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소재로 한 국내외 작품들. 야구를 통해 인생의 가치를 색다르게 끄집어냈다.
1888년 ‘니혼신문’에서 문장을 번역했는데, ‘타자’ ‘주자’ ‘직구’ ‘사구’ 등의 번역 역시 그의 유산이다. 이렇듯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야구가 눈에 띈다. 당대의 문호,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야구를 즐겨 테마로 다루는 곳이 일본이다. 무라카미 류가 축구에 꽂혀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필드’는 야구다. 스테디셀러 ‘노르웨이의 숲’에 이어 최근 ‘1Q84’로 이야기의 힘을 증명한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곳이 야구장”이라 고백했다.
도쿄 진구(神宮)구장에서 만년 꼴찌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경기를 보다 통쾌한 2루타가 터지는 순간,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단다. 명시적으로 ‘커밍아웃’하진 않았으나 하루키는 야쿠르트에 온정적이다. 수필에서 밝힌 이유는 하나, “어이없을 정도로 하도 많이 져서”다. 하루키는 “야쿠르트를 통해 패배에 대한 관대함을 배웠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스토리 라인에 리얼리티 야구 끼워넣기
그래도 하루키의 작품에선 야구가 거의 소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재즈나 와인, 달리기 에세이의 비중이 높다. 반면 오쿠다 히데오는 드러내놓고 주니치팬임을 자처한다. 나고야 인근 기후(岐阜)현 출신인 이 작가가 하루키와 다른 점은 야구를 소설의 적극적 소재로 차용하는 점이다. 나오키 상 수상작인 ‘공중그네’에 나오는 단편 ‘3루수’가 대표적.
괴짜 정신과의사 이라부는 주전 경쟁에 압박을 느낀 나머지 실책을 연발하는 3루수의 고민 상담을 받고, 기상천외한 치유법을 고안해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는 줄거리다. 후속작 격인 ‘면장선거’에선 아예 리얼리티를 부여해 일본 프로야구의 실력자라 할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와타나베 쓰네오나 야구단 인수를 꿈꾸는 라이브도어 호리에 다카후미(호리에몽) 사장을 이라부의 환자로 설정한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2004년 가을 일본에서 벌어진 구단 재편과 파업, 신생 구단 창단 등에 걸친 배경지식을 갖춰야 한다. 스토리 라인에 야구를 끼워넣는 오쿠다의 기법은 ‘도쿄 이야기’에서도 발휘된다. 요미우리 입단 당시 스카우트 파동을 일으킨 에가와 스구루의 첫 등판과 주인공 다무라 히사오의 첫 데이트를 매치해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또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마돈나’에선 깐깐한 여성 상사가 왜 수요일엔 잔업을 금지하는지 그 미스터리를 따라간다.
상사는 지바롯데의 미남 에이스 구로키 도모히로의 팬이었다. 구로키는 수요일만 등판해 ‘웬즈데이 조니’란 애칭으로 불린 실존 모델. 거기에서 착안, 갈등 해소의 열쇠로 끼워넣은 오쿠다의 수법은 야구를 모르는 작가라면 상상하기 어렵다. 오쿠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야구장 습격사건’(원제·‘야구의 나라’)이란 기행 에세이까지 썼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대만 야구, 지방순회 경기, 2군 경기, 은퇴선수들의 경기 등 마이너리티들이 모인 마이너한 지역만 찾아다니고 거기서 얻은 감흥을 담담한 문체로 옮겼다.
지금도 그는 일본의 대표적 스포츠잡지 ‘넘버’에 비고정적으로 칼럼을 쓴다. 순문학이 아닌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에서도 야구는 매력적이다. 고전적 스토리 라인은 두 가지. 하나는 ‘더 팬’류의 작법으로, 아이가 유괴되고 유괴범이 승부조작을 요구할 때 응전하는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 또 하나는 일본과 대만 야구에 있었던, 조직폭력단이 낀 승부조작 사건을 픽션화해 그 유혹에 휘말린 선수들의 갈등과 저항을 묘사한다.
그러나 네오클래식 작가들은 여기서 업그레이드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국내엔 번역되지 않았지만 미즈하라 슈사쿠의 ‘사우스포 킬러’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 수상작으로, 최고 명문구단 왼손 에이스가 승부조작 누명을 쓰고 그 음모를 스스로 파헤쳐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을 다뤘다.
도바 이치의 ‘플레임’에선 FA(자유계약선수)를 앞둔 최고 타자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타격왕 타이틀을 갈망하고, 그 뒤에 에이전트의 음습한 음모가 곁들어지며, 둘의 우정이 파멸로 치닫기까지가 묵묵히 서술된다.
일본 야구소설의 최대 강점은 디테일하고 리얼한 상황 묘사다. 가공의 인물과 팀을 내세우지만 어느 팀, 어느 선수를 모티프로 삼았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고, 거기서 현실감이 더해진다. 에비사와 야스유키의 ‘야구 감독’이 그렇다. 전설적 명감독 히로오카 다쓰로를 내세운 ‘팩션’이다. 일본 미스터리의 에이스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도 야구를 소재로 ‘마구’란 소설을 썼다.
그는 간사이 지역 최고 인기팀 한신이 유일하게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1985년 시즌을 주목했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클라이머즈 하이’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1985년 한신은 소품으로 출연한다. 특히 오가와의 소설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수학 박사는 한신 좌완 에이스 에나쓰 유타카의 백넘버 28을 상기시켜 완전수에 관한 비유를 해낸다.
야구 로망 담은 영화와 만화도 관심
영화에서도 야구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다. 영화 ‘더 팬’과 ‘슈퍼스타 감사용’.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이현세(오혜성), 허영만(이강토), 고행석(구영탄), 이상무(독고탁) 등 당대의 만화가가 야구를 다뤘고, 그 주인공은 캐릭터로 생명력을 얻었다. 소설로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들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더 힘겨워진 비주류의 고단한 삶을 만년꼴찌 삼미에 매치해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을 거뒀다.
비소설 분야에서 한국 야구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는 ‘인천야구 이야기’ ‘LG야구 이야기’, 그리고 김성근 SK 감독의 자서전 ‘꼴찌를 일등으로’를 추천하고 싶다.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심자에겐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가 바이블로 꼽힌다.
중급자 레벨로 올라서면 마이클 루이스의 논픽션 ‘머니볼’을 빠뜨릴 수 없다. 빌리 빈 오클랜드 단장이 불공평한 시장에서 어떻게 승리를 거두는지 그 과학적 기법을 완벽에 가까운 취재력으로 복원한다. 이 밖에 번역본이 적어 구하기 힘들지만 로버트 화이팅의 책들은 미국인의 관점에서 일본 야구를 바라본다. 따라서 일본을 이해하는 문화비평서로 읽힐 수 있다.
한국의 야구 영화로는 ‘YMCA 야구단’ ‘슈퍼스타 감사용’ ‘스카우트’ 등이 있다. ‘19번째 남자’(불더햄)도 추천하고 싶다. 마이너리그 팀의 애환을 다뤘는데, 주연을 맡은 팀 로빈스와 수전 서랜든이 이 영화에서 만나 결혼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연 케빈 코스트너는 이후 ‘꿈의 구장’(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블랙삭스 스캔들을 다뤘다) 등 여러 야구 영화에 출연하거나 직접 제작했다. 주제가가 더 유명한 찰리 신 주연의 ‘메이저리그’나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내추럴’도 대표적 야구 영화. 일본의 천재 각본가 구도 간쿠로가 쓴 ‘기사라즈 캐츠아이’도 야구를 소재로 흥겹고 독특한 이야기를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