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통상의 ‘선거문법’에 따르면, 지금 성격 규정 싸움이 한창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선거 성격을 규정하는 전선이 아직까지 없다. 야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는 국정심판이니, 중간평가니 하는 구호도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전례 없는 지지율 상승 때문이다. 흔히 재보선의 강자로 평가되던 야당이 오히려 곤궁하다. 사공도 없고, 노도 없는 나룻배처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민주당의 정세균 대표가 전승 각오를 다지지만 ‘천리 가겠다고 외치는 앉은뱅이 격’이다.
이기면 與·MB 2기 진용 승인받는 셈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서는 우리 정당의 부끄러운 후진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먼저 양당 공히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편법을 일삼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했거나, 아예 공천을 주지 않았던 사람까지 지역구를 바꿔 출마시키고 있다. 자기 부정이다. 당적 불문과 승복 무시의 관행도 여전하다. 이 당 저 당 오간 철새를 공천하고, 공천 탈락자의 무소속 출마도 익숙한 그림이다. 이 과정에서 당의 정체성은 흐려지고 규율은 땅에 떨어졌다.
민주당의 공천은 더 한심하다. 한나라당에서 옮겨온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 앞장선 사람, 친노 인사, 지역구를 옮긴 사람이 모두 민주당 후보로 나서고 있다. 어떤 정당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지는 인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재보선에 나서는 민주당 후보의 다양한 면면이야말로 민주당의 무(無)정체성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전체 흐름상 불리한데, 후보 구도까지 이런 식이라면 민주당으로선 승리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설령 이기더라도 승리의 의미를 담보해내는 것 역시 어려울 터다. 전형적인 ‘마이너스 공천’이다. 재보선의 정치적 의미는 상당히 크다. 지난 4·29 재보선은 정치 흐름을 바꿔놓았다. 선거 패배 후 한나라당에선 쇄신을 둘러싸고 당내 갈등이 불거졌다. 원내대표 경선을 놓고 친이(친 이명박계)와 친박(친 박근혜계) 간 표 대결도 벌어졌다. 대통령과 당 지지율이 하향세로 돌아섰으며, 연이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폭탄’도 맞았다.
뭔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놓은 해법이 ‘중도실용’과 ‘친서민’ 정책으로의 터닝이다. ‘중도실용’과 ‘친서민’은 잃어버린 지지도를 회복시켰다. 중도실용과 친서민에 걸맞은 인사로 진용도 새롭게 짰다. 내년 지방선거를 위한 전열이 거의 정비된 셈이다. 이번에 여권이 승리한다면 새롭게 바뀐 이명박 진용이 민심의 승인을 받는 셈이다.
문제는 여당이 패배하는 경우다. 패배의 양보다 질이 문제다. 예를 들어 당의 전 대표가 출마한 양산에서 여권 후보의 난립으로 패배한다면, 다른 당의 후보를 영입해 내세운 안산 상록을에서 진다면,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올인하고 있는 경기 수원 장안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충청 민심에 의해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에서 무너진다면 여권은 내부 갈등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특히 추가 옵션(options)이 별로 없는 이 대통령으로선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정몽준 대표체제의 무력함이 드러나는 것이고, 중도실용과 친서민 정책의 효과에 대한 의문이 생겨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여권 내 강경보수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상득 의원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정운찬 총리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낀다. 세종특별자치시 법안의 수정을 둘러싼 대립도 격화되고, 그럼 개헌이나 선거법 개정에서도 여권의 이니셔티브가 상당 부분 위축될 수 있다.
민주당은 10월7일 당무위원회의에서 재보선 공천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왼쪽부터 강릉 홍준일, 양산 송인배, 수원장안 이찬열 후보, 정세균 대표, 증평·진천·괴산·음성 정범구, 안산상록을 김영환 후보, 이강래 원내대표.
그렇다고 대놓고 어깃장을 부릴 수 있는 구도도 아니다. 내심 답답할 것이다. 이런 판에 여권이 재보선에서 진다면 그의 처지에서는 민심을 핑계로 할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 아니겠는가. 잘하면 당의 의사결정권을 사실상 좌우할 수 있는 위상을 회복할 수도 있다.
반대로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패한다면 이는 현 민주당에 대한 분명한 불신임이다. 그럴 경우 새로운 리더십 구축을 위한 당내 갈등이 촉발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여러 세력이 각축하고, 온갖 노선이 쟁명하게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민주당으로선 사실 진작 겪었어야 할 일이다.
野, 리더십 구축 갈등 촉발 가능성
현재 당의 혁신과 통합기구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원기 전 국회의장, 친노 세력의 구심점 노릇을 하는 이해찬 전 총리, 차기 대권주자나 서울시장 후보 경쟁에서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유시민 전 장관 등 ‘트로이카’의 행보가 특히 주목된다. 과거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도 이들 3인이 주도했다. 이런 점에서 그때의 프로세스가 이번에 재연될 수도 있다.
한편 정동영 의원은 당을 사실상 장악하려 들 것이다. 정 의원은 DJ 서거 국면 이후 호남 대표성을 확보했다. 이를 밑천 삼아 당권을 장악하고, 지방선거 공천권을 통해 당내 기반을 확충하려 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 만일 정세균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거나, 당이 친노체제로 가게 된다면 정 의원은 호남·충청연합 같은 ‘다른 그림’에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 정 대표나 친노체제에 반감을 갖는 이들과 자유선진당 내 일부 세력을 묶는 프로젝트 말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있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손 전 지사가 수원 장안에서 승리를 일궈내고, 당이 전체적으로 패배한다면 그는 꽃놀이패를 쥐게 된다. 승리의 여운을 안고 칩거를 계속할 수도 있으며, 승리의 기세를 타고 전당대회를 통해 당을 접수하려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친노세력이나 정 의원 세력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수원 장안에서 패한다면 당분간 침잠한 채 당내 세력구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보면서 연합 파트너를 물색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 가장 편하게 정치를 해온 그룹이 ‘386’이다. 송영길 최고위원을 필두로 하는 이들은 재보선 패배를 기점으로 기수론이나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정동영 손학규 정세균 이해찬 세대의 정치로는 민심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다. 송 최고위원 등이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얼마나 보여줄지는 미지수지만, 무기력한 현실 타개책 가운데 하나로 그 의미를 부각할 잠재력만큼은 있어 보인다.
10·28 재보선은 작지만 큰 선거다. 각 당이나 세력, 그리고 정치지도자에게 고빗사위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지켜보는 처지에선 이 계기를 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이 대목에서 닉슨의 말이 생각난다.
“정치는 뜻있는 자의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