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도키오</B>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창해 펴냄/ 474쪽/ 1만2000원
그런데 아뿔싸, 우리 소설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바로 추리소설이 아닌가. 물론 주인공은 거의 존재감이 사라진 과거의 우리 추리소설이 아니다. 나는 출판영업자로 일하던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런 소설들을 열심히 읽었다. 일주일 안팎의 출장 기간에 50여 권을 읽었을 정도니 얼마나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작가마저 작품이 나올 때마다 섹스를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살인의 강도를 높이기만 할 뿐, 늘 비슷한 이야기 구조의 소설만 연달아 내놓는 바람에 어느 순간부터 책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90년대 중반에는 마이클 크라이턴, 존 그리셤, 로빈 쿡 등의 지적 추리소설이 붐을 이루는 바람에 나의 관심도 그런 소설로 자연스럽게 옮아갔다.
지금 출판시장에서 주로 유행하는 소설은 미국발 팩션(faction)과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이다. 물론 ‘바람의 화원’ ‘뿌리 깊은 나무’를 쓴 이정명을 비롯한 한국형 팩션 작가의 소설도 간간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한국 소설시장은 일본 추리소설이 휩쓸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최근 몇 년간 추리소설의 힘이 무척 커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때 ‘일류(日流)’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던 일본 소설은 그 기세가 많이 꺾였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요코미조 세이시 등의 추리소설은 마니아층을 늘려가며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발표문을 쓰기 전에 일본 소설 몇 편을 읽어보았다. 그중 하나가 최근 국내에 번역본이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도키오(時生)’다.
도키오는 몸의 각 부위가 점점 마비되면서 결국 10대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을 갖고 태어나, 17세 무렵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주인공이다. 소설은 식물인간인 도키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아버지 미야모토 다쿠미가 약 20년 전에 만났던 한 소년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 다쿠미는 변변한 직장 하나 갖지 못했으면서도 늘 크게 한판 벌이겠다고 큰소리치는 23세의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온다. 그가 바로 형편없는 아버지를 도와주려고 미래에서 온 아들이다.
어느 날 다쿠미의 연인 치즈루가 사라지고, 다쿠미는 그녀의 뒤를 쫓는 남자들과 얽히게 된다. 다쿠미는 도키오와 함께 치즈루를 찾으러 오사카로 떠난다. 취업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한 다쿠미에게 실망하고 치즈루가 대신 선택한 남자 오카베는 국가적 비리를 저지르고 도피를 선택한 인물이었다. 비리를 은폐하려는 조직들이 달려들어 치즈루와 오카베를 찾기 시작하면서 치즈루의 잘못된 선택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결국 치즈루는 다쿠미와 도키오의 도움을 받아 국가적 범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다쿠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버린’ 어머니와도 화해한다. 그는 뒤늦게 도키오가 미래에서 온 아들임을 깨닫지만 터널 속 연쇄추돌 사고가 일어나면서 도키오와 헤어지고 만다.
영혼이 시간을 날아다니고, 더구나 미래에서 온 영혼의 도움을 받아 역사를 새롭게 구축한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과 글솜씨로 말미암아 이런 가상이 현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설은 박진감이 넘친다. 나는 474쪽이나 되는 이 소설을 잡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히가시노의 모든 소설을 읽어볼 결심을 하고 이미 여러 권을 구해놓았다.
‘도키오’는 대부분의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처럼 나와 가족이라는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룬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개인이 우연히 겪게 되는 모든 사건이 결국 사회적 문제와 결부돼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정통소설이 다루기에는 쉽지 않은 소재다.
오늘날 1인용 미디어를 즐기는 개중(개인+대중)은 국경을 넘나드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힘이 언제나 자신을 옥죄는 것을 절감하며 산다. 개중은 이제 나 또는 가족의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첨예한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렬한 고발로 연결되는 소설을 읽으면서 균형 잡힌 사회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추리소설에 빠져드는 이유라는 걸 ‘도키오’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