. 초대 총리인 하토야마와 이명박 대통령의 관계도 각별했어요. 하토야마가 취임 후 첫 외국 방문지로 중국을 선택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한국에 먼저 오게 하라고 주일 한국대사관에 지시했습니다. 하토야마와는 부부동반으로 밥을 먹는 사이였습니다. 결국 하토야마가 일정을 바꿔 한국을 먼저 방문했어요. 이 대통령 부부와 하토야마 부부도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뭔가요.
“2008년 일본 왕궁에 있는 궁내청(왕실 사무를 관장하는 곳)에 가서 열람신청을 해 조선왕실의궤를 봤습니다. 명성황후 장례식을 그려 넣은 책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기록했더군요. 처음엔 조선 회화가 이렇게 뛰어났구나 하고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다음엔 ‘이게 왜 여기 있지?’ 하고 놀랐고요. 보존 상태가 훌륭해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강탈해간 것이지만 관리는 잘했더군요. 반드시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혜문 스님을 비롯한 민간단체 분들이 1등 공신”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사무처장 혜문 스님)는 2006년부터 활동하면서 일본 정부에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내각, 의회를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담화문 발표 이틀 전까지 안 된다”
“민간단체 분들이 자민당 실력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정권이 바뀐 뒤엔 민주당 지도부와 제대로 접촉하지 못했고요. 실력자가 아닌 낮은 급수 의원이나 사민당, 공명당, 공산당 같은 군소정당 의원을 만나는 경향이 있더군요. 지도부 핵심을 움직여야 일이 성사되겠다고 여겼습니다.”
권 이사장은 민주당이 야당일 때부터 친분을 쌓은 일본 의회와 내각 인사에게 조선왕실의궤를 한국에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혜문 스님은 ‘주간동아’ 자매지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달라니 의괘를 주더라. 왜 일찍 달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10년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었습니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 담화문을 받아내야 했어요. 말로만 하는 사죄가 아닌 실천의 상징으로서 조선왕실의궤를 한국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센고쿠 요시토(당시 관방장관)와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당시 외무장관)를 움직여야 했죠. 오카다에게 당신이 핵심에 있을 때 한국을 향해 좋은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비교할 것이다. 실천적 내용이 담겨야 한다. 문장이 진실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조선왕실의궤를 돌려줘야 한다”고 민주당 실력자들에게 강조했다.
일본 우익은 사죄 담화문을 내놓는 것에 발끈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담화를 내놓았다, 일왕도 사죄했다, 도대체 사과를 몇 번이나 하라는 것이냐, 101주년에 또 사과할 것이냐는 식이었습니다. 산케이 같은 보수언론도 들고 일어났죠. 간, 센고쿠, 오카다를 상대로 설득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하토야마 전 총리 부부를 관저로 초청해 따로 부탁도 했고요.”
민주당 정권은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에게 전화로 식민지배를 사죄하고, 한국 정부가 전화통화 내용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조선왕실의궤 반환과 관련해서는 “문화재 반환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됐다. 국제사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일뿐더러 조선왕실의궤를 반환하면 다른 것도 내놓으라고 할 것 아닌가”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인은 내용 못지않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다음 셋 중 하나의 방법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리가 사죄 담화문을 발표할 것 △총리 특사가 한국을 방문해 사과문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할 것 △일본 의회에서 사죄 문장을 의결할 것.
▼ 두 번째, 세 번째 방법은 일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첫 번째 방법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2010년 8월 29일(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날은 1910년 8월 22일) 전후로 간 당시 총리가 사죄 담화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본 우익의 반발이 더욱 심해져 발표가 8월 10일로 당겨졌다.
“우익이 더 거칠게 반대하기 전에 사죄문을 발표해버리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담화문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담았다.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가까운 시일에 이를 반환하고자 한다.’
“담화문 발표 이틀 전까지도 조선왕실의궤 반환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서울에도 어렵겠다고 보고했고요.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가져간 모든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내용을 사죄문에 담은 겁니다. 우리도 놀랐어요. 우리 것을 가져오는 일은 당연한 일인데, 왜 그렇게 기쁘던지.”
한국에서는 반환받아야 할 도서 수와 관련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661권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 재야사학자는 821권을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전문가들에게 반환받아야 할 도서 수를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봤거든요.”
훼손 상태 조사 중 12월 도착 장담 못해
일본 정부는 321권+알파(α)를 돌려주겠다고 나왔다. 그는 “당치 않다”고 맞받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규장각에서 빌려간 것도 꽤 된다고 들었다, 일본이 전 세계에서 기록 보존을 최고로 잘하는 나라다, 더 찾아봐라, 더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1205책이 된 겁니다.”
일본 정부가 이르면 12월부터 순차적으로 한국에 반환하는 도서는 조선왕실의궤 81종 167책, 규장각 도서 66종 938책 등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반환받은 문화재가 1432점이니 적지 않은 양이다.
2010년 11월 24일 양국 외교장관이 이명박 대통령, 간 당시 일본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일도서협정에 서명했다. 한국은 협정문 제목에 ‘반환’이라는 단어를 넣으려 했으나 일본은 ‘넘겨줌(ひきわたし)’이라는 낱말을 고집했다.
“반환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못 넣겠다고 해서 우리가 양보했어요. 한일도서협정이라는 명칭으로 정리했습니다.”
양국 외교장관이 협정문에 서명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으로 돌아온 책은 일본 총리가 가져온 조선왕실의궤 3종 5책이 전부다. 일본 의회의 비준이 늦어져서다.
“자민당이 반대했어요. 2010년에는 센고쿠 당시 관방장관 해임건의안이 통과하지 못하면 다른 건은 일절 못 다룬다고 나왔습니다. 2011년 초엔 주일미군 후텐마 공군기지 문제로 여야가 격돌하면서 비준이 이뤄지지 않았죠.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고요. 참의원이 5월 27일 한일도서협정을 비준했습니다.”
올해 5월 참의원 비준을 앞두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정책조정회장이 그를 찾아왔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기술한 사회 교과서의 검정을 무더기로 통과시키자 한국이 독도의 실효지배를 강화하겠다고 나서면서 한일관계가 얼어붙었을 때다. 일본 우익은 한국이 독도로 시비를 거니 책을 돌려주지 말자고 주장했다. 이시바가 그에게 말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나두고 온 고서적을 돌려줘야 우리도 책을 넘겨줄 수 있다.”
그가 맞받았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지금은 일본을 도와야 할 때라면서 시위를 접고 성금을 걷었다. 이게 뭐하는 거냐. 총리 담화로 약속했다. 양국이 협정도 맺었다. 못 돌려주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
▼ 조선왕실의궤가 12월부터 확실히 돌아올까요.
“12월부터 도착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일본에서 훼손 상태를 조사 중입니다. 누가, 언제 훼손했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요. 이동할 때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것에 대비해 보험도 들어야 합니다. 문화재는 한 번에 옮길 수도 없어요. 사고가 나면 큰일이거든요.”
그는 민주화 이후 재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일본대사다. 책상머리에 앉지 않고 발로 뛴 덕에 조선왕실의궤 반환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10월 19일 한일정상회담 때 조선왕실의궤 반환의 상징 격으로 ‘대례의궤(大禮儀軌)’ 등 3종 5책을 가져왔다. 한국으로 귀환하는 조선왕실의궤는 81종 161책.
권철현(64) 세종재단 이사장이 조선왕실의궤 반환의 수훈갑이다. 그는 2008년 4월~2011년 6월 주일대사로 일했다. 정치인 출신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족제비 이 잡듯 될성부른 일본 정치인을 골라내 관리했다. ‘찬찬찬 대사’로 불렸다.
“비슷비슷한 웃음, 비슷비슷한 음식, 비슷비슷한 대화…. 조찬, 오찬, 만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더군요. 오죽했으면 찬찬찬 대사로 불렸겠습니까? 일본 정권 교체 이전까지 이중생활을 했어요. 낮에는 자민당을 관리하고, 밤에는 민주당 사람과 연을 맺었습니다. 2009년 8월 30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게 확실했거든요. 한국 외교는 민주당 인맥이 약했습니다. 밥 먹고, 술 마셔야 친해져요. 특별 예산을 요청해 민주당 의원을 챙겼습니다.”
정부에 특별 예산 요청해 사용
외교도 결국은 사람 관계다. ‘찬찬찬 대사’로 일한 게 조선왕실의궤 반환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얽힌 뒷얘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협상 과정에 외교 기밀이 많아요.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민주당 실력자를 관리하는 데 돈을 얼마나 썼느냐고 찔러 물었다.
“기밀이에요. 못 밝힙니다.”
서울에서 상당한 액수를 지원했다면서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전 외상이 야당 시절에 찾아왔어요. 한국을 좋아하는 의원 모임을 꾸린다고 하더군요. 대사관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민주당 정권 초대 총리에 오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이 모임 고문을 맡았어요.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친분을 쌓은 이들이 정권 교체 후 하나같이 요직에 올랐습니다. 하토야마, 마에하라를 비롯해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전 관방장관이 조선왕실의궤를 돌려받는 일에 도움을 줬어요.”
음지에 있을 때 친분을 쌓아놓아야 양지에 갔을 때 도움을 받는 법. 그는 정부에 특별예산을 요청하면서 민주당을 각별히 관리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간 전 총리가 민주당 축하 사절단장으로 서울에 왔어요.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는데, 어렵다는 대답을 들은 모양이에요. 간 전 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대통령과 면담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대통령에게 언젠가 총리가 될 사람이다, 만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 면담이 성사됐죠.”
▼ 간 총리가 강제병합 100년과 관련한 사죄 담화문을 내놓았죠.
“그렇습니다. 간은 민주당 정권 두 번째 총리를 지냈습니다. 초대 총리인 하토야마와 이명박 대통령의 관계도 각별했어요. 하토야마가 취임 후 첫 외국 방문지로 중국을 선택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한국에 먼저 오게 하라고 주일 한국대사관에 지시했습니다. 하토야마와는 부부동반으로 밥을 먹는 사이였습니다. 결국 하토야마가 일정을 바꿔 한국을 먼저 방문했어요. 이 대통령 부부와 하토야마 부부도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뭔가요.
“2008년 일본 왕궁에 있는 궁내청(왕실 사무를 관장하는 곳)에 가서 열람신청을 해 조선왕실의궤를 봤습니다. 명성황후 장례식을 그려 넣은 책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기록했더군요. 처음엔 조선 회화가 이렇게 뛰어났구나 하고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다음엔 ‘이게 왜 여기 있지?’ 하고 놀랐고요. 보존 상태가 훌륭해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강탈해간 것이지만 관리는 잘했더군요. 반드시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혜문 스님을 비롯한 민간단체 분들이 1등 공신”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사무처장 혜문 스님)는 2006년부터 활동하면서 일본 정부에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내각, 의회를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담화문 발표 이틀 전까지 안 된다”
“민간단체 분들이 자민당 실력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정권이 바뀐 뒤엔 민주당 지도부와 제대로 접촉하지 못했고요. 실력자가 아닌 낮은 급수 의원이나 사민당, 공명당, 공산당 같은 군소정당 의원을 만나는 경향이 있더군요. 지도부 핵심을 움직여야 일이 성사되겠다고 여겼습니다.”
권 이사장은 민주당이 야당일 때부터 친분을 쌓은 일본 의회와 내각 인사에게 조선왕실의궤를 한국에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혜문 스님은 ‘주간동아’ 자매지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달라니 의괘를 주더라. 왜 일찍 달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10년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었습니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 담화문을 받아내야 했어요. 말로만 하는 사죄가 아닌 실천의 상징으로서 조선왕실의궤를 한국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센고쿠 요시토(당시 관방장관)와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당시 외무장관)를 움직여야 했죠. 오카다에게 당신이 핵심에 있을 때 한국을 향해 좋은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비교할 것이다. 실천적 내용이 담겨야 한다. 문장이 진실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조선왕실의궤를 돌려줘야 한다”고 민주당 실력자들에게 강조했다.
일본 우익은 사죄 담화문을 내놓는 것에 발끈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담화를 내놓았다, 일왕도 사죄했다, 도대체 사과를 몇 번이나 하라는 것이냐, 101주년에 또 사과할 것이냐는 식이었습니다. 산케이 같은 보수언론도 들고 일어났죠. 간, 센고쿠, 오카다를 상대로 설득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하토야마 전 총리 부부를 관저로 초청해 따로 부탁도 했고요.”
민주당 정권은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에게 전화로 식민지배를 사죄하고, 한국 정부가 전화통화 내용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조선왕실의궤 반환과 관련해서는 “문화재 반환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됐다. 국제사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일뿐더러 조선왕실의궤를 반환하면 다른 것도 내놓으라고 할 것 아닌가”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인은 내용 못지않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다음 셋 중 하나의 방법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리가 사죄 담화문을 발표할 것 △총리 특사가 한국을 방문해 사과문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할 것 △일본 의회에서 사죄 문장을 의결할 것.
▼ 두 번째, 세 번째 방법은 일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첫 번째 방법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2010년 8월 29일(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날은 1910년 8월 22일) 전후로 간 당시 총리가 사죄 담화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본 우익의 반발이 더욱 심해져 발표가 8월 10일로 당겨졌다.
“우익이 더 거칠게 반대하기 전에 사죄문을 발표해버리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담화문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담았다.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가까운 시일에 이를 반환하고자 한다.’
“담화문 발표 이틀 전까지도 조선왕실의궤 반환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서울에도 어렵겠다고 보고했고요.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가져간 모든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내용을 사죄문에 담은 겁니다. 우리도 놀랐어요. 우리 것을 가져오는 일은 당연한 일인데, 왜 그렇게 기쁘던지.”
한국에서는 반환받아야 할 도서 수와 관련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661권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 재야사학자는 821권을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전문가들에게 반환받아야 할 도서 수를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봤거든요.”
훼손 상태 조사 중 12월 도착 장담 못해
일본 정부는 321권+알파(α)를 돌려주겠다고 나왔다. 그는 “당치 않다”고 맞받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규장각에서 빌려간 것도 꽤 된다고 들었다, 일본이 전 세계에서 기록 보존을 최고로 잘하는 나라다, 더 찾아봐라, 더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1205책이 된 겁니다.”
일본 정부가 이르면 12월부터 순차적으로 한국에 반환하는 도서는 조선왕실의궤 81종 167책, 규장각 도서 66종 938책 등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반환받은 문화재가 1432점이니 적지 않은 양이다.
2010년 11월 24일 양국 외교장관이 이명박 대통령, 간 당시 일본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일도서협정에 서명했다. 한국은 협정문 제목에 ‘반환’이라는 단어를 넣으려 했으나 일본은 ‘넘겨줌(ひきわたし)’이라는 낱말을 고집했다.
“반환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못 넣겠다고 해서 우리가 양보했어요. 한일도서협정이라는 명칭으로 정리했습니다.”
양국 외교장관이 협정문에 서명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으로 돌아온 책은 일본 총리가 가져온 조선왕실의궤 3종 5책이 전부다. 일본 의회의 비준이 늦어져서다.
“자민당이 반대했어요. 2010년에는 센고쿠 당시 관방장관 해임건의안이 통과하지 못하면 다른 건은 일절 못 다룬다고 나왔습니다. 2011년 초엔 주일미군 후텐마 공군기지 문제로 여야가 격돌하면서 비준이 이뤄지지 않았죠.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고요. 참의원이 5월 27일 한일도서협정을 비준했습니다.”
올해 5월 참의원 비준을 앞두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정책조정회장이 그를 찾아왔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기술한 사회 교과서의 검정을 무더기로 통과시키자 한국이 독도의 실효지배를 강화하겠다고 나서면서 한일관계가 얼어붙었을 때다. 일본 우익은 한국이 독도로 시비를 거니 책을 돌려주지 말자고 주장했다. 이시바가 그에게 말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나두고 온 고서적을 돌려줘야 우리도 책을 넘겨줄 수 있다.”
그가 맞받았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지금은 일본을 도와야 할 때라면서 시위를 접고 성금을 걷었다. 이게 뭐하는 거냐. 총리 담화로 약속했다. 양국이 협정도 맺었다. 못 돌려주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
▼ 조선왕실의궤가 12월부터 확실히 돌아올까요.
“12월부터 도착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일본에서 훼손 상태를 조사 중입니다. 누가, 언제 훼손했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요. 이동할 때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것에 대비해 보험도 들어야 합니다. 문화재는 한 번에 옮길 수도 없어요. 사고가 나면 큰일이거든요.”
그는 민주화 이후 재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일본대사다. 책상머리에 앉지 않고 발로 뛴 덕에 조선왕실의궤 반환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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