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나 ‘Barunson 0.38mm Gung’, ‘Bic Marking Ultra Fine Point Permanent Marker’, ‘Artline Drawing System 0.1, Shachihata EK-231 4-974052-853029’(왼쪽부터)
그런데 예외의 경우가 생겼다. 바로 작가 박미나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청년 화가인 박미나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한다. …박미나의 작업에는 과학자 같은 무언가가 있고 시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또 어느 정도는 코미디언 같은 부분도 있다.” 작가가 유학시절 공부했던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대학(RISD) 리처드 머킨 교수의 말이다.
처음 박미나의 작업을 본 것은 2003년 쌈지스페이스에서였다. 당시 출품했던 작품 ‘오렌지 페인팅’이 기억에 남는다. 알파사, 골든사, 르프랑사, 리퀴텍스사 같은 온갖 물감회사에서 출고된 카드뮴 오렌지, 비비드 레드 오렌지, 브릴리언트 오렌지 등 이름에 ‘오렌지’가 들어 있으면 모두 사들인 뒤, 높이 3cm의 가로 색띠를 그려낸 작품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바이올렛 계열, 블루 계열, 그레이 계열, 화이트 계열 등의 연작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특정 지역에서 채취한 인공 색상을 수집해 색띠를 그린 상하이의 ‘창화길 826번지에서 모가샨길 50번지까지’와 안양 아파트단지의 육교 ‘평촌로를 따라서’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박미나 ‘오렌지 리스트’, 캔버스에 아크릴릭(2002)
그리고 작가는 같은 갤러리에서 2년여 만에 이전 전시와 대구를 이루는 듯한 ‘BLUE, GREEN and RED’전을 개최한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메운 액자 속에는 그동안 작가가 수집한 각기 다른 밀도를 가진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 펜들이 뽑아내는 가로선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평론가 임근준이 “다이어그램을 그리며 자동 전진하는 개념적 원근법의 색채수집기계”라고 지목했던 것처럼, 박미나는 현존하는 색채를 편집증적으로 수집하고 수집된 색채들을 다이어그램을 통해 재조합해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딩뱃 폰트를 이용한 작업이나 작가 44[Sasa]와의 공동작업 등을 다른 전시에서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물감이 가진 물성이라기보다 오히려 색채와 기호 등 회화 이전의 시각언어의 기본 요소에 천착해왔다고 볼 수 있겠다. 전시는 8월23일까지 김진혜갤러리에서 열린다(문의 02-725-6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