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 브라더스의 로고가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하더니 총천연색 무지갯빛으로 변한다. 어라,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는 워너 브라더스의 로고부터 시작이 아니던가. ‘매트릭스’ 때도 그 유명한 불길한 녹색이 워너의 로고를 물들이면서, 우리는 ‘매트릭스’의 신천지로 경천동지할 여행을 시작했었다. 저 호화찬란한 원색의 색감을 보니 드는 예감. 이제 놀이공원에서 기어에 시동 걸고 무한한 속도에 몸을 맡기듯 영화에 몸을 맡길 시간이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 여행은 총천연색 디즈니랜드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것 같은 느낌이겠구나.
물론 이어지는 장면들은 사이키델릭한 스피드랜드, 온갖 잡동사니 문화를 섞어 만든 자동차 게임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것이다. 현란한, 입을 다물지 못할, 거대한, 압도적인 시각적 이미지들. 레이싱 카들이 레인 위를 질주하면 나의 두 다리에도 네 바퀴가 솟아오를 것 같은 생동감. 이것은 종지만한 찻잔 속에 잠겼던 일본의 스몰 사이즈 문화를 미국의 빅버거 사이즈로 재편한 퓨전 요리다. ‘스피드 레이서’의 시각혁명은 가히 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미래지향적이다.
관중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선수가 탈의실에서 다리를 떨고 있다. 어려서부터 머릿속에 레이싱만이 전부였던, 이름도 레이싱 자체인 스피드 레이서. 그는 범죄집단에서 일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 렉스의 뒤를 이어 레이싱계의 샛별로 떠오른다. 그의 승리는 형을 잃고 시름에 잠겼던 스피드의 가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점화한다. 스피드의 가족, 어릴 적 친구인 트릭시와 자동차 설계사인 아버지,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침팬지 침침까지 전 가족이 가족회사 레이서 모터스의 직원이기도 하다. 마침 스피드에게 눈독 들인 대기업 로열튼의 스카우트를 거절하면서 이 가족은 모종의 음모 속으로 돌진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단 한 가지, ‘속도’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원작인 요시다 다쓰오의 만화 ‘마하 고고고’가 자그마치 40년 전인 1967년에 52부작 시리즈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인 점을 감안할 때, 워쇼스키는 이 고전 애니메이션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1970년대 상영된 만화 ‘달려라 번개호’가 바로 ‘마하 고고고’의 한국 제목이다). 1992년 제작자 조엘 실버의 손 아래 시작된 프로젝트는 그동안 거쳐간 감독만 해도 구스 반 산트, 알폰소 쿠아론 등 10명이 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광인 워쇼스키 형제의 손에서 ‘스피드 레이서’의 콘셉트는 인공적 이미지들의 집합체를 어마어마한 속도로 풀어내는 놀이공원 콘셉트로 낙착을 보았던 것 같다. 형제는 완벽한 인공적 이미지의 향연, 모든 장면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도배하면서 현실적인 느낌은 손톱만큼도 가미하지 않은 채 매트릭스의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게임, 만화, 영화의 새로운 퓨전 장르를 창조한 것이다.
1967년작 만화 ‘마하 고고고’가 원작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선더 헤드’ 트랙부터 시작한 오감 총동원의 자동차 질주는 또 다른 매트릭스 세계의 구현이다. ‘마하 5’를 타고 질주하는 랠리 ‘카사 크리스토’는 얼음 절벽과 깎아지르는 산을 넘나들고, 마지막 그랑프리 대회에서 레이싱 카들은 트랙을 벗어나 서로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공중에서 환상의 제비돌기로 물리적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는다. 그 옛날 ‘벤허‘의 전차경주처럼 상대 바퀴를 감아도는 톱날이 자동차 바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상대방 차를 이단옆차기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철학자들의 잉크반점’이라 불렸던 ‘매트릭스’ 때와는 사뭇 다르게 가족의 소중함, 금권을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는 대기업의 횡포, 조작된 레이싱의 세계 등 고전적 주제들을 건드리는 데서 영화는 끝나버린다. 이야기 투르기 자체가 스피드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여러 종류의 ‘문 앞의 손님’들이 가족들에게 새로운 기회와 위기를 가져오는 것으로 단순 반복되는 데 그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 때 우리 배우 ‘비’와 ‘박준형’의 등장이 주는 신기함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 ‘비’는 주인공 스피드와 경쟁적 위치에서 협력과 대결을 반복하는 일본인 ‘태조’ 역으로, 박준형은 ‘스피드’를 위협하는 그랑프리 랠리의 전사로 할리우드의 옷을 입었다. 비록 조연이지만 대한민국 출신의 배우들이 할리우드 스타들과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을 목도하는 일은 새로운 감흥과 씁쓸함을 교차하게 한다. 그것은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세상에선 누구도 한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 예감과, 그럼에도 세계적 스타의 문턱에 들어선 한 배우를 보는 감회 같은 것이리라.
비와 박준형 조연 출연 ‘또 다른 볼거리’
결국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가 너무 인공적이라서 오히려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기이한 ‘거리두기’의 힘까지 느끼게 한다. 워쇼스키 형제는 과잉의 이미지들로 끊임없이 ‘이것은 가짜다, 이것은 판타지’라는 자의식을 심어주려 든다. 모든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과잉의 포화상태 지점으로 관객들을 내몰아 거기에는 소비되는 이미지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그저 ‘스피드 레이서’에 빨려들어가 자신을 잊어버리겠지만, 다른 관객들은 판타지의 매몰보다는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를 관망하는 기이한 힘마저 생긴다. 영화를 구경이 아닌 사색 차원에서 보면, 게임과 만화와 영화가 유기적으로 뭉쳐져 있다. 어떤 경계도 없이 시공을 넘나드는 ‘스피드 레이서’가 오래된 미래, 미래 영화의 어떤 실마리라는 사실이 의심할 바 없이 만져진다.
그러니 이 욕지기 나는 감각의 제국을 어찌하랴. 거대한 문어처럼 아시아의 문화를 모두 빨아들여 자기화하는 할리우드판 욕망의 제국을 어찌하랴. ‘스피드 레이서’는 감각의 촉수를 간단없이 자극해 결국 멍하게 만들어버리는 자극의 극한이 무엇인지 내게 배우라 한다. 미래 관객들은 모든 영화를 다 이런 식으로 소비하게 될까? ‘스피드 레이서’ 속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그랑프리를 담은 흑백 2D 화면이 왈칵 반가웠을 때, ‘스피드 레이서’는 미래 영화에 대한 근심이자 희망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근심이자 절망스런 희망, 오래된 미래와 앞서가는 과거가 거기, 현기증 나는 감각의 제국 앞에 놓여 있다.
물론 이어지는 장면들은 사이키델릭한 스피드랜드, 온갖 잡동사니 문화를 섞어 만든 자동차 게임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것이다. 현란한, 입을 다물지 못할, 거대한, 압도적인 시각적 이미지들. 레이싱 카들이 레인 위를 질주하면 나의 두 다리에도 네 바퀴가 솟아오를 것 같은 생동감. 이것은 종지만한 찻잔 속에 잠겼던 일본의 스몰 사이즈 문화를 미국의 빅버거 사이즈로 재편한 퓨전 요리다. ‘스피드 레이서’의 시각혁명은 가히 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미래지향적이다.
관중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선수가 탈의실에서 다리를 떨고 있다. 어려서부터 머릿속에 레이싱만이 전부였던, 이름도 레이싱 자체인 스피드 레이서. 그는 범죄집단에서 일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 렉스의 뒤를 이어 레이싱계의 샛별로 떠오른다. 그의 승리는 형을 잃고 시름에 잠겼던 스피드의 가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점화한다. 스피드의 가족, 어릴 적 친구인 트릭시와 자동차 설계사인 아버지,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침팬지 침침까지 전 가족이 가족회사 레이서 모터스의 직원이기도 하다. 마침 스피드에게 눈독 들인 대기업 로열튼의 스카우트를 거절하면서 이 가족은 모종의 음모 속으로 돌진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단 한 가지, ‘속도’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원작인 요시다 다쓰오의 만화 ‘마하 고고고’가 자그마치 40년 전인 1967년에 52부작 시리즈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인 점을 감안할 때, 워쇼스키는 이 고전 애니메이션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1970년대 상영된 만화 ‘달려라 번개호’가 바로 ‘마하 고고고’의 한국 제목이다). 1992년 제작자 조엘 실버의 손 아래 시작된 프로젝트는 그동안 거쳐간 감독만 해도 구스 반 산트, 알폰소 쿠아론 등 10명이 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광인 워쇼스키 형제의 손에서 ‘스피드 레이서’의 콘셉트는 인공적 이미지들의 집합체를 어마어마한 속도로 풀어내는 놀이공원 콘셉트로 낙착을 보았던 것 같다. 형제는 완벽한 인공적 이미지의 향연, 모든 장면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도배하면서 현실적인 느낌은 손톱만큼도 가미하지 않은 채 매트릭스의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게임, 만화, 영화의 새로운 퓨전 장르를 창조한 것이다.
1967년작 만화 ‘마하 고고고’가 원작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선더 헤드’ 트랙부터 시작한 오감 총동원의 자동차 질주는 또 다른 매트릭스 세계의 구현이다. ‘마하 5’를 타고 질주하는 랠리 ‘카사 크리스토’는 얼음 절벽과 깎아지르는 산을 넘나들고, 마지막 그랑프리 대회에서 레이싱 카들은 트랙을 벗어나 서로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공중에서 환상의 제비돌기로 물리적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는다. 그 옛날 ‘벤허‘의 전차경주처럼 상대 바퀴를 감아도는 톱날이 자동차 바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상대방 차를 이단옆차기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철학자들의 잉크반점’이라 불렸던 ‘매트릭스’ 때와는 사뭇 다르게 가족의 소중함, 금권을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는 대기업의 횡포, 조작된 레이싱의 세계 등 고전적 주제들을 건드리는 데서 영화는 끝나버린다. 이야기 투르기 자체가 스피드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여러 종류의 ‘문 앞의 손님’들이 가족들에게 새로운 기회와 위기를 가져오는 것으로 단순 반복되는 데 그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 때 우리 배우 ‘비’와 ‘박준형’의 등장이 주는 신기함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 ‘비’는 주인공 스피드와 경쟁적 위치에서 협력과 대결을 반복하는 일본인 ‘태조’ 역으로, 박준형은 ‘스피드’를 위협하는 그랑프리 랠리의 전사로 할리우드의 옷을 입었다. 비록 조연이지만 대한민국 출신의 배우들이 할리우드 스타들과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을 목도하는 일은 새로운 감흥과 씁쓸함을 교차하게 한다. 그것은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세상에선 누구도 한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 예감과, 그럼에도 세계적 스타의 문턱에 들어선 한 배우를 보는 감회 같은 것이리라.
비와 박준형 조연 출연 ‘또 다른 볼거리’
‘매트릭스’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가 메가폰을 잡은 ‘스피드 레이서’에는 한국 배우 비가 등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그저 ‘스피드 레이서’에 빨려들어가 자신을 잊어버리겠지만, 다른 관객들은 판타지의 매몰보다는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를 관망하는 기이한 힘마저 생긴다. 영화를 구경이 아닌 사색 차원에서 보면, 게임과 만화와 영화가 유기적으로 뭉쳐져 있다. 어떤 경계도 없이 시공을 넘나드는 ‘스피드 레이서’가 오래된 미래, 미래 영화의 어떤 실마리라는 사실이 의심할 바 없이 만져진다.
그러니 이 욕지기 나는 감각의 제국을 어찌하랴. 거대한 문어처럼 아시아의 문화를 모두 빨아들여 자기화하는 할리우드판 욕망의 제국을 어찌하랴. ‘스피드 레이서’는 감각의 촉수를 간단없이 자극해 결국 멍하게 만들어버리는 자극의 극한이 무엇인지 내게 배우라 한다. 미래 관객들은 모든 영화를 다 이런 식으로 소비하게 될까? ‘스피드 레이서’ 속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그랑프리를 담은 흑백 2D 화면이 왈칵 반가웠을 때, ‘스피드 레이서’는 미래 영화에 대한 근심이자 희망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근심이자 절망스런 희망, 오래된 미래와 앞서가는 과거가 거기, 현기증 나는 감각의 제국 앞에 놓여 있다.