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의를 표명했지만 아직 사임 절차가 진행 중인 홍 회장이 주목받는 데는 이번 대선이 문재인 대 반문재인의 양자택일 구도로 점점 굳어가고 있는 상황이 한몫한다. 보수층에서는 안보 불안감 등을 이유로 ‘문재인 비토’ 정서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 같은 여론을 수렴할 마땅한 후보가 떠오르지 않을 경우 홍 회장이 대선 국면 막바지에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홍 회장이 중앙일보와 JTBC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3월 18일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임직원에게 보낸 e메일에는 사실상 대선 출사표로 읽히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현실은 단지 그러한 작업만으로는 해결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중략) 그런 상황에서 저는 안타까움을 넘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략) 오랜 고민 끝에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로 결심했습니다.’
준비된 지도자?
올해 중앙일보를 통해 ‘리셋코리아’라는 어젠다를 제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것이다. 홍 회장의 글에서는 언론사주로서 ‘공정한 심판자’ 구실에 머물지 않고 직접 상황을 바꾸는 플레이어로서 자신의 좌표를 리셋(재설정)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풍긴다.홍 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닷새 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사흘 뒤 거취를 표명했다. 이렇듯 미묘한 시기에 발표한 것으로 미뤄볼 때 홍 회장이 대선에 출마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보는 시각도 적잖다.
“촛불이 내세운 강력한 메시지가 ‘이게 나라냐’였다면 ‘이게 나라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책임감을 느낀 거다. 정치인은 정권교체가 되면 ‘이게 나라다’ 하는 게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여러분은 동의하나. (중략) 촛불혁명이 명예혁명이 되려면 탄핵 이후 새로운 나라가 태어나야 한다. 시스템적으로도 그렇고, 관행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평소 나라 걱정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대선 출마설까지 나온 게 아닐까.”
홍 회장이 3월 19일자 ‘중앙선데이’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으로 스스로 대선 출마설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대선 출마를 명확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능력 등을 자연스럽게 홍보하며 ‘준비된 인물’이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려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영어와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5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과 재무부, 청와대, 한국개발연구원(KDI), 그 전엔 세계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한 경험 등 ‘정책을 다뤄온 사람’으로서 이력을 언급했다. 또 그는 “이번 대선 국면에서는 언론이 후보의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능력 검증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아무 자료도 가져오지 말고 하루 종일 TV토론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홍 회장이 대중적 인기도나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을 갖고 있지 않은 데다, 대선후보 이미지를 부각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에서 대선 출마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 주미 한국대사로 취임했다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대선후보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것이 대선후보로 나서는 데 큰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권출범준비위원장?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에 치르는 이번 대선에서 당선한 대통령은 인수위 없이 바로 임기를 시작해야 한다. 예선과 본선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대선캠프가 새 정부 출범 이후 곧바로 구체적인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선거운동은 경쟁자와 비교우위를 통해 한 표라도 더 얻어야 하는 상대평가인 반면, 국정운영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정책을 편 뒤 그 결과로 평가받는 절대평가적 성격이 짙다. 대선 때 정책이 ‘차별화’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면, 취임 후 선보일 정책은 ‘안정감’에 방점을 찍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얘기가 ‘문재인-홍석현 제휴설’이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문 전 대표를 대신해 홍 회장이 어젠다와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홍 두 사람 사이에서 가교 구실을 하는 인물로 문재인 캠프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에서 소장을 맡은 조윤제 서강대 교수가 지목된다. 참여정부 시절 문 전 대표와 조 교수가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고, 조 교수와 홍 회장은 같은 시기 주영 대사와 주미 대사로 각각 일했다. 홍 회장과 자주 접촉하는 한 지인에 따르면 홍 회장이 평소 조 교수를 가리켜 “좋은 경제학자”라고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참여정부 출신 한 인사는 “문 전 대표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시절 유엔 사무총장 후보 1순위로 홍 회장을 올렸고, 그 전단계로 주미 대사로 보낸 것으로 안다”며 “문 전 대표는 홍 회장이 경제도 잘 알고 외교와 남북문제에도 강점이 있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재인 캠프는 문-홍 제휴 시각에 대해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부인했다. 문재인 캠프의 한 핵심 인사는 “대선 과정에 (캠프 정책 분야에서) 후보의 정책 비전과 구체적인 실행 방안, 로드맵까지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정부에서 비서관을 지낸 또 다른 인사도 “홍 회장이 꾸리려는 싱크탱크가 과거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당시 JP처럼 본선 득표력에 영향을 끼쳐 당락을 가르는 필수불가결한 수준이라면 몰라도, 현재 대선 여론조사에서 여유 있게 앞서가는 문 후보가 굳이 제휴와 연대로 권력을 나누는 부담을 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손석희, “특정인 위해 복무 안 해”

홍 회장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운영하는 방송사 내부에서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종합편성채널 JTBC 손석희 뉴스앵커는 홍 회장의 사의 표명 이틀 뒤인 3월 20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통해 “저희는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며 “시대가 바뀌어도 모두가 동의하는 교과서 그대로의 저널리즘은 옳은 것이고, 그런 저널리즘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거나 복무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와 JTBC 내부에선 홍 회장의 향후 정치 행보 가능성을 우려하는 기류가 강하다. JTBC 한 기자는 “만약 이번 대선에 직접 출마하거나 정치적 행보를 한다면 언론사의 신뢰에 금이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며 “홍 회장이 시청자와 국민의 신뢰를 깎아내리는 그런 행보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한 중견기자는 “리셋코리아는 (중앙일보가) 언론사로서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어젠다를 제시하려는 뜻이 담긴 기획”이라며 “홍 회장 개인의 프로젝트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문재인 캠프나 여시재 측이 연관성을 부인하고 특정 지지정당도 뚜렷하지 않은 홍 회장은 아직까지 대선 가도에서 사실상 홀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선을 40여 일 앞둔 시점에 24년간 몸담았던 중앙일보를 떠나려는 홍 회장이 국민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할지, 아니면 싱크탱크를 만들어 차기 국정 최고책임자에게 ‘정책 세일즈’를 하려 할지, 아니면 순수 민간 싱크탱크에 그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