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
현대의 서정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예컨대 시인 황동규가 낡은 차 몰고 강원도 험준산령을 달리다가, 정선 화암리 몰운대를 향해 달리다가 문득 브레이크를 걸고는 다음처럼 시 하나 매만질 때, 그마저도 요즘 시정의 어떤 풍경처럼 물 좋고 경치 좋은 곳, 완상하러 다니는 마음은 아닌 것이다.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이 서로 머리 맞댄 곳/ 자글자글대는 엔진을 끄고 차를 내려 내려다보면/ 소나무와 전나무의 물결/ 가문비나무의 물결/ 사이사이로 비포장도로의 순살결/ 저 날것/ 도는 군침!
- 황동규 ‘몰운대행’에서
선조 5년 회재 기리기 위해 사당과 누각 등 건립
경북 경주시 북쪽 안강읍에 가면, ‘안강(安康)’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유래하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아늑한 산과 너른 평야와 폭 넓은 물이 상응하여, 미술 교과서나 은행에서 나눠주는 새해 달력이나 그도 아니면 허름한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모든 ‘산수화’가 혹시 이곳에 와서 그린 것이 아닐까 싶은 풍경이 펼쳐진다.
안강읍의 북동부 쪽으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고 무릉산이며 도덕산 같은 해발 500m 안팎의 넉넉한 능선이 감싸고 있으며 이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육통리, 안강리, 산대리 일대를 적시면서 남서쪽으로 흘러 형산강에 합류하여 동해로 나간다. 신라 경덕왕 때 마을 주민들의 평안을 염원하는 뜻에서 ‘安康’으로 칭하였는데, 그 너른 들판의 소나무들 밑에서 가만히 세상을 바라보면, 눈앞의 정경들은 실로 ‘편안하고도 편안한’ 안강이다. 물론 임진란이나 6·25전쟁 때 큰 화를 겪지 않은 바 없고 지금은 읍내 건물마다에 다방이 거점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사방의 산과 들과 물은 가만히 품어주고 있는 것이다.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은 안강의 드넓은 산야에서도 가장 그악하고도 은일한 곳에 자리한다. 조선 영남 사림의 적통을 잇는 이언적은 위로는 점필재 김종직이며 아래로는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그 한가운데 적통자인데, 사적 제154호인 옥산서원은 선조 5년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사당과 동재, 서재, 강당, 누각을 세운 것이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단행할 때도 47개 서원은 남겨두었으니 그 하나가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의 여러 풍경.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옥산서원은 화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언적은 개국 초기의 공신파 그늘이 차차 흐려지고 산천에 은거하던 사림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던 무렵에 태어난 사람으로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갖가지 방책을 세웠던 인물이다. ‘수신제가’에 관하여 오래 연마한 공부가 ‘치국평천하’로 확장되면서 경세가로서의 면모까지 보였으나 파직, 복직, 유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상적 면모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론과 그 현실적 근거인 윤리 문제로 이어지면서 깊은 논변의 사상가가 되었다.
그와 같은 면모가 옥산서원의 장서 현황으로 알 수 있다. ‘보관과 보안’이라는 문제 때문에 옛 사정과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옥산서원의 ‘어서각’과 ‘독락당’의 보유록으로는 임금이 하사한 서책 503종 2847책과 깊은 공부를 위해 이언적이 집성한 363종 1264책이 있고 그 밖의 교유록들이 남아 있다. 1537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타계했다. 지은 책으로 ‘구인록’ ‘중용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이 있다.
유람하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평강한 기운 넘치는 곳
이언적은 55세 때 을사사화를 당했다. 권신들의 훈작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와 관련된 양재역 벽서(대자보)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를 떠났다. 그곳은 세종 때에 와서야 조선의 국경선 안에 포함된, 찬바람 부는 북녘의 압록강변 마을이었고 그곳에서 이언적은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그래서 다시 옥산서원을 둘러보며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아계 이산해 등 당대의 명필과 문장가, 사상가들이 깊은 정성으로 편액의 글씨를 쓴 ‘옥산서원’ ‘무변루’ ‘해립재’ ‘양진재’ ‘어서각’ ‘독락당’ 등을 보면, 이 편안하고 강건한 마을의 산야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큰 나무와 넓은 숲, 그 옆으로 흐르는 물들이야 ‘산천경계’를 유람하는 자에게 더없이 평강한 기운으로 다가오지만, 그 안의 사적과 책들을 감안하면 ‘아침저녁으로 슬퍼하며 보는 앞마을/ 먼 타향 봄의 끝자락, 돌아갈 마음 잘라지니/ 녹색 버들 붉은 꽃이 모두 내 혼을 끊는구나’ 같은 유배시는 물론, 47세 때 중앙 관가로 다시 나가면서 지은 시도 그저 한가로운 서정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江沈山影魚驚遁/ 강에 산 그림자 깊으니 고기 놀라서 숨고
峯帶煙光鶴危悽/ 산에 부연 기운 가득하니 학도 두려워하네
物寒固宜述幻忘/ 만물이 막히어 모두 허황으로 미혹되니
人通何事誤東西/ 사람들은 어찌 동서도 분별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