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인간을 구속하는가, 자유롭게 하는가. 예술작품은 모두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경험은 인식의 유일한 원천인가.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돼 있는가.
이상의 질문은 철학과 학부생의 리포트 제목이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 나왔던 문제들이다. 바칼로레아는 우리나라 입시교육이 이른바 ‘맞는 답’에 주안을 둘 때, ‘좋은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서구형 열린 교육의 전형을 보여주는 제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육이 일방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바칼로레아에 일정 수준 이상의 답을 제출하는 학생은 일부일 뿐, 다수의 학생은 여전히 텍스트에서 얻은 지식을 복제하는 데 열심이다.
하지만 바칼로레아의 사례에서 보듯 열린 교육의 지향점이 장기적으로는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고, 창의성을 배양할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웅진 프로네시스 펴냄)는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은 화려한 이슬람 병사의 옷처럼 허리에 ‘통합교과형 논술-SAT-심층면접을 위한 초강력 처방전’이라 쓰인 붉은 띠지를 두르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오히려 이 책의 존재가치를 떨어뜨린다. 요즘 많은 책이 기획 출판되다 보니 생긴 불가피한 현상이겠지만, 그래도 이 경우는 ‘책 허리’에 두른 띠지가 ‘기요틴’의 칼날처럼 여겨진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먼저 조중걸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독서를 하다 보면 가끔 저자에게 ‘질투’ 내지는 ‘열패감’을 느끼는데, 조 교수의 책을 접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저자는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에 프랑스로 유학해 파리 3대학에서 ‘서양문화사’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서양예술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사, 예술사, 철학사를 두루 섭렵하고 피날레는 수학철학으로 마무리지었다니 이쯤 되면 솔직히 징그러운 이력이다. 이런 그가 이 책을 쓴 동기가 설마 ‘통합교과 논술 완전정복’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 답은 당연히 ‘네버’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유학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저자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동기들은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며 고등학교 때 이미 ‘문, 사, 철’을 섭렵한 친구들이었다. 다시 말해 상대가 안 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학 시절 내내 낯선 고전을 독해하기 위해 독학을 해야 했다. 대개의 사람이 고생했던 기억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그는 토론토 대학 교수로 있으며 그때의 경험, 고전 강독이나 독해 경험 부족이 만든 시행착오의 기억을 잊지 않고 후학에게 길잡이가 되고자 독한 마음 먹고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 사회, 예술, 역사, 과학 분야 최고의 고전들을 읽고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장을 골라 직역한 뒤, 그것을 다시 철학자의 눈으로 해설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유명한 책은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원문의 핵심 문장을 옮긴 다음, 저자가 그것을 직역하고 다시 해설하는 절차를 거쳤다. 또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지성과 본능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주제로 정리했다. 그 결과 무려 철학 3권, 예술 2권, 사회 2권, 역사 2권, 과학 1권, 총 10권의 책이 묶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시리즈)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기가 질리고 만다. 아무리 철학을 전공한 교수지만 이 정도의 지적 반경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이 책은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인문사회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학생이 아니라면 고등학생용으로는 적절치 않지만, 대신 ‘지적 기아’에 허덕이는 일반인에게 뜨거운 탐구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다. 이 말릴 수 없는 초절정 지식인 조중걸 교수가 최근에 익명으로 다른 저작물을 한 권 출판했는데, 익명으로 낸 이유가 있을 듯해 굳이 여기서 책 이름을 ‘폭로’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기로 했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이상의 질문은 철학과 학부생의 리포트 제목이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 나왔던 문제들이다. 바칼로레아는 우리나라 입시교육이 이른바 ‘맞는 답’에 주안을 둘 때, ‘좋은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서구형 열린 교육의 전형을 보여주는 제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육이 일방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바칼로레아에 일정 수준 이상의 답을 제출하는 학생은 일부일 뿐, 다수의 학생은 여전히 텍스트에서 얻은 지식을 복제하는 데 열심이다.
하지만 바칼로레아의 사례에서 보듯 열린 교육의 지향점이 장기적으로는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고, 창의성을 배양할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웅진 프로네시스 펴냄)는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은 화려한 이슬람 병사의 옷처럼 허리에 ‘통합교과형 논술-SAT-심층면접을 위한 초강력 처방전’이라 쓰인 붉은 띠지를 두르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오히려 이 책의 존재가치를 떨어뜨린다. 요즘 많은 책이 기획 출판되다 보니 생긴 불가피한 현상이겠지만, 그래도 이 경우는 ‘책 허리’에 두른 띠지가 ‘기요틴’의 칼날처럼 여겨진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먼저 조중걸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독서를 하다 보면 가끔 저자에게 ‘질투’ 내지는 ‘열패감’을 느끼는데, 조 교수의 책을 접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저자는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에 프랑스로 유학해 파리 3대학에서 ‘서양문화사’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서양예술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사, 예술사, 철학사를 두루 섭렵하고 피날레는 수학철학으로 마무리지었다니 이쯤 되면 솔직히 징그러운 이력이다. 이런 그가 이 책을 쓴 동기가 설마 ‘통합교과 논술 완전정복’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 답은 당연히 ‘네버’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유학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저자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동기들은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며 고등학교 때 이미 ‘문, 사, 철’을 섭렵한 친구들이었다. 다시 말해 상대가 안 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학 시절 내내 낯선 고전을 독해하기 위해 독학을 해야 했다. 대개의 사람이 고생했던 기억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그는 토론토 대학 교수로 있으며 그때의 경험, 고전 강독이나 독해 경험 부족이 만든 시행착오의 기억을 잊지 않고 후학에게 길잡이가 되고자 독한 마음 먹고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 사회, 예술, 역사, 과학 분야 최고의 고전들을 읽고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장을 골라 직역한 뒤, 그것을 다시 철학자의 눈으로 해설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유명한 책은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원문의 핵심 문장을 옮긴 다음, 저자가 그것을 직역하고 다시 해설하는 절차를 거쳤다. 또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지성과 본능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주제로 정리했다. 그 결과 무려 철학 3권, 예술 2권, 사회 2권, 역사 2권, 과학 1권, 총 10권의 책이 묶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시리즈)이다.
<b>박경철</b>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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