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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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꿈 못 이루고 전설의 스파이 사라지다

KLO 부대활동, 황장엽 망명 성사시킨 이연길 씨 타계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09-04-29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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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꿈 못 이루고 전설의 스파이 사라지다

    건강할 때의 이연길 씨.

    1992년 2월12일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을 성사시킨 ‘전설의 에이전트’ 이연길 북한민주화협의회 회장이 지난 4월21일 82세로 타계했다. 그러나 빈소는 그의 업적에 걸맞지 않게 쓸쓸했다.

    원산이 고향인 이 회장의 꿈은 조국통일이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국정원에 기대지 않고 ‘자발적’ ‘창의적’으로 대북공작을 했다. 한중수교 직후에는 재미동포들에게서 지원받은 의약품 두 컨테이너를 갖고 중국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약품의 일부를 팔아 공작금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북한에 전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에 ‘망원’을 심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미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한 의약품이 불법 유통되는 것을 막고자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약품만 지원한다. 그런데 이 회장이 가져간 의약품은 컨테이너의 중국 통관이 늦어지면서 유효기간이 지나버렸던 것이다. 이 회장은 이를 모르고 중국의 북한 공작조직과 접촉했는데, 그들은 바보는 아니었지만 ‘돈맛’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왜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주느냐”면서 시비를 걸고, 이 회장이 애써 북한에 심어두려 한 망원을 의심했다. 위험을 느낀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지났어도 의약품의 약효는 일정 기간 유지된다는 사실을 아는 북한 공작조직은 빼앗은 의약품을 북한으로 보내 일부는 ‘장사’하고 일부는 김정일에게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 회장의 성공작인 황장엽 망명은 3년의 노력 끝에 이룬 것이다. 사업가로 위장해 중국을 오가던 그는 1994년 한 망원을 통해 역시 사업가로 위장해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의 김덕홍 여광무역 대표를 만났다. 고향 이야기를 하며 두 사람은 의기상통했다.



    김 대표는 황장엽 비서의 최측근이었으므로 이 회장은 ‘우연’을 가장해 베이징에 나온 황 비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조국통일 방안을 논의한 것이 어언 2년. 이 회장과 ‘통’한다는 것을 안 황 비서는 자신의 통일 방안을 적은 다량의 글을 건넸는데, 이 글은 황 비서 망명 직후 한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되면서 ‘북한에도 반체제 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있다’는 충격을 줬다.

    이 회장은 황 비서를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다. 1995년 재미 사업가 백영중 씨가 황 비서의 초청으로 북한에 가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 회장은 97년 황 비서가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자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백 회장이 보답하는 마음으로 30만 달러를 전달하고자 한다’고 임의로 적은 쪽지를 북한 조직원을 통해 반(半)공개적으로 황 비서에게 전달했다. 베이징 북한 대사관에 있던 황 비서가 의심을 받지 않고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는 황 비서를 준비해둔 차에 태워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모심’으로써 역사적인 공작을 성공시켰다.

    이 회장의 반공투쟁은 평생을 관류한 주제다. 6·25전쟁 때 그는 형 연복 씨를 따라 KLO(주한연락처·Korea Liaison Office, 일명 ‘켈로’) 소속 해상 고트(Goat)부대에서 활동했다. 서해상 백령도를 최후방으로, 대동강 하구의 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활동한 해상 고트부대는 북한 공군 조종사 문덕삼을 납치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전쟁 물품을 운반하던 중국 선박을 나포했다. 그리고 압록강 하구 수운도로 침투해 북한 경비정을 끌고 오는 작전을 펼쳤는데, 이때 벌어진 총격전에서 형이 전사하는 바람에 그가 해상 고트부대를 이끌게 됐다.

    KLO 대원은 대개 북한 출신의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는 KLO 부대에서 활동하며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훗날 부산에서 개업의를 하게 된 부인과 결혼했다. 부인이 의사인 덕택에 그는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반북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그의 활동무대도 좁아들었다. 그러다가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그는 다시 투쟁의 봄날을 맞았다. 하지만 면도날처럼 날렵하게 일을 처리하던 그도 ‘평생의 소원’인 통일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첫날 빈소를 찾은 사람 가운데는 그 덕분에 대한민국 국민이 된 황장엽 씨도 있었다. 그런데 훈장이 놓여 있어야 할 빈소 앞에는 흰 국화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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