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의 젊은 남녀들은 수시로 열리는 육상대회에서 달리기를 맘껏 즐긴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환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육상 약소국으로 자메이카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난 한국 단거리 대표팀이 그랬다. 남녀 육상 단거리에서 세계 최강 미국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자메이카는 우리 육상 선수들에게 ‘환상의 나라’였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현실은 달랐다. 그래도 ‘희망 찾기’엔 성공했다. 17명의 한국 선수들은 1월28일부터 3월 말까지 자메이카에서 ‘단거리 유학’을 하고 있다. 그 현장에 함께 다녀왔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미국 뉴욕이나 마이애미를 거쳐 자메이카로 향하는 여정부터가 힘들었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간까지 20시간이 넘게 걸린다. 한국과 자메이카의 시차는 14시간. 밤과 낮이 완전히 바뀐다. 자메이카는 평균기온이 22~32℃로 더운 나라이며 경제 규모는 세계 100위 정도다. 국민들의 삶은 생각보다 열악하다. 한국에겐 ‘오지’나 다름없는 곳.
‘우사인 볼트’ 배출한 단거리의 왕국
“사실 볼트가 올림픽에서 세계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 왔겠습니까. 처음 와서 보고는 정말 실망했어요. 날씨는 덥지, 음식도 안 맞지, 훈련시설도 열악하지….”
육상대표팀 서말구 감독의 자메이카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는 달리 자메이카 국민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특히 육상에 대한 애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2월22일 자메이카 킹스턴의 내셔널스타디움에서 열린 서인도대학(UWI) 초청 육상경기대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12세부터 성인까지 20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이 가운데 75%에 이르는 1500여 명이 100m를 달렸다. 그만큼 100m는 자메이카 최고의 인기 종목이다. 청소년 세 그룹(14세, 16세, 18세 이하)과 성인그룹으로 나뉜 경기는 4~5시간에 걸쳐 계속됐다. 스타터는 1, 2분 간격으로 출발 총성을 울렸다. 진행이 원활하지 않아 경기가 수시로 중단됐지만 참가자나 관객은 개의치 않았다. 달리는 것 자체를 즐겼다.
응원도 독특했다. 보통 단거리달리기를 하면 관중석에선 조용히 하는 게 예의지만, 자메이카의 영웅 볼트가 남자 400m 결승에 출전해 달리자 팬들은 발로 스탠드 바닥을 쿵쿵 찧어대며 함성을 쏟아냈다.
‘꿈나무’에 대한 배려도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허들 종목을 예로 들어보자.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규정상 여자부는 100m와 400m가 정식 종목이다. 그런데 자메이카에선 여자부에 70m와 80m, 300m 종목이 있다. 각각 12세와 14세, 그리고 18세 이하 선수들을 배려해 거리를 조정한 것. 남자부는 110m 허들을 나이에 따라 허들의 높이를 조정해 어린 선수들도 쉽게 뛸 수 있게 했다. 6~10세 아이들이 달릴 수 있도록 50m와 60m 릴레이 경기도 만들었다.
자메이카에선 매주 토요일 2~5개의 육상대회가 열린다. 6월까지 총 43개 대회가 예정돼 있고, 대회마다 2000~3000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자메이카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10년 ‘자메이카 챔프스’(전국 고교육상대회)를 설립해 일찌감치 육상 강국의 기반을 다져왔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이 공인한 자메이카 공과대학의 상급자 훈련장(HPTC)이 잔디 트랙이라면 믿겠는가. 볼트와 남자 100m 전(前) 세계기록 보유자 아사파 파월도 여기서 훈련한다. 한국 대표팀이 훈련하는 서인도대학 훈련장 트랙도 잔디.
시설이 이 정도이리라고는 한국에선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잔디 트랙은 자메이카 단거리의 힘이었다. 식민지 시절 영국이 전국에 크리켓 잔디 구장을 많이 지었는데, 육상선수들은 해방 후 그 잔디 운동장에 트랙 선만 그어 훈련을 해왔다. 어려운 경제여건과 환경 탓에 잔디 트랙에서 훈련했지만 그게 오히려 단거리 실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한국 단거리 육상대표팀 선수들이 자메이카 공과대학 잔디 트랙에서 포즈를 취했다(좌).100m, 2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왼쪽)와 양종구 기자(우).
잔디는 표면이 불규칙해 발과 다리의 잔근육을 키워준다. 또 지면이 부드러워 같은 강도의 훈련을 받아도 더 힘들다. 게다가 딱딱한 화학 재질 트랙보다 부상 위험이 작다. 지난해 11월부터 HPTC에서 훈련 중인 한국 허들의 간판 이정준(안양시청)은 “잔디에서 훈련하는 효과가 크다. 지금은 좀 힘들지만 조만간 몬도나 우레탄 트랙으로 옮기면 좋은 기록을 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단거리 대표주자 임희남(광주시청)은 “처음엔 깜짝 놀랐는데 계속 잔디에서 훈련하니 다리에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여기에서 연습하다 전문 트랙에서 뛰면 신기록을 낼 것 같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정호 대표팀 코치도 “잔디 트랙의 힘을 발견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이 훈련 방법을 계속 이어갈지 고민이다”고 말했다.
자메이카에서 잔디 트랙만큼이나 유명한 게 주식(主食)인 ‘얌’이다. 우리의 마와 비슷한 식물성 먹을거리로 감자와 비슷한 맛이 난다. 볼트가 “나는 얌을 많이 먹어 잘 달린다”고 말해 관심을 끈 바 있다. 탄수화물이 많아 단거리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는 체내 글리코겐을 축적하기에 좋다. 그래서 식사 때마다 얌이 나온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도 하루 2회 이상 얌을 먹었다.
자메이카 단거리 선수들은 오래전부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대부분 미국 등으로 ‘육상 유학’을 떠났다. 경제여건과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여 년 전 정부가 나서 단거리 선수를 집중 육성하는 자메이카 공과대학을 만들고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면서 이젠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좋은 지도자도 많이 배출됐다. 자메이카 공과대학에선 280여 명의 단거리 선수를 집중 육성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육상 단거리에서 자메이카에 참패한 육상 강국 미국이 2012년 런던올림픽 보고서를 쓰는 등 ‘자메이카 배우기’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